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광복 작가는 현대 미술계에서 화학도료와 자개를 혼합한 작업들까지 폭넓게 '옻칠화'로 통용되는 흐름 속에서도 오직 천연 옻칠만을 고집하며 작업을 이어왔다. 그는 옻칠 본연의 물성과 깊이를 현대 회화의 언어로 확장하며, 사라져가는 전통 재료의 본질과 정통성을 지켜내는 작업에 집중해왔다. 그의 작업은 단순한 공예적 재현을 넘어, 한국 옻칠 예술의 현대적 가능성을 탐구하는 진정성 있는 예술적 실천으로 평가받는다.
이번 전시의 중심을 이루는 'Family Series'는 칠흑 같은 옻칠의 심연 위에 현대인의 욕망과 가족의 온기를 동시에 투영한 연작이다. 명품 가방을 든 고양이, 밍크코트를 걸친 개 등은 자본주의 시대 속 인간의 욕망과 허영을 의인화한 존재들이다. 팝 슈얼리즘(Pop Surrealism)의 유쾌한 감각을 차용한 화면은 친근한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그 이면에 현대인의 불안과 결핍, 허영과 외로움을 담아낸다.
반면 공사장 헬멧을 쓴 비버, 고무장갑을 낀 채 가족을 위해 기도하는 수달의 모습은 물질로 환산할 수 없는 삶의 본질적 가치를 상징한다. 노동과 희생, 가족과 사랑 같은 감정들이 따뜻한 시선으로 화면 위에 스며들며, 서로 다른 표정과 역할을 가진 동물들은 결국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의 자화상이자 가족의 초상으로 읽힌다. 차가운 욕망과 따뜻한 온기가 한 화면 안에서 교차하며 관람객에게 깊은 공감과 여운을 남긴다.
정광복 작가는 작가노트를 통해 "세상의 온도는 차갑게 변해가도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는 여전히 식지 않는 '가족의 온도'가 존재한다"고 전했다. 이번 전시는 바로 그 인간적 온기의 흔적들을 느리고 깊은 옻칠의 시간 위에 새겨 넣는 과정이기도 하다.
또 다른 주요 연작에서는 한국 전통 창호 구조를 활용해 회화와 오브제의 경계를 허문다. 실제 나무로 제작된 창틀과 문살은 평면 회화를 입체적 공간으로 확장시키며, 현실과 허구 사이의 경계를 섬세하게 흔든다. 숲속 냇가와 잔잔한 호수 위로 퍼져나가는 빗방울의 파동과 수면 위에 번지는 미세한 흔들림은 극사실적으로 묘사되며 깊은 몰입감을 선사한다.
특히 화면 위에 결합된 전통 창호는 단순한 장식이 아닌 관람객과 작품 사이를 이어주는 감성의 통로로 기능한다. 관람객은 마치 한옥의 방 안에 앉아 창밖 풍경을 바라보듯 작품 속 자연을 마주하게 되며, 나뭇결이 살아 있는 창틀 위로 정교하게 쌓아 올린 옻칠의 층위는 시간의 깊이와 한국적 정서를 동시에 환기시킨다.
정광복의 작업은 기술적 측면에서도 독보적이다. 그는 캔버스 위에 옻칠과 토회를 수십 차례 반복해 올리고 다시 사포로 갈아내는 과정을 통해 극사실적 명암과 질감을 구현한다. 이는 단번의 붓질로 화면을 완성하는 서양 유화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건조와 연마를 반복해야만 자연스러운 광택과 깊은 명암을 얻을 수 있는 전통 '마회(磨繪)' 기법의 결과다.
그의 화면에는 단순한 이미지 이상의 시간이 축적된다. 켜켜이 쌓인 옻칠의 층은 노동의 흔적이자 수행의 기록이며, 동시에 한국 장인정신의 깊이를 보여주는 물질적 증거다. 정광복 작가는 기술적 극한인 '기(技)'와 예술적 조형 언어인 '예(藝)'를 결합함으로써, 옻칠 리얼리즘이라는 독자적인 현대 회화 세계를 구축해왔다.
정광복 작가는 "과거의 옻칠이 전통 기물에 머물렀다면 현대의 옻칠화는 시대를 반영하는 순수 예술"이라며 "《오늘의 초상》을 통해 관람객들이 무심코 지나쳤던 삶의 감정과 관계의 의미를 다시 마주하고, 전시장을 나서는 순간 마음속 온도가 조금 더 따뜻해지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한편 이번 '오늘의 초상'전은 전통 공예의 물성과 현대 회화의 감각, 장인정신과 동시대 서사가 교차하는 자리다. 정광복은 오래된 재료인 옻칠을 통해 가장 현재적인 이야기를 풀어내며, 칠흑처럼 깊고 고요한 화면 속에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욕망과 사랑, 고독과 온기를 응축해낸다. 관람객은 그 깊은 검은빛 속에서 결국 자기 자신의 얼굴과 시대의 초상을 마주하게 된다.
Copyright ⓒ 문화저널코리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