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전시는 영국 던디대학교 미술대학(Duncan of Jordanstone College of Art & Design) 회화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김예린 작가의 첫 한국 개인전으로, 그동안 지속적으로 탐구해 온 ‘감각’과 ‘존재’의 문제를 회화적 언어로 집약해 보여주는 자리다. 최근 영국 미술계에서 다양한 전시와 프로젝트를 통해 가능성을 인정받은 신진 작가가 국내 관객에게 처음 소개되는 무대라는 점에서도 의미를 갖는다.
전시 제목 《Before I Knew》는 ‘미처 알기 전에’라는 뜻을 담고 있다. 작가는 인간이 무언가를 이해하고 정의하기 이전에 먼저 경험하는 감정과 감각에 주목한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풍경, 설명할 수 없는 그리움, 이유 없이 마음을 움직이는 빛과 공기, 그리고 언어로 표현되기 이전의 정서적 흔적들이 이번 전시를 구성하는 중요한 출발점이다.
김예린의 작품은 구체적인 사건이나 서사를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기억의 잔상과 감정의 결을 화면 위에 천천히 쌓아 올린다. 작품 속 인물과 풍경은 특정한 이야기를 전달하기보다 관람객 각자의 경험과 감정을 비추는 거울처럼 기능한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화면은 저마다의 기억을 불러내며, 보는 이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내면과 마주하도록 이끈다.
작가의 회화는 설명보다 체험에 가깝다. 화면 속에는 명확한 답이나 메시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작품과 관람객 사이에 충분한 여백을 남겨두고, 그 공간 속에서 감정과 기억이 자연스럽게 생성되도록 한다. 이는 관람의 경험을 단순한 감상이 아닌 하나의 사유 과정으로 확장시킨다.
김예린 작업의 중심에는 오랫동안 변하지 않은 하나의 신념이 자리한다. 바로 “예술은 아름다워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작가가 말하는 아름다움은 단순히 시각적 즐거움이나 장식적 미학에 머물지 않는다. 존재를 바라보는 태도, 삶을 이해하는 방식, 그리고 인간이 느끼는 감정의 깊이까지 포함하는 보다 본질적인 개념에 가깝다.
초기 작업에서 인간 존재의 한계와 욕망, 삶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졌던 그는 최근 들어 보다 평범한 일상의 순간들에 집중하고 있다. 창가에 머무는 오후의 빛, 스쳐 지나가는 사람의 표정, 계절이 바뀌는 풍경의 미묘한 변화와 같은 장면들은 그의 화면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얻는다. 특별한 사건이 아닌 평범한 하루 속에서 발견되는 아름다움이야말로 작가가 주목하는 대상이다.
이러한 시선은 빠른 속도로 소비되는 현대 시각문화와도 뚜렷한 대비를 이룬다. 강렬한 자극과 즉각적인 반응이 요구되는 시대 속에서 김예린은 천천히 바라보고 오래 머무르는 감상의 가치를 이야기한다. 작품은 관람객에게 잠시 멈춰 서서 자신의 감각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제안하며, 잊고 있었던 기억과 감정들을 다시 불러낸다.
특히 이번 전시는 동시대를 살아가는 청년 세대의 정서적 풍경을 섬세하게 포착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불안과 희망, 상실과 기대가 공존하는 시대적 현실 속에서 작가는 거대한 담론이나 사회적 메시지보다 개인의 내면에 집중한다. 그리고 그 내면에 존재하는 감정의 결들이 결국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 가장 근본적인 힘이라고 말한다.
전시를 구성하는 작품들은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되기보다 각각 독립적인 기억의 조각처럼 존재한다. 그러나 관람객이 전시 공간을 따라 이동하는 과정에서 서로 다른 장면들은 하나의 정서적 흐름으로 이어진다. 이는 마치 오래된 기억이 예고 없이 떠오르고, 흩어진 감정들이 어느 순간 하나의 감각으로 연결되는 과정과도 닮아 있다.
김예린은 “우리는 어떤 감정을 이해하기 전에 이미 그것을 느끼고 있으며, 어떤 기억은 이름 붙여지기 전부터 우리 안에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의 회화는 바로 그 지점에서 출발한다. 언어와 인식 이전에 존재하는 감각을 포착하고, 그것을 다시 관람객의 내면으로 돌려보내는 것이 그의 작업이 지닌 본질이다.
《Before I Knew》는 단순한 신진 작가의 데뷔전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무심코 지나쳐온 감각과 기억, 그리고 존재의 아름다움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전시다. 삶은 특별한 의미를 부여받은 뒤에 가치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아름답다는 사실을 조용히 일깨운다.
한편 국내 첫 개인전을 통해 관객과 만나는 김예린은 이번 전시를 통해 동시대 회화가 지닌 서정성과 사유의 가능성을 새롭게 제시한다. 《Before I Knew》는 감각과 기억의 경계에서 피어나는 아름다움을 탐구하며, 예술이 여전히 인간의 내면을 비추는 가장 깊은 언어임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전시로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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