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현대 오페라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피터 그라임스'는 영국 작곡가 벤자민 브리튼의 명성을 세계적으로 확립시킨 작품이다. 영국 시인 조지 크랩의 서사시 'The Borough'에서 영감을 받아 탄생한 이 오페라는 폐쇄적인 어촌 공동체를 배경으로 인간 내면의 불안과 사회적 폭력을 집요하게 응시한다.
이야기는 소년 견습 어부의 죽음 이후 시작된다. 어부 피터 그라임스는 재판 끝에 사고사라는 결론을 얻지만, 마을 사람들의 의심과 편견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는 성공과 부를 통해 자신을 둘러싼 혐오를 극복하려 하지만, 새로운 견습 소년을 둘러싼 또 다른 의혹이 불거지면서 공동체의 적개심은 광기로 치닫는다. 결국 그는 끝없는 바다로 향하며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작품은 한 인간을 향한 집단적 배제가 어떻게 폭력으로 변모하는지를 서늘하게 드러내며 오늘날의 사회와도 깊게 맞닿는다.
무엇보다 '피터 그라임스'는 음악 자체만으로도 압도적인 긴장감을 만들어내는 작품이다. 특히 오늘날 독립적인 관현악곡으로도 자주 연주되는 '바다 간주곡(Sea Interludes)'은 브리튼 음악 세계의 정수를 보여준다. 브리튼은 바다를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인간을 압도하고 삼켜버리는 거대한 존재로 묘사한다. 불안정한 화성과 날카로운 관현악법은 공동체 내부의 긴장과 인간 심리의 균열을 집요하게 드러내며, 때로는 차갑고 냉혹하게, 때로는 몽환적이고 시적으로 흐르며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허문다. 이러한 음악적 구성은 클래식에 익숙하지 않은 관객에게도 강렬한 몰입감을 선사할 것으로 기대된다.
이번 공연의 지휘는 영국 출신 지휘자이자 피아니스트 알렉산더 조엘이 맡는다. 영국에서 태어나 독일을 중심으로 활동해온 그는 오페라와 관현악 레퍼토리를 넘나들며 섬세한 해석과 구조적인 균형감을 인정받아온 음악가다. 악보 속에 숨겨진 긴장과 미세한 감정선을 치밀하게 드러내는 지휘 스타일로 정평이 난 그는, 브리튼 특유의 냉철함과 서정성이 교차하는 음악 세계를 밀도 있게 이끌 예정이다.
연출은 2024년 국립오페라단 '죽음의 도시'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줄리앙 샤바이 맡는다. 그는 이번 작품에서 리얼리즘과 추상성 사이의 긴장감을 무대 위에 구현하며, 공동체 안에서 벌어지는 사회적 폭력을 날카롭게 포착할 계획이다. 동시에 음악이 만들어내는 시적이고 몽환적인 공간감을 극대화해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독창적인 무대를 완성한다.
무대 디자인 또한 작품의 심리적 긴장감을 극대화한다. 회전 무대 위에는 해체되고 녹슨 거대한 배가 놓인다. 이 배는 단순한 배경을 넘어 마을 공동체이자 피터 그라임스의 내면세계를 상징하는 핵심 장치로 기능한다. 각도와 움직임에 따라 선술집, 바닷가, 피터의 집 등 다양한 공간으로 변모하며 불안정한 정서를 시각화한다. 의상은 실제 어부들의 삶이 느껴지도록 낡고 거친 질감과 빈티지한 분위기를 살렸으며, 우비와 작업복, 워크웨어 등의 요소를 적극 반영했다. 합창단 의상에는 그라데이션 염색 기법을 적용해 공동체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군중 심리로 보이도록 연출했다.
타이틀 롤 피터 그라임스 역에는 세계적인 헬덴테너 크리스토퍼 벤트리스가 출연한다. 그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에서 3년 연속 활약하며 바그너 오페라 '파르지팔'의 주역을 100회 이상 소화한 세계적인 테너다. 국립오페라단과는 2013년 공연을 통해 호흡을 맞춘 바 있으며, 당시 강렬한 음색과 압도적인 고음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다. 또 다른 피터 그라임스 역은 테너 김재석이 맡는다. 독일 올덴부르크 주립극장과 오스트리아 빈 폭스오퍼에서 주역 가수로 활동하며 유럽 무대에서 탄탄한 커리어를 쌓아온 그는, 약 25년 만에 한국 오페라 무대에 올라 국내 관객들과 만난다.
한편 국립오페라단의 이번 '피터 그라임스'는 단순한 비극 오페라를 넘어 혐오와 배제, 군중 심리와 사회적 폭력이라는 동시대적 문제를 정면으로 응시한다. 브리튼의 날카로운 음악과 강렬한 무대 미학, 그리고 세계적인 제작진과 성악가들이 결합한 이번 공연은 현대 오페라가 지닌 사회적 메시지와 예술적 깊이를 동시에 체감하게 할 무대로 기대를 모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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