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거진=윤건호 작가]
‘누군가와 침대를 나누는 건 사랑하는 행동입니다.
마틴, 당신도 원한다면 내 침대를 가져도 돼요. 난 바닥에서 자면 되니까.
난 항상 내 친구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어요.’
(마틴 바시어와 마이클 잭슨의 인터뷰 중)
36세의 다 큰 성인이 아이들과 아이처럼 천진하게 어울리는 것을 두고 세간은 의심과 공격을 가했지만, 그것이야 말로 지금 세상에 필요한 것이라고 마이클은 답했다.
순수한 사랑, 그것이 더 필요하다고.
“그림에서 가르쳐야 할 규칙은 하나뿐이에요, 보는 것이요.“
(영화 ‘루이스웨인: 사랑을 그린 고양이 화가’ 중)
그림말고는 모든 게 서툴렀던 화가 루이스는 새로 부임한 가정교사 에밀리에게 그림에 대해 이처럼 말한다. 오직 보는 것이 전부라고. 그리는 법과 같은 ‘기술’은 너무 어른들의 것이니까 말이다.
교육과 훈련에 의한 습득과 숙련이 발전이라는 것은 당연한 통념이지만 그것이 ‘너무’ 당연하게 여겨지는 것은 무서운 일일지도 모른다.
‘보는 것’이 뭘까?
‘눈이 있으면 누구나 다 볼 수 있는 것 아니겠나?’ 답할 수도 있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아이의 눈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 아이들은 작은 돌멩이에서 바위를 보고, 바닥의 점선 너머를 용암바다라고 감각 한다. 그렇게 보면 그렇게 보이는 것- 세상을 온전하게 향유하는 것이다. 깡통 캔은 공이 되고, 나뭇가지는 검이 되며, 딱정벌레는 친구가 된다. 아이들은 정의해 둔 개념을 초월하는 힘을 가졌다.
우리는 숫자로 규율의 정도를 정한다. 다섯 살이면, 열 살이면, 스무 살이면… 우리는 동심을 당연하게 버려야 하는 사회에서 살고 있지 않을까. 누구나 그래왔으니 그것이 당연한 거라고 여기면서 ‘보는 것’을 향유하고 느끼는 감각을 거세당한 채 자라오진 않았을까.
데이터에 의한 취사선택은 편협한 시각을 만들어낸다. 아직 경험해보지 못하고 탐구하지 못한 것에 대한 순수한 호기심이 따를 때, 진짜 자아의 단서들을 발견할 수 있다.
대상을 보는 것에 몰입하더라도 기술적 훈련과 가치관의 지도가 우선되면 몰입했던 시각적 자산마저 의심하게 된다. 인간이라면 그 의심이 드는 순간부터 자신에게 솔직해지기 어렵다. 세간의 시선과 기준에 따라 스스로 검열하는 서글픈 숙련이 시작되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모든 것은 ‘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마이클 잭슨이 말하는 사랑은 결국 이 시선의 높이를 의미한다. 아이들의 동심에 어깨를 맞추는 어른들이 필요하다고, 동심으로 바라본 세상에 의심을 품지 않아도 되는 그 시절을 지켜주자고.
지금 보고 있는 것을 믿어도 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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