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상완 기자] 낡은 마을회관의 회의는 영웅담보다 장부에서 출발한다. 중세 재현 행사 ‘퀘스트 페스트’를 지켜 온 이사진은 연례 총회에 모였지만, 자리에 남은 안건은 낭만보다 냉정하다. 회원은 줄고 빚은 늘었다. 회관은 버티기 어려운 상태다. 투표가 가까워질수록 회의장은 더 이상 머물 수 없다. 오래된 규칙, 사라지는 행사, 각자 품은 미련이 한 테이블 위에서 흔들린다.
크리스탈 파이트와 조너선 영의 ‘어셈블리 홀’은 해산 직전의 총회를 90분 무용극으로 밀어붙인다. 무대 위 인물들은 회의 절차를 밟는다. 움직이는 힘은 몸에서 나온다. 녹음된 배우의 음성이 빠르게 달린다. 무용수들은 립싱크와 신체 연기로 말의 속도와 감정을 받아낸다. 대사는 입술에 붙고, 망설임은 어깨에 걸린다. 분노는 팔과 등으로 번진다. 회의는 처음엔 질서를 흉내 낸다. 의장은 발언을 정리한다. 참석자는 안건을 따지고, 누군가는 의례의 존속을 주장한다. 하지만 몸은 절차보다 빨리 균열을 말한다. 접이식 의자에 기대는 자세와 테이블 주변을 맴도는 걸음, 갑작스러운 정지와 도약이 인물들의 불안을 드러낸다. 투표를 앞둔 방은 점차 전장에 가까워진다. 낡은 모임의 작은 총회는 사라지는 공동체의 해부도처럼 커진다.
무대는 친목 행사와 지역 회의가 열릴 법한 북미식 커뮤니티 홀이다. 농구 골대, 낮은 천장, 접이식 의자, 닳은 바닥은 현실의 질감을 붙든다. 파이트와 영은 익숙한 회관을 중세 전설의 잔해가 솟는 장소로 바꾼다. 마을 행사의 이름으로 남아 있던 ‘퀘스트’는 놀이가 아니다. 의상과 몸짓, 음향과 조명이 얽혀 회의장은 의식의 장소이자 패배한 영웅담의 폐허가 된다. ‘어셈블리 홀’이 흥미로운 지점은 웃음과 불안의 간격이다. 장부를 따지는 사람들, 절차에 매달리는 사람들, 낡은 행사에 자존심을 걸어 둔 사람들의 말은 때로 우스꽝스럽다. 하지만 웃음은 곧 피로를 드러낸다. 누군가의 농담 뒤에는 모임을 잃는 공포가 있다. 규칙에 관한 말다툼 뒤에는 돌아갈 곳이 없다. 작품은 작은 조직의 몰락을 크게 부풀리지 않는다. 오히려 아주 좁은 방에서 사람들이 왜 끝까지 모임을 붙드는지 집요하게 캐묻는다.
파이트의 안무는 말의 표면을 따라가다가도 어느 순간 언어를 밀어낸다. 빠른 대사에 맞춰 세밀하게 움직이던 몸은 갑자기 거대한 파동을 만든다. 느린 기울기와 빠른 회전, 매끄러운 이동과 거친 정지가 교차하며 회의장의 공기를 바꾼다. 손은 발언권을 요구하는 신호가 된다. 등은 오래 숨긴 패배를 말한다. 발끝의 방향마저 인물 관계를 밀고 당긴다. 조너선 영과의 협업은 파이트 무용극의 핵심 장치다. 배우의 목소리는 무대 밖에서 흐르고, 무용수는 자신의 몸에 입힌다. 관객은 말을 듣고, 말이 몸 안에서 어떻게 변형되는지 본다. 음절 하나, 숨소리, 머뭇거림, 빈정거림까지 움직임의 리듬이 된다. 연극의 대사와 무용의 신체가 서로를 설명하지 않고, 서로를 압박한다.
‘베트로펜하이트’와 ‘리바이저’에서 이미 강한 인상을 남겼다. 트라우마와 상실, 관료적 질서와 인간의 왜곡을 다뤘던 두 사람의 작업은 ‘어셈블리 홀’에서 일상적인 장소를 택한다. 거대한 사건 대신 낡은 회관의 총회가 무대 중심에 선다. 작은 조직의 위기가 환상 세계와 충돌한다. 평범해 보이는 회의가 환상으로 기울수록 인간이 왜 이야기와 의례를 필요로 하는지 선명해진다.
제작진의 감각도 작품의 밀도를 키운다. 무대 디자인은 제이 고워 테일러, 의상은 낸시 브라이언트, 조명은 톰 비서가 맡았다. 오웬 벨턴, 알레산드로 줄리아니, 멕 로의 음악·사운드 작업은 회의실의 현실감과 환상의 진동을 나눈다. 영상 디자인은 시벨 영이 담당했다. 소리와 빛, 공간은 인물들의 몸을 따라가며 회관의 붕괴감과 신화적 공기를 번갈아 밀어 올린다.
작품은 2023년 10월 26일 캐나다 밴쿠버 플레이하우스에서 초연됐다. 영국 새들러스 웰스 무대에 오르며 파이트와 영의 언어-신체 실험을 다시 각인시켰다. 지난해 올리비에상 최우수 신작 무용 프로덕션 부문 수상작으로 이름을 남겼다. 한국 관객에게는 오래 미뤄진 만남이다. 키드 피봇의 ‘검찰관’은 2020년 내한 예정이었으나 팬데믹 여파로 취소됐다. 6년 뒤 성사된 서울 공연은 파이트가 자신의 단체를 이끌고 국내 관객과 만나는 첫 무대라는 의미를 갖는다. 로열발레, 파리오페라발레, 네덜란드댄스시어터 등 세계 주요 무용단이 의뢰한 안무가를 직접 확인할 기회다.
‘어셈블리 홀’은 중세를 말하지만 과거극이 아니다. 사라지는 회원, 감당하기 어려운 빚, 유지할 명분을 잃어가는 조직, 그래도 끝까지 모이려는 사람들의 몸이 현재의 극장 안으로 들어온다. 무대는 거대한 답을 내놓지 않는다. 대신 회의가 길어질수록 누가 무엇을 잃고 있는지, 오래된 이야기를 붙드는 몸이 왜 계속 떨리는지 보여준다.
공연은 LG아트센터 LG시그니처홀에서 6월 5일부터 7일까지 열린다.
뉴스컬처 이상완 prizewan2@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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