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쉼과 어제의 기억 머무는 바닷길이 열린다[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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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쉼과 어제의 기억 머무는 바닷길이 열린다[여행]

이데일리 2026-05-29 05:30:0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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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 강경록 여행전문기자] 한때 섬은 멀고 불편한 곳이었다. 배 시간을 맞춰야 했고 날씨가 나쁘면 발이 묶였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그 불편을 감수하고 섬으로 들어간다. 도시에서 놓친 쉼을 찾기 위해서다. 충남 보령 앞바다의 ‘삽시도’와 ‘고대도’는 서로 다른 이야기로 여행자를 맞는다. 삽시도는 바다 앞에서 일하고 쉬는 섬이고, 고대도는 조선의 바자가 외부 세계와 처음 만났던 기억을 품은 섬이다. 대천항을 떠난 배가 바다로 나서면 섬은 한참 뒤에야 윤곽을 드러낸다. 먼저 낮은 산등성이가 수평선 위로 떠오르고, 그 아래 포구와 지붕과 해안선이 차례로 보인다. 섬 여행은 늘 그렇게 시작된다. 육지에서 멀어지는 일이 아니라 도시의 속도에서 잠시 빠져나오는 일이다.

썰물 때 드러나는 바닷길 위를 여행자가 천천히 걷고 있다. 고대도 앞바다는 하루 두 번 바다의 표정이 달라진다. 물때에 따라 길이 열리고 다시 잠기는 풍경은 서해 섬 여행의 묘미다.


삽시도 해송 숲길을 따라 붉은 흙길 계단이 이어진다. 바다와 숲이 맞닿은 섬 둘레길은 고대도를 천천히 걸으며 즐기기 좋은 섬으로 만든다.




◇삽시도에 스며든 ‘느린 하루’

그 변화가 가장 선명하게 보이는 곳이 ‘삽시도’다. 충남 보령시 오천면에 딸린 이 섬의 면적은 3.8㎢로, 생김새가 활에 꽂힌 화살 같다 해 삽시도라 이름이 붙여졌다. 진너머해수욕장과 수루미해변, 면삽지와 물망터, 해송 숲길이 해안을 따라 이어진다. 삽시도의 풍경은 한눈에 사람을 압도하기보다 걸을수록 조금씩 스며든다.

최근 이 섬에는 배낭 대신 노트북 가방을 든 여행자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허겁지겁 선착장으로 뛰는 대신 자발적으로 마지막 배를 보내고 섬의 시간에 자신을 맡긴 워케이션(휴가지 원격근무)족이다. 오전에는 바다가 내다보이는 일터에서 일하고, 오후에는 물때를 맞춰 면삽지 쪽 바닷길을 걷는다. 도시에서는 일과 휴식이 서로를 밀어내지만, 이 섬에서는 그 사이에 바다가 끼어든다.

이 풍경은 단순한 일시적 유행이 아니다. 평일이면 적막해지던 섬마을이 일과 쉼을 함께 누리려는 이들을 품기 위해 민박집 문을 열고 공유 오피스를 마련하면서 일어난 변화다.

삽시도 해안 갯벌에서 한 주민이 갓 채취한 해산물을 다듬고 있다. 잔잔한 바다와 초록빛 갯벌이 어우러진 풍경이 섬 특유의 느린 시간을 보여준다.


일출 무렵 삽시도 해안길을 따라 여행객들이 천천히 걷고 있다. 붉은 노을과 푸른 바다가 만나는 순간, 섬은 가장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준다.


삽시도 해안길에서 한 여행객이 자전거를 세워두고 서해 바다를 사진에 담고 있다. 꽃길과 바다가 맞닿은 섬 풍경이 한 폭의 수채화처럼 펼쳐진다.


다만 섬에서의 시간은 낭만보다 ‘현실’에 가깝다. 원격근무를 하기에 충분한 업무 환경을 갖추었지만, 바람이 거세져 여객선이 통제되는 순간 그림 같은 오션 뷰는 순식간에 고립이라는 현실이 된다. 이 뜻밖의 묶임을 조급해하지 않고 자연의 흐름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을 때, 삽시도의 진짜 시간이 시작된다.

가장 극적인 장면은 면삽지로 가는 길에서 펼쳐진다. 면삽지는 하루 두 차례 조수(潮水)에 따라 삽시도와 붙었다 떨어지는 작은 무인도다. 여행자는 물이 빠지기를 기다렸다가 길이 열리면 섬에서 또 하나의 섬으로 걸어 들어간다. 선착장에서 면삽지와 해송 길로 이어지는 둘레길은 약 5㎞로, 천천히 걸으면 3시간 정도 걸린다. 삽시도의 하루는 시계보다 물때에 맞춰 흘러간다.

섬의 정취는 소박한 밥상에서도 묻어난다. 봄에는 바지락과 주꾸미, 여름이면 우럭과 꽃게가 식탁에 오른다. 물때가 맞으면 갯벌에서 갓 잡아 올린 고동과 소라가 곁들여진다. 아침에는 칼칼한 된장국으로 시작해 저녁에는 꽃게탕으로 마무리하는 하루. 화려하지는 않지만 바다의 계절이 온전히 담긴 맛이다.

