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한국 사회가 신체적 차이에 대해 성숙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장애인과 희귀질환자, 외모가 사회적 기준에서 벗어난 사람들에 대한 차별과 배제는 여전히 일상적으로 나타나고 있으며, 인터넷과 대중매체에서는 특정 신체를 조롱과 혐오의 대상으로 소비하는 문화가 반복되고 있다.
특히 외모 중심주의와 정상성(normality)에 대한 강박은 신체의 다양성을 인정하기보다 '표준적인 몸'을 기준으로 타인을 평가하게 만들고 있다. 성형과 외모 관리가 일종의 자기 책임처럼 요구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신체적 차이는 쉽게 개인의 결함이나 관리 실패로 간주된다. 이는 근대 이후 형성된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신체 혐오와 배제의 감정이 인간 사회에 처음부터 존재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신체의 기형(malformation physique)이 본격적으로 부정적 의미를 띠게 된 것은 근대 시기에 들어서면서부터였다. 고대의 신화와 숲속의 요정을 믿던 시기에 기형인의 존재가 그다지 심각한 혐오의 대상은 아니었다. 세이렌이나 흡혈귀 같은 '동물과 인간의 혼합체'는 낯선 것이 아니었으며, 거인이나 소인은 이 세상 어딘가에 살고 있는 좀 '특이한' 존재에 불과했다. 인간의 영역이 아닌 '경계'(liminal)의 공간에 이들 '괴물'이 사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문제는 신체의 형태가 다르거나 혹은 기형이라고 평가받은 자들이 인간의 영역에서 쉽게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나타났다. 인쇄술이 확산되고 정보가 지역을 넘어 공유되면서 이들에 대한 소식은 예전보다 더 빈번하게 사람들의 화젯거리가 되었다. 이와 동시에 지금까지는 크게 부각되지 않았던 감정인 '혐오'가 이들에게 투사되었다. 광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미셀 푸코(Michel Foucault)의 말처럼 중세 시대에 광인은 종종 신의 목소리를 듣고 인간에게 이를 전해주는 존재로서의 역할이 있었다. 그러나 정상과 비정상의 분리라는 관념이 커지면서 17세기부터 광기는 통제와 감금의 대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분명 대항해의 시대, 인쇄술의 발달, 과학적 접근을 통한 자연의 이해라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과거 이형 신체가 지니고 있던 신의 계시로서의 상징성은 서서히 약해지기 시작했다. 즉 형(形)에 대한 의미부여보다는 괴물의 발생 원인에 대한 과학적 탐구에 초점이 더 맞추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다만 이러한 괴물 발생의 원인에 대한 높은 관심이 기형에 대한 혐오감까지 약화시킨 것은 아니었다. 기형이 인간 발생 과정에서 나타나는 하나의 생물학적 현상이라고 인식될지라도 여전히 일반 민중들의 심성 속에는 기형에 대한 도덕적 판단이 따라다녔으며, 기형적 신체를 '괴물'로 보는 시각 역시 잔존하였다.
이 글에서는 괴물과 기형에 대한 인식 상의 변화를 16-17세기의 사례들을 통해 살펴보고자 한다. 특히 과학적 원인이 제대로 규명되지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 경이로움의 감정이 점차 약해지고 이질감과 혐오감이 커지게 되었는지, 괴물과 기형인의 사회적 역할은 어떤 양상으로 변화했는지, 더 나아가 근대 사회가 혐오의 대상을 다루는 방식이 지닌 문제점은 무엇이었는지에 대해 논의를 집중해보고자 한다.
1. 전조와 기이함의 뒤섞임
기형아의 탄생은 사람들에게 신의 징벌이 나타날 것이라는 두려움을 주었다. 이미 고대 시대부터 이런 반응은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으며, 중세 시대 역시 기형아의 탄생에 대한 시선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신화의 영역에서는 살 수 있었겠지만 현실에서는 많은 경우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었다. 중세 시대의 몇몇 조각들은 그들이 인간의 영역이 아닌 괴물의 영역에 위치하고 있음을 보여준다.(그림 1)
다만 괴물의 탄생 원인을 개인의 도덕적 타락으로 보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 이유는 부모의 죄가 아니라 신이 자신의 특정한 의도를 실현하기 위해 괴물을 창조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동물들에게서 기형이 태어나기도 했기 때문에 이 모두를 포괄하기 위해서는 인간 사회 전체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이 합리적이었을 것이다.
