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거진(영국)=박은혜 작가] 2026년 4월 18일, 동런던 퀸 엘리자베스 올림픽 공원에 V&A East가 개관했다.
V&A는 빅토리아 앤드 알버트 뮤지엄(Victoria and Albert Museum)의 약자로, 1852년 서런던 사우스켄싱턴에 설립된 영국의 대표적인 미술관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시각문화 전반을 다루며, 디자인·공예·장식미술 분야에서는 세계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약 280만 점 이상의 소장품에는 고대부터 동시대까지의 작품이 포함되어 있으며, 유럽뿐 아니라 아시아·중동·아프리카 컬렉션까지 아우르는 글로벌 기관이기도 하다.
하지만 V&A는 단순히 아름다운 사물을 수집하고 전시하는 공간만은 아니다. 이 기관은 빅토리아 시대의 산업 개선과 공공 교육이라는 이상 속에서 출발했으며, 동시에 제국주의 시대의 정치·경제적 구조와도 깊게 연결되어 있다.
그런 V&A가 새롭게 자리 잡은 곳은 동런던이다.
서런던이 전통과 세련됨, 제도적 권위를 상징한다면, 동런던은 노동과 이주, 디아스포라의 역사와 불균등한 도시 개발이 겹쳐 있는 장소에 가깝다. 그렇기에 V&A East의 개관은 단순한 지리적 확장이 아니다. 오히려 이 새로운 장소 안에서 미술관이 어떤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는지를 다시 묻는 일에 가깝다.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누구를 위한 기관이 될 것인가? 그리고 미술관은 지역 사회에 어떤 책임을 질 수 있는가?
쿠바 출신 현대미술가 타니아 브루게라(Tania Bruguera, 1968~)는 바로 이 질문들에서 이번 커미션 작업을 시작했다.
브루게라는 예술과 정치, 이주와 제도, 권력과 시민성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탐구해 온 작가다. 1980년대 중반부터 활동을 시작한 그는 퍼포먼스와 사회참여적 실천을 중심으로 작업해 왔으며, 쿠바 국립미술관, 파리 퐁피두 센터, 뉴욕 현대미술관(MoMA), 베니스 비엔날레, 광주비엔날레 등 세계 각지에서 실험적인 프로젝트를 선보여 왔다.
이번 V&A East 커미션 역시 단순히 보여지는 작품을 만드는 데서 출발하지 않았다. 브루게라는 건물을 위한 기념비적 오브제를 제작하는 대신, 미술관 자체를 질문의 대상으로 삼았다.
V&A East는 앞으로 어떤 기관이 되어야 하는가? 지역 커뮤니티의 참여는 실제 권한으로 이어질 수 있는가? 미술관은 랜드마크를 넘어 시민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가?
작가는 약 2년이 넘는 시간 동안 동런던의 젊은 커뮤니티 구성원들과 워크숍과 토론을 이어갔다. 그 과정은 단순한 자문 절차가 아니라, 미술관과 지역 사이의 신뢰를 새롭게 구축하는 실험에 가까웠다. 참여자들은 이상과 현실 사이를 오가며 미술관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논의했고, 동시에 제도적 한계가 책임 회피의 이유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이야기했다.
그 대화들은 결국 하나의 목록이 되었고, 다시 하나의 매니페스토가 되었다. 투명성, 옹호, 관대함, 형평성, 책임감, 지속가능성, 협업. 브루게라는 이 가치들이 단순한 기관의 슬로건이 아니라 실제 운영 방식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시민적 미술관은 단순히 공동체를 ‘닮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에 ‘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논의는 결국 하나의 물리적 작업으로 이어졌다. 브루게라는 참여자들과 함께 푸른빛의 스테인드글라스 작품 ‘시민적 미술관을 향하여’(Towards a Civic Museum)(2026)을 제작했고, 이 작업은 현재 V&A East 1층 입구에 영구 설치되어 있다.
어떤 커미션은 특정 공간에서 시작되고, 어떤 작업은 특정 작가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브루게라의 이번 프로젝트는 훨씬 더 거대한 질문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어쩌면 이번 커미션의 가장 중요한 지점은 작품 그 자체보다도, 미술관 내부에 공개적으로 남겨진 질문에 있을지 모른다. 시간이 지나도 기관에 계속해서 책임을 물을 수 있는 구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렇다면 브루게라는 이 질문들을 실제 공간 안에서 어떻게 구현했을까. 다음 글에서는 ‘Towards a Civic Museum’의 구체적인 제작 방식과 시각적 디테일을 함께 살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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