일본에서 우유 배달로 생계를 이어가던 스물두 살 청년이 99세로 세상을 떠날 때는 200여 개 계열사를 거느린 그룹의 창업주였다. 롯데그룹 창업주 신격호 명예회장(1921~2020)은 이병철·정주영과 함께 대한민국 대기업 창업 1세대로 꼽히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가 남긴 말은 성공 방정식보다 훨씬 무게가 다른 곳을 향한다. 집무실 액자에는 '거화취실(去華就實)', 화려함을 버리고 실속을 취하라는 문구가 걸려 있었다.
영결식장에 놓인 고 신격호 회장 영정. 故 신격호 롯데 회장이 깨달은 인생 철학 / 연합뉴스
한국과 일본을 오갈 때도 혼자 서류가방을 들고 비행기를 탔고, '기업인은 경영만 잘하면 된다'며 평생 노출을 경계했다.
말년에 가족 갈등과 경영권 분쟁까지 직접 겪은 그의 말에는 단순한 성공론 대신 오래 살아본 사람이 느낀 냉정한 현실이 담겨 있다.
1위. "돈은 좇는다고 따라오는 게 아니다"
신격호 회장은 사업 초기부터 사람과의 약속을 지키는 일을 재무 목표보다 먼저 뒀다. 눈앞의 이익을 쫓다가 신뢰를 잃은 기업은 결국 오래 가지 못한다는 것이 그의 일관된 신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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롯데 공식 어록에도 "잘 모르는 사업을 확장 위주로 방만하게 경영하면 결국 국민에게 피해를 주게 된다"는 말이 남아 있다. 신규 사업은 반드시 기존 역량을 강화하는 방향에서만 추진해야 한다는 지론 역시 같은 맥락이다.
돈을 목표로 설정하는 순간 판단이 흐려진다는 점은 행동경제학에서도 반복적으로 확인된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대니얼 카너먼은 저서 '생각에 관한 생각'에서 "사람은 이익을 추구할 때보다 손실을 두려워할 때 더 비합리적인 결정을 내린다"고 설명했다. 돈을 쫓는 상태에서는 단기 손실에 과민 반응하게 되고 장기 신뢰를 희생하는 선택을 반복하게 된다는 것이다.
신격호 회장이 강조한 것은 결국 같은 원리다. 돈은 결과이지 목표가 아니라는 말은 수사가 아니라 수십 년의 경영 경험에서 나온 실용적 결론이다.
오래 가는 기업과 오래 가는 사람의 공통점은 신뢰를 돈보다 먼저 지켰다는 점이다.
2위. "사람은 편해지는 순간 무너진다"
사업이 안정궤도에 오른 뒤에도 신격호 회장의 생활 방식은 달라지지 않았다. 검소했고,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긴장감을 유지했다. "CEO는 회사가 잘 나갈 때일수록 못 나갈 때를 대비해야 한다"는 말은 롯데 내부에서 수십 년간 회자된 어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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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실적이 악화될 때는 훗날 회복을 전제로 투자를 멈추지 말라는 말도 함께 남겼다. 호황과 불황 모두에서 긴장을 놓지 않는 것이 그의 방식이었다.
심리학에서는 이 현상을 '항상성 편향(Status Quo Bias)'으로 설명한다. 사람은 익숙한 상태를 유지하려는 경향이 강해서 변화가 필요한 시점에도 습관적 선택을 반복한다. 안정감이 쌓일수록 경고 신호를 무시하는 경향이 강해진다는 것이다.
실제로 기업 부도 사례를 분석한 연구들은 파산 2~3년 전이 오히려 실적이 가장 좋았던 시기인 경우가 많다는 결과를 반복해서 보여준다. 가장 위험한 순간은 절벽 앞이 아니라 "이 정도면 괜찮다"는 감각이 자리 잡을 때다.
나심 탈레브는 저서 '블랙 스완'에서 "오래된 안정은 무지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위험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게 된 것"이라고 썼다. 신격호 회장이 평생 경계했던 것은 실패가 아니라 편안함이었다. 성장보다 무서운 건 멈춰버린 감각이라는 말은 그 긴장감에서 나왔다.
3위. "내가 가장 무서운 건 사람의 마음이다"
수십 년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두 나라에서 동시에 그룹을 경영했고, 말년에는 두 아들 사이의 경영권 분쟁을 직접 겪었다. 그 모든 경험 끝에 신격호 회장이 가장 어렵다고 꼽은 것은 사람의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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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나 사업 구조는 시간이 지나면 해결책이 보이지만, 사람의 욕심과 감정에는 논리가 통하지 않는 순간이 있다는 것을 그는 체감했다. 특히 가까운 관계일수록 감정이 더 복잡하게 얽힌다는 점을 직접 살아낸 사람이었다.
하버드대 75년 장기 성인 발달 연구는 삶의 만족도를 결정하는 가장 강력한 변수가 재산도 건강도 아닌 '관계의 질'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연구 책임자 로버트 월딩거는 저서 '굿 라이프'에서 "따뜻한 관계를 유지한 사람들이 더 오래, 더 건강하게 살았다"고 밝혔다.
역설적으로 관계가 삶을 지탱하는 동시에 가장 깊은 상처도 관계에서 온다. 신격호 회장이 능력보다 사람 보는 눈이 더 중요하다고 강조한 것은 사업적 판단이 아니라 삶 전체를 겪어본 후의 고백에 가까웠다.
관계를 잘 다루는 사람이 결국 오래 살아남는다는 것을 그는 99년의 삶으로 증명했다.
4위. "운보다 무서운 건 방향을 잃는 것이다"
신격호 회장은 운을 부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운보다 더 결정적인 것은 방향이라고 봤다. 방향을 잃으면 자원이 풍부해도 흔들리고, 사람이 많아도 불안해진다. 반대로 방향이 선명한 사람은 넘어진 뒤에도 다시 일어설 지점을 알고 있다. 사업이 흔들릴 때마다 그가 되돌아온 질문은 "우리가 무엇을 하는 회사인가"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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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신념은 그의 경영 방식에 그대로 반영됐다. 롯데는 수십 년간 유통·식품·호텔이라는 소비재 중심 축을 유지하며 확장했고, 잘 모르는 영역에는 쉽게 뛰어들지 않았다. 시너지를 창출할 수 없는 사업 확장은 결국 방향을 흐리게 한다는 지론에서였다. 실제로 1997년 외환위기 당시 방만하게 확장했던 그룹들이 줄줄이 쓰러질 때 롯데는 살아남았다. 방향이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빅터 프랭클은 저서 '죽음의 수용소에서'에서 "삶의 이유를 아는 사람은 어떤 방법으로든 살아남는다"고 썼다. 방향은 목표보다 근본적인 것이다. 목표는 달성되면 사라지지만 방향은 매 순간 선택의 기준이 된다. 신격호 회장이 평생 되물었던 "어디로 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기업경영이 아니라 삶 전체를 관통하는 원칙이었다.
마무리
돈을 먼저 좇다가 신뢰를 잃고, 편안함에 취해 감각이 무뎌지고, 사람의 마음을 가볍게 봐서 관계를 잃고, 방향을 잃어 자원을 낭비하며 사는 사람이 있다. 반면 신뢰를 먼저 쌓고 긴장을 유지하며 관계를 조심스럽게 다루고 방향을 잃지 않는 사람이 있다.
99년을 산 신격호 회장이 결국 남긴 것은 성공 비결이 아니라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가에 관한 이야기였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건 많이 가지는 게 아니라, 흔들려도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자기만의 방향을 끝까지 붙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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