16세기에 인쇄술의 발달은 기형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켰다. 팸플릿과 브로드사이드(broadside, 큰 종이 한 면만 인쇄해 어떤 사건이나 공지사항을 알리던 신문 형태의 매체)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주는 훌륭한 매체였다. 그러나 내용에는 수많은 오류가 있었다. 예를 들어 1921년 에우겐 홀뢴더(Eugen Holländer)가 정리한 1547년의 팸플릿은 루뱅(Louvain)의 결합 쌍둥이를 보여준다. 이 쌍둥이는 하나의 머리에 4개의 팔과 4개의 다리가 있었는데 실제는 4시간 만에 사망했다고 한다. 신체의 기형을 강조하기 위해 아이는 다리와 팔을 벌리고 있다. 문제는 아이의 생식기가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이러한 결합 쌍둥이는 일란성 쌍둥이와 마찬가지로 항상 동성으로 태어나는데 이 쌍둥이는 남자와 여자로 구분되고 있다. 아이들의 아버지는 이 아이들을 뉘른베르크에 팔면서도 심장은 팔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부성애를 드러냈다고 한다. 팸플릿에는 신이 인간의 죄를 징벌하기 위해 이들을 보냈다는 시구가 적혀 있다.(그림 2)
기형아의 출생을 신의 징벌로 해석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지만 다른 정치적 의도에서 긍정적으로 해석한 경우도 있었다. 1495년 9월 10일 보름스(Worms) 근교에서 태어나 10살까지 살았다고 전해지는 결합 쌍둥이에 대한 이야기는 이를 잘 보여준다. 이 내용은 제바스티안 뮌스터(Sebastian Münster)의 세계연대기인 코스모그라피(Cosmographia, 1544)에 실려 있다.
1495년 벤젠(Bensen)과 보름스 사이의 작은 마을 비르슈타트(Birstatt)에 사는 어느 여인이 두 아이를 낳았다. 아이들의 머리는 이마가 서로 붙어 있어서 한 아이가 걸어가면 다른 한 아이도 뒤따라가야 했으며, 한 아이가 오른 쪽으로 누우면 다른 한 아이는 왼쪽으로 누워야 했다. 두 아이는 이마가 서로 완전히 붙어버려 각자 혼자서는 앞을 볼 수 없었고 항상 같이 붙어 있어야만 했다. 멘츠(Mentz)에서 만났던 1501년 당시 아이들은 6살이었다. 둘 모두 여자 아이였고, 10살을 넘기지 못했다. 한 명이 다른 한 명보다 먼저 죽었기 때문에 죽은 아이를 떼어야 했는데, 남아 있던 아이의 머리 앞쪽이 비어버려 그 아이도 병들어서 곧 죽고 말았다.
당시의 한 팸플릿에 의하면 독일 황제 막시밀리안 1세(1459-1519)가 이 쌍둥이에게 10굴덴을 주었다고 한다. 제바스티안 브란트(Sebastian Brant)는 1495년의 목판화에서 보름스의 쌍둥이를 행운의 전조라고 표현했다. 그는 막시밀리안 황제의 정치를 지지하면서 이들이 제국의 통일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종교적 차원에서도 사람들은 기형의 이미지를 적극 활용했다. 16세기 초에는 기괴한 출생에 대한 도덕적, 훈계조의 글들이 독일과 영국에서 널리 유포되었다. 마틴 루터는 자신의 생각을 인쇄된 책과 팸플릿을 통해 적극 알렸다. 특히 괴물에 대한 이미지는 개신교도들이 기존의 가톨릭을 비판하는 데 유용했다. 1523년 루터는 수도회의 잘못된 모습을 지적하기 위해 인간과 같은 외모를 지닌 채 뒷다리로 서 있는 '송아지 수도사'의 이미지를 사용했다. 이러한 괴물들은 부패한 수도회의 상징이자 이를 개선하라는 신의 경고였다.(그림 3)
16세기의 기독교인에게 신체 기형은 혼란스럽고 이상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에 대한 해석에는 차이가 존재했다. 즉 누군가에게는 신의 경고,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정치적, 종교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이것이 인간의 영역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했다. 또한 신체 기형과 괴물에 대한 인식은 복잡한 양상을 띠면서 변화하고 있었다. 이제 당대 지식인들의 몇몇 견해를 통해 이를 간략하게 살펴보도록 하자.
