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험은 오랫동안 '사고 나면 돈을 지급하는 금융상품'이었다. 그러나 이제 보험사들은 고객이 얼마나 자주 걷고, 어떻게 자고, 어떤 생활습관을 유지하는지까지 추적하며 보험업 자체를 데이터 산업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이에 본지는 보험사의 경쟁 축이 상품 설계와 설계사 조직에서 '실시간 건강 데이터 축적 능력'으로 이동하는 구조 변화와, 그 과정에서 등장할 감시·차별·플랫폼 독점 논란까지 함께 짚어본다.[편집자주]
보험료가 단순히 나이와 병력으로 결정되는 시대가 저물고 있다. 앞으로는 얼마나 걸었는지, 잠은 잘 잤는지, 술은 얼마나 마셨는지, 병원을 얼마나 자주 갔는지 같은 일상 행동 자체가 보험료를 실시간으로 바꾸는 기준이 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보험업계 안팎에서는 인공지능(AI)과 웨어러블 기기, 마이데이터가 결합하면서 보험산업이 '집단 평균 기반 가격 산업'에서 '개인 행동 실시간 가격화(Behavior Pricing)' 산업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27일 보험업계에 따르면 주요 보험사들은 최근 건강관리 앱과 웨어러블 기기, 생활 데이터 기반 보험 서비스 확대에 속도를 내고 있다.
KB손해보험은 최근 건강관리 활동과 보험료를 연계한 'KB다이렉트 핏(Fit)테크 건강보험'을 출시했다. 건강 상태와 무사고 유지 여부에 따라 보험료를 최대 25%까지 할인하는 구조다.
삼성화재 역시 최근 디지털 헬스케어 기업 사이어스(Sciars)와 손잡고 AI 기반 건강관리 플랫폼 구축에 나섰다. 보험 데이터와 AI 모니터링 기술을 결합해 퇴원 환자 사후 관리와 질병 예후 예측 모델 개발에 나선다는 계획이다.
보험사들이 주목하는 것은 단순 건강검진 결과가 아니다. 걷기 횟수와 수면 패턴, 심박수, 혈당 수치, 운전 습관, 병원 이용 기록, 카드 소비 데이터 같은 실시간 행동 데이터다.
과거 보험사는 가입 시점 건강검진과 흡연 여부 등을 중심으로 위험률을 계산했다. 하지만 AI와 웨어러블 기술이 결합하면서 앞으로는 고객 상태를 하루 단위, 나아가 실시간으로 분석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실제 최근 글로벌 웨어러블 시장에서는 혈당·심박·수면 데이터를 실시간 분석하는 스마트워치와 스마트링 경쟁이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 CES 2026에서는 AI 기반 건강 예측 기기와 장수 분석 디바이스, 생체 신호 분석 플랫폼 등이 대거 공개되며 '예방형 헬스케어' 흐름이 강화됐다.
국내에서도 AI 기반 이상징후 탐지 기술을 적용한 스마트링과 디지털 헬스케어 플랫폼 출시가 이어지고 있다. 모아데이타는 지난달 AI 이상징후 탐지 기능이 적용된 스마트링 '플로핏플러스(FLOFIT+)'를 출시했다.
보험업계에서는 향후 애플워치와 갤럭시워치, 혈당센서, 건강앱, 병원 데이터, 카드 소비 패턴, 약 구매 이력 등이 하나의 보험 데이터 생태계로 연결될 가능성까지 거론된다.
보험사가 병원보다 먼저 건강 이상 신호를 감지하는 시대가 올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예를 들어 수면 패턴과 심박수 이상, 운동량 감소, 병원 방문 증가 등이 AI 분석을 통해 조기에 감지되면 보험사가 먼저 건강관리 프로그램 가입이나 병원 검진을 권유하는 구조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보험산업의 핵심이 단순 보험금 지급에서 위험 예측과 행동 개입으로 이동하고 있다"며 "앞으로는 보험사가 고객 몸 상태를 가장 오래, 가장 많이 추적하는 산업이 될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보험료 체계 자체도 달라질 가능성이 크다. 현재 보험은 연령대와 질병 이력 등 평균 위험률 중심으로 가격을 책정한다. 하지만 데이터 기반 보험이 본격화하면 같은 나이·같은 직장인이라도 생활 습관에 따라 보험료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운동량이 많고 수면 상태가 안정적이며 건강검진 결과가 좋은 가입자는 보험료가 낮아지고, 반대로 음주·흡연·수면 부족·운동 부족 패턴이 반복되면 보험료가 높아지는 구조다.
업계에서는 보험료가 월 단위가 아니라 '행동 단위'로 조정되는 시대까지 거론한다.
자동차보험 역시 급가속·급제동·야간운전·주행거리 등을 실시간 반영하는 운전습관연계보험(UBI)이 이미 확대되는 흐름이다. 여기에 AI 분석이 결합되면 사실상 개인별 위험도를 상시 재산정하는 구조로 이동할 가능성이 있다는 설명이다.
실제 보험업계에서는 AI 기반 보험료 산정 시스템 도입도 본격화되고 있다. 코리안리는 올해 AI 기반 요율산정 어시스턴트 도입에 나섰다.
글로벌 시장에서는 보험사와 빅테크, 병원, 웨어러블 기업 간 데이터 주도권 경쟁도 빨라지고 있다. 애플과 삼성전자, 구글, 핏비트, 오우라(Oura) 등은 이미 건강 데이터 기반 AI 서비스 경쟁에 들어간 상태다.
다만 이런 변화가 새로운 차별 구조를 만들 수 있다는 우려도 동시에 커지고 있다.
건강 데이터가 많고 관리가 잘 되는 사람일수록 보험료 혜택을 받는 구조가 강화될 경우 고령층과 유병력자, 디지털 취약계층은 구조적으로 불리해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업계 안팎에서는 결국 '건강한 사람은 더 싸게, 아픈 사람은 더 비싸게'라는 초개인화 보험 체계가 새로운 사회적 논란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주목하고 있다.
AI 기반 보험 시스템이 확대될수록 개인정보와 감시 문제 역시 핵심 쟁점이 될 전망이다. 실제 AI 보험에 대한 소비자 신뢰와 개인정보 우려가 중요한 변수라는 분석도 나온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보험이 AI·데이터·플랫폼 기술과 결합할수록 결국 인간 몸과 행동 자체를 가격화하는 산업으로 진화할 가능성이 크다"며 "보험사의 미래 경쟁력은 상품 설계보다 얼마나 많은 인간 행동 데이터를 오래 축적하고 예측할 수 있느냐에 달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연호 기자 / 경제를 읽는 맑은 창 - 비즈니스플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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