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빈 외곽의 허름한 학교 교사 관사. 1797년 1월 31일,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한 아이가 태어났다. 아버지 프란츠 테오도르 슈베르트(Franz Theodor Schubert, 1763~1830)는 가난한 초등학교 교장이었고, 어머니 엘리자베트(Elisabeth Vietz Schubert, 1756~1812)는 아이가 열다섯 살이 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났다. 이름은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Franz Peter Schubert, 1797~1828). 그가 31년이라는, 조물주도 민망할 정도로 짧은 생애 동안 남긴 작품은 무려 1천 편이 넘는다. 교향곡, 실내악, 피아노곡, 그리고 600곡이 넘는 노래(독일어로 '리트(Lied)')까지. 솔직히 말하면, 그는 죽기 위한 짬을 내기가 어려웠을 것 같다.
천재는 가난하고 권력은 둔하다
슈베르트는 어린 시절부터 음악 신동이었다. 열한 살에 빈 황실 예배당 소년합창단에 들어가 당대 최고의 음악교육을 받았고, 그의 음악교사였던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nio Salieri, 1750~1825)조차 이 소년의 재능에 혀를 내둘렀다. 그런데 이 살리에리가 누군가. 바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1756~1791)를 질투해 독살했다는, 물론 역사적으로는 근거 없는, 전설의 주인공이다. 그러니 슈베르트 입장에서는 선생이 왠지 좀 무서웠을 수도 있다.
"선생님, 저도 너무 잘하면 위험한 건 아닌가요?"
합창단 시절이 끝나자 그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교사가 됐다. 하지만 교실에서의 슈베르트는 딱히 열정이 넘쳤다고 보기 어렵다. 낮에는 아이들 앞에서 알파벳을 가르치고, 밤에는 악보를 쌓아놓고 음표를 쏟아냈다. 1818년, 그는 드디어 교사직을 때려치운다. 오늘날로 치면 '퇴사 후 창작 활동'이다. 주변에서 걱정했겠지만, 결과적으로 인류는 그 결정덕분에 수백 곡의 걸작을 얻었다.
문제는 돈이었다. 슈베르트는 거의 평생 가난했다. 작품을 팔아봐야 출판사는 헐값을 쳤고, 귀족후원자들은 자기 취향에 맞는 음악만 원했다. 그의 음악은 너무 독창적이고, 때로는 너무 어둡고, 때로는 너무 길었다. 교향곡 9번 '위대한'은 너무 길다는 이유로 초연(初演)조차 거부당했다. 지휘자들이 연습도중 지쳐 포기했다는 기록도 있다. 세상은 천재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알아보기 귀찮아하는 것이다.
친구들과 나눈 살롱의 불꽃
슈베르트에게는 돈 대신 친구들이 있었다. 시인 요한 마이어호퍼(Johann Mayrhofer, 1787~1836), 화가 모리츠 폰 슈빈트(Moritz von Schwind, 1804~1871), 성악가 요한 미하엘 포글(Johann Michael Vogl, 1768~1840) 등 예술가·지식인 친구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음악을 연주하고 시를 낭독하고 술을 마셨다. 이 모임은 '슈베르티아데(Schubertiade)'라 불렸다. 요즘 말로 하면 지식인 소모임, 혹은 아무나 못 들어오는 사랑방 문화 행사다.
이 살롱문화는 단순한 친목이 아니었다. 당시 오스트리아는 메테르니히(Klemens von Metternich, 1773~1859)가 이끄는 보수 반동 체제 아래에서 출판·집회·언론이 모두 검열받던 시대였다. 1815년 나폴레옹(1769~1821) 전쟁이 끝난 뒤 유럽의 지배층은 혁명의 불씨를 끄기 위해 혈안이 됐다. 그 억압의 시대에 슈베르티아데는 자유로운 생각과 감정을 나누는 일종의 저항공간이었다. 슈베르트 자신도 한때 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그의 친구 요한 젠(Johann Senn, 1795~1857)은 급진적 사상을 이유로 체포되기까지 했다.
검열 받는 시대에 음악은 말이 할 수 없는 것을 했다. 가사에 담기 어려운 감정, 직접 말하면 잡혀가는 생각들이 선율 속에 녹아들었다. 슈베르트의 노래 연작 '겨울 나그네(1827년)'는 그 시대 지식인의 고독과 절망을 담은 작품으로 읽힌다. 방랑하는 청년이 사랑에 버림받고 사회에서 밀려나 눈 덮인 길을 홀로 걷는 이야기다. 지금 들어도 등줄기가 서늘하다. 아니, 등줄기가 서늘한 정도가 아니라 두꺼운 이불을 덮고 싶어진다.