2. 괴물 분류의 시작
개신교의 발라드와 원더북은 괴물들을 전쟁과 빈곤과 같은 사회 위기와 연관시킴으로써 인간들이 야기한 무질서가 신의 분노를 유발했음을 암시하고자 했다. 1632년 영국의 신학자 토머스 베드포드(Thomas Bedford)는 한 설교에서 괴물들의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괴물들은 신의 특별한 손재주를 보여준다. 비록 그들은 죽었지만 이 망각의 세상을 향해 신은 말씀하신다. 자궁에서 잉태된 태아의 형상을 만들고 특징을 부여하는 특별한 손을 가진 자가 바로 신 자신이라는 것을." 그가 보기에 괴물은 신께서 자연의 정상적인 진행을 방해하거나 변화시키면서 자신의 섭리를 보여주기 위해 만든 존재였다. 전통적인 은총의 표시가 사라진 상황에서 기형아와 괴물들의 출현은 신의 명령을 따르라는 것을 의미했다. 개신교 학자들은 분명 자연이라는 개념을 도입해 기형인과 괴물을 이해하려했다는 점에서 이전과는 달랐다. 하지만 기형인과 괴물의 발생 원인에 대한 관심보다는 여전히 신학적 차원에서 신의 위대함을 입증하려는 데 더 주안점을 두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16세기 가톨릭의 문헌들은 괴물들을 신의 의지를 나타내는 표시로 받아들이는 데 신중한 자세를 유지했다.
의학적 혹은 자연철학적 관점에서 쓰인 최초의 기형과 괴물에 관한 책은 암브루아즈 파레(Ambroise Paré)의 삽화로 보는 육지와 바다의 괴물들에 대하여(Des Monstres Tant Terrestres que Marines avec leurs Portraits, 1573)이다. 이 책은 같은 원인을 공유하는 괴물들을 함께 묶음으로써 연대기적 서술에서 벗어났다. 파레는 괴물들의 의미보다는 그 발생 원인을 고려하고자 했다. 이것은 분명 이전과는 다른 접근 방법이었다. 그는 괴물의 원인을 신의 영광과 분노뿐 아니라 정액, 자궁 상태, 상상력, 질병, 유전, 사고, 악마, 걸인의 음모 등 13가지로 분류했다.
파레는 괴물들이 자연의 섭리 밖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연에 완전히 반하는"(merveille) 존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러한 구분은 17세기 후반까지 괴물에 대한 학술 연구에서 반복해서 나타났다. 분류를 보면 기형과 괴물의 원인으로 그가 대부분 '자연'을 지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괴물과 경이로움을 구분하려고 노력한다. 파레가 묘사한 괴물들은 자연이 흘러가는 방향 외부에 있는 것들이다. 팔이 하나인 채로 태어난 아이나 머리가 두 개인 사람은 괴물이다. 반면에 경이로운 것들은 "여인이 뱀이나 개를 출산하는 일처럼 완전히 자연에 반해 일어나는 것"이다. 즉 괴물은 비자연적인(unnatural) 것이고, 경이로운 것들은 초자연적인(supernatural) 것이다. 경이로운 것은 그 원인을 알 수 없는 영역이기 때문에 그는 괴물에만 초점을 맞추었다.
파레는 브로드사이드나 대중에게 인기 있는 작품들을 인용하지 않았다. 그는 분명 싸구려 인쇄물과 거리를 두고자 했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그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그의 저서에는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매우 비과학적인 서술과 그림이 들어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세이렌이나 트리톤과 같은 바다괴물들, 눈이 몸통에 4개나 달려있고 다리가 12개인 아프리카 괴물 그림, 개의 다리를 가진 소년을 그의 책에서 볼 수 있다.(그림 4)
그의 연구는 이후 후속 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미셀 드 몽테뉴(Michel de Montaigne)는 1580년 「괴물 아이에 대하여」(Au sujet d'un enfant monstrueux)라는 글에서 기생 쌍둥이를 가진 한 소년을 묘사했다. 그는 이 괴물을 신의 경고로서가 아니라, 복잡한 창조 질서의 일부라고 해석했다. 몽테뉴는 괴물은 희귀하기 때문에 관심을 받는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괴물들을 더 큰 사물 체계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이런 생각은 분명 기형과 괴물을 과학의 영역으로 점차 진입시키는 데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몽테뉴는 기이한 사람들이 상상력과 비이성적인 방식을 통해 만들어지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이런 방식으로 기형인을 규정하는 사람들이 더 괴물같다고 지적했다. 그는 신체가 기형인 사람들을 '자연'의 한 가능성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들을 어떤 도덕적 판단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가톨릭 의사였던 포르투니오 리체티(Fortunio Liceti)는 1616년 파도바에서 출판한 괴물에 대하여(De Monstrorum)에서 "인간들에게 임박한 파국을 경고하기 위해 신이 괴물을 만들었다고 볼 수 없다"고 주장하며, 괴물을 결함이나 무질서의 창조물이라고 간주하는 견해에 반대했다. 