드론으로 내려다본 삽시도 전경. 길게 뻗은 방파제와 포구, 숲과 해변이 어우러지며 서해 섬마을 특유의 지형을 보여준다.


삽시도 마을과 갯벌, 방파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있다. 바다와 삶이 맞닿은 전형적인 서해 어촌의 모습이다.




◇고대도에 남은 귀츨라프의 흔적

삽시도에서 배를 갈아타고 고대도로 향하면 여행의 분위기는 달라진다. 일과 쉼의 이야기는 바다를 건너 역사와 순례의 이야기로 바뀐다. 원산도와 안면도 사이에 자리한 고대도는 면적 0.9㎢에 불과하지만 예부터 사람이 모여 살아 옛 집터가 많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고대도와 원산도 일대는 조선 시대 서해 연안 항로의 주요 정박 해역이었다. 독일인 선교사 칼 귀츨라프 일행이 이곳에 들어온 것도 조선과 접촉하며 배를 안전하게 댈 수 있는 천혜의 해역이었기 때문이다. 선교와 통상, 항해의 길목이 이 바다에서 겹쳤다.

1832년 고대도에 닿은 귀츨라프의 선교는 일방적인 방법은 아니었다. 낯선 이방인을 경계하던 주민들을 위해 귀츨라프는 직접 해안가 흙을 파 감자 씨앗을 심고 재배법을 한문으로 적어 주었으며, 심한 독감에 시달리던 주민들에게 서양 의약품을 처방했다. 이 서투르지만 다정했던 인간적인 마주침을 통해 감자 재배법과 서양 의약품이 섬 포구로 스며들었다. 그는 훗날 조선 항해기를 통해 서양에 한글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기도 했다.

썰물로 드러난 고대도 암반 해안을 따라 여행객들이 천천히 바다를 걷고 있다. 검은 갯바위와 선바위가 이어지는 고대도 해안은 서해 섬 특유의 거친 풍경과 고요한 시간을 함께 품고 있다.


고대도 해안의 잔잔한 물웅덩이에 하늘과 구름이 그대로 내려앉았다. 검은 갯바위와 투명한 바다가 어우러진 풍경은 남해나 제주와는 또 다른 서해의 고요를 보여준다.




그래서 고대도의 의미는 최초의 선교지라는 이름에 그치지 않는다. 조선의 닫힌 해안에 바깥 세계의 배가 닿았던 자리다. 근대는 대도시가 아닌, 이 작은 섬의 포구에서 낯선 이들의 만남으로 조용히 시작됐다.

배에서 내려 낮은 언덕 아래 어촌 마을 골목길을 걷는다. 자갈해수욕장 끝머리에는 거대한 선바위가 우뚝 서 있다. 예부터 어부들이 무사를 빌던 이 바위는 오랜 시간을 몸에 새긴 채 서 있다. 고대도를 기억하게 하는 것은 거대한 기념비보다 이렇듯 고요한 풍경들이다.

해 질 무렵 삽시도 선착장에는 마지막 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모인다. 누군가는 노트북 가방을 들고 있고, 누군가는 젖은 운동화를 털어낸다. 고대도에서는 바닷바람이 선바위를 돌아 포구 쪽으로 넘어온다. 작은 섬 두 개는 여전히 조용하다. 다만 예전과 조금 달라진 점이 있다. 사람들은 이제 이 섬에 잠시 들르기보다 하루쯤 더 머물기 시작했다.

고대도 해안에 세워진 범선 조형물 뒤로 썰물 때 드러나는 바닷길이 길게 이어지고 있다. 1832년 독일 선교사 칼 귀츨라프가 이 섬에 상륙한 뒤 조선 최초의 개신교 선교 기록이 시작됐다.


드론으로 내려다본 보령 고대도 전경. 작은 포구와 마을, 해송 숲이 어우러진 섬은 서해 다도해 풍경 속에 고즈넉하게 자리하고 있다.


삽시도 선착장에서 차량과 주민들이 여객선에서 내리고 있다. 관광객과 주민, 생필품까지 함께 실어 나르는 섬의 바닷길 풍경이다.


◇여행 메모

▶가는 법=삽시도와 고대도는 충남 보령 대천항에서 신한해운 여객선을 타고 간다. 신한해운 가자섬으로호가 대천항에서 삽시도·장고도·고대도를 오간다. 대천항에서 하루 세 차례 왕복 운항하지만, 조석간만의 차로 삽시도는 밤섬항에 기항할 수 있어 출발 전 여객선사 운항 시간표를 확인하는 것이 필수다.

▶운임=대천~고대도 일반 여객 운임은 출항 기준 1만 4300원, 입항 기준 1만 3200원이다. 차량 선적도 가능하지만 선박 사정과 성수기 혼잡에 따라 달라질 수 있어 사전 문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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