31살에 죽어서 200년을 산다는 것
슈베르트는 1828년 11월 19일, 3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장티푸스로 알려져 있으나, 매독 치료제로 쓰이던 수은중독이 겹쳤다는 설도 있다. 어느 쪽이든 19세기 의학의 한계가 한 천재를 앗아간 셈이다. 그는 자신이 존경하던 베토벤(1770~1827) 곁에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고, 실제로 빈의 중앙묘지에 나란히 잠들어 있다. 베토벤이 먼저 갔으니, 슈베르트는 불과 1년 반 만에 뒤를 따른 셈이다. 생전에 이루지 못한 만남을 저 세상에서 이루었을까.
더 기막힌 사실이 있다. 슈베르트가 살아 있는 동안 그의 음악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교향곡 8번 '미완성(Unfinished Symphony)'은 작곡된 지 43년이 지난 1865년에야 처음 연주됐다. 교향곡 9번 '위대한'은 슈베르트 사후 11년 뒤인 1839년, 펠릭스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 1809~1847)이 악보를 발굴해 초연했다. 죽고 나서야 빛을 본 것이다. 역사는 참으로 게으르게 정의를 실현한다.
그러나 역사가 실현한 정의는 실로 오래 지속됐다. 오늘날 슈베르트의 음악은 전 세계 연주회장에서 울려 퍼지고, 그의 노래는 아마추어 성악가들의 단골 선곡이 되었으며, '아베 마리아'는 결혼식과 장례식에서 동시에 사랑받는 희한한 노래가 됐다. 죽어서 200년을 사는 법, 그것이 슈베르트가 보여준 길이다.
한국에서 슈베르트를 읽는다면
자, 이쯤에서 우리 이야기를 해보자.
슈베르트의 삶은 놀랍도록 한국현실과 겹치는 지점이 많다. 첫째, 천재성이 시장논리에 짓밟히는 문제다. 슈베르트는 출판사와 귀족취향에 맞춰 작품을 헐값에 팔았다. 오늘날 한국의 젊은 예술가들은 어떤가. 음악, 문학, 미술, 연극을 하겠다는 이들에게 돌아오는 첫 마디는 으레 "그거 먹고 살 수 있냐"다. 창작자에 대한 정당한 대가 없이 '열정 페이'로 버티게 하는 구조는 200년 전 빈의 출판시장과 다를 게 없다.
둘째, 억압적 환경에서 예술의 역할이다. 슈베르티아데는 검열의 시대에 자유로운 사유의 공간이었다. 한국도 긴 권위주의 역사 속에서 예술이 저항의 언어였던 시절이 있었다. 김지하(1941~2022)의 시, 임진택(1950~ )의 마당극, 민중가요의 전통이 그것이다. 지금 이 시대, 예술이 다시 그 역할을 요청받고 있지는 않은가. 진영논리와 가짜뉴스가 횡행하는 지금, 인간의 내면을 솔직하게 건드리는 예술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셋째, '살아 있을 때 알아봐야 한다'는 교훈이다. 슈베르트의 음악은 그가 죽은 뒤에야 제대로 평가받았다. 한국사회는 예술가, 과학자, 사회운동가들을 살아 있는 동안 얼마나 존중하는가. 노벨상을 받거나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추모열기가 뜨거워지는 패턴은 이미 낯설지 않다. 생전에 인정받지 못한 채 생활고에 시달린 예술가들의 이름은 헤아리기도 어렵다.
넷째, 슈베르티아데 정신이다. 돈도 없고 권력도 없었지만, 슈베르트에게는 함께 꿈꾸는 동료가 있었다. 지금 한국의 청년 예술가·지식인·사회운동가들에게 그런 공동체가 있는가. 경쟁에 내몰리고, 알고리즘에 갇히고, 구독자 수로 서열이 매겨지는 오늘날, 서로의 작품에 귀 기울이고 밥 한 끼 나누는 살롱문화는 어느새 사치가 됐다.
마지막 한 마디
슈베르트는 31년을 살았다. 그런데 그 31년이 200년을 먹여 살리고 있다. 그가 후세에 남긴 것은 악보 묶음만이 아니다. '인정받지 못해도 써라, 팔리지 않아도 그려라, 가난해도 노래하라'는 메시지다. 물론 현실에서 그 메시지만으로는 월세를 낼 수 없다. 그러니 사회가 해야 할 일이 있다. 천재가 굶지 않도록, 예술가가 존엄을 잃지 않도록, 창작의 토양을 사회가 함께 일구어야 한다.
200년 전 빈 골목의 가난한 음악가가 오늘 우리에게 묻고 있다.
"당신들의 슈베르트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아마 편의점 야간 알바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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