오히려 그는 괴물 역시 자연 질서의 한 일부이며, 자연의 법칙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다음으로 살펴볼 학자는 예수회 수도사였던 카스파르 쇼트(Kaspar Schott)이다. 그는 1662년에 자연 '마법'에 대한 연구서인 신비의 자연학(Physica Curiosa)을 출판했다. 여기에서 그는 개신교도들의 주장과 달리 신을 관용적인 존재로 보았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신이 모든 괴물의 탄생에 직접 개입한 것은 아니며, '자연' 역시 괴물의 탄생을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즉 괴물들은 자연의 의도대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단지 우연히 발생한 현상에 가까웠다. 쇼트의 괴물들은 너무나 질서 정연했다. 그의 분류에는 알려진 거의 모든 괴물들이 포함되었다. 심지어 사람의 얼굴을 한 날개 달린 켄타우로스, 여우-용-독수리 머리의 괴물, 일곱 개의 머리를 가진 괴물도 여기서는 볼 수 있었다. 이 책은 괴물을 목, 과, 속으로 분류했던 이시도르 조프루아 생틸레르(Isidore Geoffroy Saint-Hilaire, 1805-1861)의 기형학 논고(Traité de Tératologie)가 출간되기 전까지 기형인을 가장 상세하게 분류한 학술서였다.
3. 17세기의 기형인 쇼: 콜로레도 형제
17세기는 기형학의 관점에서 보면 과도기적 시대였다. 여전히 신의 경고로서 기형의 신체를 보는 사람들이 존재했지만 그런 관점은 학자들의 과학적인 분류 연구를 통해 점차 약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기형인과 괴물들에 대한 인식이 개선되거나 그들에 대한 혐오감이 이런 학문 연구를 통해 사라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그들은 17세기에 들어 더욱 더 주목을 받았다. 사회는 이들을 전시와 공연을 위한 구경거리와 호기심의 대상으로 만들어나갔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콜로레도 형제의 이야기이다.
1617년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라자루스(Lazarus Colloredo)가 태어났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쌍둥이였던 라자루스와 밥티스타(Joannes Baptista Colloredo)가 구경거리와 혼란, 매혹과 공포의 대상이 되기 위해 이 땅에 던져졌다. 그들은 독립된 개체로서의 쌍둥이가 아니었다. 밥티스타는 라자루스의 가슴에서 측면으로 튀어나온 쌍둥이 동생이었다. 밥티스타의 몸 일부는 라자루스의 내부에, 일부는 외부 세계에 걸쳐 있었다. '기생 쌍둥이'로 여겨지는 이들은 17세기 의학 저널과 신문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비록 유아기에 개별적으로 세례를 받았지만 쌍둥이의 이러한 결합은 영혼, 생명, 신체에 대한 여러 가지 질문을 제기했다. 그들은 유럽을 순회공연하며 자신들의 존재를 알렸다. 라자루스의 뛰어난 읽고 쓰는 능력과 공연 쇼맨십 그리고 쌍둥이들의 좋은 건강 상태 덕분에 그들의 공연은 대성황을 이루었다.
콜로레도 쌍둥이는 기괴함과 인간성이라는 이중적 의미가 얽혀 있는 존재였다. 라자루스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지니고 있었으며 상당 기간 평범한 삶을 살았다. 그는 17세기 중반에 결혼해 두 명의 건강한 아이를 둔 아버지였으며, 적어도 1647년까지 이어진 그의 유럽 투어 기간에 적극적으로 자신의 쇼를 기획하고 광고했다. 반면에 쌍둥이 형제인 밥티스타는 공개적으로 라자루스의 몸의 부속물로 취급되었다.
라자루스는 곱슬머리를 하고 있고, 단정하게 빗었으며, 말쑥하게 다듬어진 턱수염을 하고 있다. 그는 어깨에 구슬이 박혀 있는 화려한 망토를 걸친 채 똑바로 서 있으며, 관객들을 바라보고 있다. 밥티스타는 이 망토의 주름 아래에서 나타난다. 그의 신체는 불안한 자세로 라자루스의 몸에 붙어 있다. 눈은 감겨있고 표정은 공허하다. 텍스트와 이미지는 지성과 무감각, 잘 차려입은 사람과 벌거벗은 사람, 수용가능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그리고 산 사람과 죽은 사람 등 하나의 몸에 붙어 있는 대조적인 두 힘을 함께 보여준다.(그림 5)
라자루스는 관객들의 욕망을 인정해주고 받아주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존경의 대상이 되었던 것과 대조적으로 밥티스타는 관객들의 조롱과 혐오, 매혹의 대상이 되었다. 사람들은 밥티스타의 신체를 잔인하게 다루었다. 라자루스의 몸에 부착되어 있던 밥티스타의 몸은 고통을 당해야했다. 불확실한 대상에 대한 거부와 증오가 여기서 확인된다.
