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상완 기자] 폐쇄와 단절의 시간 속에서 작가의 시선은 외부 현실에서 내면의 시간으로 향했다. 삶을 성찰하고 치유하는 ‘구도적 리얼리즘’이 전면에 등장한다. 1980년대부터 사회적 현실주의를 파고든 작가의 문제의식은 인간 존재, 생명, 평화에 관한 질문으로 확장된다.
작가 이종구는 1980년대 민중미술 운동의 중심에서 농민과 농촌 현실을 집요하게 그렸다. 정부미 쌀부대 위에 농민 초상을 그린 작업은 산업화와 도시화의 그늘에 가려진 공동체의 현실을 시각화한 대표작으로 평가된다. 농촌을 향토적 서정의 대상으로 소비하던 관습을 뒤집었다. 한국 사회 구조 속 소외와 균열을 회화의 현장으로 끌어냈다. 농민의 주름, 거친 손, 무거운 표정은 근대화의 그늘을 온몸으로 통과한 한국 현대사의 표식이었다. 동시대 사회적 사건은 시대 풍경으로 기록됐다. 회화는 증언에 가까웠다. 농민의 얼굴은 사회적 발화의 장면이 됐다.
팬데믹 시기에 겪은 폐쇄와 고립, 죽음에 대한 감각, 정년퇴임이라는 삶의 전환은 시선을 안쪽으로 당겼다. 걷기와 호흡, 사찰 순례에서 얻은 침묵의 경험은 인간 존재와 생명의 문제를 다시 응시하게 만든 계기가 됐다.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에서 마주한 반가사유상은 종교 도상의 범주에 있지 않는 존재의 태도로 읽혔다. 깊은 고요 속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이 작가의 회화로 옮겨졌다.
전시의 핵심에 놓인 ‘몸의 사유’는 관념적 명상에 고정되지 않는다. 병과 노화, 걷기와 호흡 등 신체에 새겨지는 실존의 과정이 화면에 투영된다. 반가사유상의 형상은 물결, 불꽃, 병든 육체, 군중의 이미지와 충돌한다. 고요한 불상은 현실과 분리된 초월적 상징에 갇히지 않는다. 혼란한 세계를 바라보는 사유의 시선으로 작동한다.
작가는 불교의 ‘불이(不二)’ 사상을 회화적 구조로 옮긴다. 불이는 삶과 죽음, 고통과 평화, 인간과 자연을 따로 가르지 않는 태도다. 화면 속 성(聖)과 속(俗), 정신과 육체는 나란히 배치되며 서로의 존재를 밀어낸다기보다 긴장 속에서 공존한다. 숭고한 불상 옆에 병든 신체와 군중을 배치한 방식은 현실의 상처를 외면하지 않는 회화적 선택이다. ‘무무명’, ‘불이’, ‘예토’, ‘항마촉지’ 등 작품은 불교적 개념을 경유한다. 특정 교리의 도해와는 거리가 멀다. 전쟁과 재난, 혐오와 갈등이 산재한 시대의 풍경 위에 불교 개념을 호출하며 인간의 실존 방식을 묻는다. 작가는 구체적 사건을 노골적으로 지시하지 않는다. 대신 시대 불안과 폭력을 은유적으로 남기고, 감정적 과잉을 덜어낸 거리감을 유지한다.
침묵은 회피가 아니다. 이종구의 그림에서 침묵은 오래 바라보게 만드는 장치다. 관객은 반가사유상의 낮은 시선 아래에서 유한한 육체, 사라지는 빛, 어둠 속에 남은 흔적을 마주한다. 작가가 던지는 질문은 선명하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목도하고 있으며, 어떤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가. ‘사유 : 思惟’는 사회적 현실주의 계보에서 출발한 이종구 회화가 인간 존재의 근원적 문제로 이동하는 지점을 보여준다. 초기 작업이 시대적 모순을 고발하는 기록이었다면, 최근 작업은 생명의 근원과 존엄을 향한 질문에 가깝다. 사건의 표면보다 인간이 세계를 감각하고 기억하는 방식에 깊이 다가간다.
작가 이종구는 충청남도 서산 출생으로 중앙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고 인하대학교에서 미술교육전공 석사 학위를 받았다. 중앙대학교 서양화 전공 교수와 인천문화재단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주요 개인전으로 ‘광장_봄이 오다’(2018, 학고재), ‘우현예술상 수상기념전’(2010, 인천아트플랫폼), ‘올해의 작가’(2005, 국립현대미술관) 등이 있다.
주요 단체전에는 ‘기술의 저변: 경계에 선 장면들’(2026년·서울시립미술관), ‘한국미술의 계보 LINEAGES_Korean at The Met’(2024년·메트로폴리탄미술관), ‘광장’(2020년·국립현대미술관), ‘4·3 70주년 동아시아 평화인권: 침묵에서 외침으로’(2018년·제주4·3평화기념관), ‘키워드 한국미술 2017: 광장예술-횃불에서 촛불로’(2017년·제주도립미술관) 등이 있다. 가나미술상, 인천문화재단 우현상, 중앙미술대전 장려상 및 특선을 수상했으며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대전시립미술관, 전북도립미술관, 제주도립미술관 등 주요 공공기관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뉴스컬처 이상완 prizewan2@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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