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 주 = 한국국제교류재단(KF)의 2024년 발표에 따르면 세계 한류 팬은 약 2억2천500만명에 육박한다고 합니다. 또한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해 지구 반대편과 동시에 소통하는 '디지털 실크로드' 시대도 열리고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 4.0'의 시대입니다. 연합뉴스 동포·다문화부 K컬처팀은 독자 여러분께 새로운 시선으로 한국 문화를 바라보는 데 도움이 되고자 전문가 칼럼 시리즈를 준비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게재합니다.]
애주가의 삶은 늘 모순과 타협의 연속이다. 밤새 '부어라 마셔라' 간을 괴롭히고는, 다음 날 아침이면 어김없이 뜨끈한 해장 국물 앞에서 뼈저린 반성을 한다. 그리고 이 뫼비우스의 띠 같은 일상에서 한국인에게 가장 완벽한 구원자는 단연코 '콩나물'이다.
콩나물 잔뿌리에 풍부하게 함유된 아스파라긴산이 알코올 분해를 돕는다는 것은 이제 전 국민의 상식이다. 그런데 만약, 이 해장의 마스터키인 콩나물이 아예 술의 재료로 들어간다면 어떨까? 우리가 흔히 '콩나물국밥집 술'로 부르는 달짝지근한 '모주'(母酒) 이야기가 아니다. 진짜 발효 탱크 안에 콩나물을 넣어 빚어낸, 이름조차 생소한 '콩나물 막걸리'가 실제로 우리 곁에 존재한다.
사실 우리 조상이 콩나물을 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역사는 꽤 깊다. 전통 한의학에서는 콩나물을 말린 것을 '대두황권'(大豆黃卷)이라 부르며 몸의 열을 내리고 독소를 배출하는 귀한 약재로 쳤다. 옛 문헌을 살펴보면 이 대두황권을 독한 소주에 담가 성분을 우려내어 소량씩 마시는 약술(담금주) 형태의 기록이 존재한다. 이는 어디까지나 알코올의 부산물을 배설시키고 숙취를 다스리기 위한 철저한 약용 목적이었다.
하지만 최근 충북 진천의 한 양조장에서 시도한 방식은 눈길이 갔다. 생콩나물이나 그 추출물을 쌀, 누룩, 녹두와 함께 아예 발효조에 넣고 미생물 발효를 거쳐 탁주(막걸리)로 빚어낸 것이다. 이는 전통 문헌의 공식에도 없는, 독창적이고 현대적인 실험이다. 약 성분을 우려내는 담금주를 넘어, 콩나물 자체가 발효의 주체가 돼 술의 풍미를 결정하는 주원료로 참여했다는 점에서 'K-리큐르'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콩나물을 이토록 영리하게 술로 진화시킬 수 있는 나라는 사실상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중국이나 일본 등 이웃 나라들이 부드러운 숙주(녹두나물)를 주로 먹는 것과 달리, 대두(메주콩)의 싹을 틔워 아삭한 콩나물로 길러 먹는 문화는 우리만의 고유한 식습관이다. 전 세계에서 콩나물을 주식처럼 즐기는 유일한 민족이기에, 해장의 상징을 술의 원료로 뒤바꾸는 이 기발한 발상도 가능했을 것이다.
필자의 관점으로는 진천 잣나무골술도가의 '337녹두와콩나물 생막걸리'는 이 발상의 전환을 맛으로 증명했다. 콩나물과 함께 투입된 녹두는 예로부터 '백 가지 독을 푼다'고 알려진 해독의 명약이다. 과거 궁중의 고급술 '향온주'의 누룩에 녹두를 섞었던 선조의 지혜가 21세기 콩나물 막걸리에서 재현된 셈이다.
맛의 결 또한 예사롭지 않다. 콩나물을 넣었다고 해서 비리거나 튀는 맛이 날 것이라는 우려도 있었지만 기우였다. 발효 과정에서 녹두와 콩나물은 효모와 어우러지며 목 넘김을 매끄럽게 다듬어 놓는다. 텁텁함은 덜어내고 청량함은 살린 이 막걸리는 '부드러움이 하늘까지'라는 슬로건처럼 애주가들의 간과 입을 동시에 위로했다.
이러한 맛은 감정적 요소만이 아니었다. 여기에는 흥미로운 발효 공학적 비밀이 숨어있다. 우리가 흔히 막걸리를 마신 뒤 호소하는 두통과 숙취는, 발효 과정에서 효모가 불완전하게 대사하며 만들어내는 미세 불순물인 '퓨젤오일'(Fusel oil)과 과도한 잔당이 주된 원인이다.
그런데 발효조에 투입된 녹두와 콩나물의 아스파라긴산 등 다양한 활성 성분은 미생물의 대사 환경을 변화시킨다. 효모가 알코올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거친 불순물의 생성을 억제하고, 맛의 밸런스를 잡아주는 천연 완충제 역할을 하는 것이다. 콩나물과 녹두는 발효의 최전선에서 스스로 불순물을 덜어내는 정화 작용을 돕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시도는 최근 전통주 시장을 관통하는 거대한 흐름과도 맞닿아 있다. '전통주는 으레 쌀로만 빚는다'는 굳건한 고정관념은 이미 깨진 지 오래다. 최근 K-리큐르 시장은 한반도 각지의 척박한 토양과 기후를 이겨낸 독특한 밭작물들의 경연장으로 변모하고 있다. 고소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땅콩, 은은한 단맛을 품은 팥, 심지어 깊은 흙내음을 간직한 버섯에 이르기까지, 전혀 술의 재료가 될 것 같지 않던 이색적인 지역 특산물들이 과감하게 누룩과 만나고 있다.
서양의 진(Gin)이 주니퍼베리와 각종 허브로 향을 낸다면, 우리의 K-리큐르는 이 땅에서 자고 나란 다채로운 로컬 식재료를 통해 세계 어디에도 없는 한국만의 독보적인 테루아(Terroir)를 병 속에 구현해 내고 있다.
필자 역시 전통주라고 해서 반드시 수백 년 된 비법의 복원에만 매달릴 필요는 없다고 본다. 콩나물 막걸리의 등장은 우리 술이 역동적이고 위트 있게 진화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다. 일상의 친숙한 식재료에 의학적 통찰과 현대적 발효 기술을 결합해 '해장술의 끝판왕'이라는 유쾌한 서사를 만들어낸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K-리큐르의 스토리텔링이다.
엄숙한 제사상이 아니더라도, 시끌벅적한 동네 고깃집에서 "오늘은 콩나물 막걸리로 달려볼까!"라며 부담 없이 잔을 부딪칠 수 있는 친근함. 어쩌면 K-리큐르가 진정으로 세계적인 대중성을 얻기 위해 필요한 것은 거창한 담론보다, 이처럼 일상의 식재료와 유쾌한 상상력을 발효시켜 만든 '재치 있는 한 잔'일지도 모른다.
오늘 밤, 숙취 걱정일랑 잠시 접어두고 녹두와 콩나물이 빚어낸 이 기특한 반란에 동참해 보는 건 어떨까.
신종근 전통주 칼럼니스트
▲ 전시기획자 ▲ 저서 '우리술! 어디까지 마셔봤니?' ▲ '미술과 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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