콜로레도 형제의 이야기는 인간(human)이 어떻게 기괴한 대상(object)으로 만들어지는가를 잘 보여준다. 당시에 비정상적인 몸을 가진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는 분명히 달랐다. 종종 기형이나 불구인 사람을 묘사하는 텍스트는 이런 사람들을 단순히 '그것'(it) 또는 '괴물'이라고 표기했다. 즉 스스로를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통해 이들은 인격도 정체성도 없는 신체로 물화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관객의 감정을 사로잡기 위해서는 이 사물들이 어떤 식으로든 '인간적'인 것으로 보여야 했다. 완전히 비인간적인 사물이나 괴물로 여겨져서는 안 되는 것었이다.
콜로레도 형제에 관해 제기된 문제 가운데 가장 주목을 받았던 것은 그들이 두 영혼을 가졌는지의 여부였다. 이 문제는 육체의 죽음과 영혼의 불멸에 대한 기독교적 사고와 관련이 있다. 당시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에 따르면 죽음의 순간에 영혼은 육체를 떠나며 육체는 서서히 썩기 시작한다. 하지만 육체를 떠난 영혼은 비물질적인 형태로 다시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밥티스타와 같이 특이하고 불완전한 신체도 영혼의 주인 노릇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혼을 가지려면 그의 형이 가지고 있는 '이성과 이해력'을 통해 완전한 인간이 되어야 했다. 만약 그가 라자루스의 영혼과 분리된 자신만의 영혼을 가지게 된다면 이제 더 이상 그는 기생자가 아니게 된다.
그러나 영혼에 대한 이러한 질문들은 쌍둥이를 보던 관객들의 고민이 될 수 있을지언정 라자루스에게는 시급한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라자루스는 밥티스타가 죽으면 자신 또한 육체가 썩어 소멸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 쪽이 죽으면 곧 이어 다른 쪽이 죽는다는 것은 실제로 대부분의 결합 쌍둥이에게서 빈번하게 발생했던 일이었다. 결국 영혼의 문제가 공연을 보러온 관객들의 문제였다면, 신체의 문제는 라자루스의 생존과 관련된 문제였다.
이들 형제의 생존과 관련된 또 다른 흥미로운 질문이 있다. 만약 결합 쌍둥이 가운데 한 쪽이 범죄를 저질렀을 때 이에 대한 법적 처리는 어떻게 행해져야 하는가? 다행스럽게도 이에 대해서는 당시 사회가 답을 제공하고 있다. 왜냐하면 라자루스가 프랑스에서 살인을 저질렀다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이다. 당시 라자루스는 자신이 어떤 사람의 머리를 가격해서 죽인 적이 있었지만, 자신이 죽으면 무고한 동생도 함께 죽게 된다고 말해 사형을 면했다고 말했다.
사실 위의 에피소드는 콜로레도 형제를 바라보던 당시의 사회 분위기에서 볼 때 충분히 설득력이 있다. 왜냐하면 라자루스가 자신의 '부드러운 자궁'으로 동생을 키운다는 말을 브로드사이드에서 종종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 파리에서 몇몇 의사들은 콜로레도 형제를 '두 겹의' 신체라고 주장했는데, 이는 밥티스타가 라자루스로부터 영양을 받는 관을 탯줄과 같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다른 문헌에서는 라자루스를 "분만 도중에 있는 어머니의 모습"에 비유하고 있으며, 불과 몇 년 후 또 다른 문헌에서는 라자루스가 "부드러운 자궁에서 밥티스타를 낳아 양육하고 있다"고 묘사했다. 나중에 이러한 비유는 시인 존 클리블랜드(John Cleveland)가 다시 사용했는데, 그는 라자루스를 "형제를 임신한 이탈리아 괴물"이라고 명명했다. 이렇게 라자루스는 밥티스타의 어머니로서 동생에게 영양을 공급하고, 엄마처럼 동생을 세상으로부터 보호해야 했다.
4. 해부와 전시의 세계
이러한 '기괴한 쇼'는 이후 18세기를 거쳐 20세기 초까지도 이어졌다. 동시에 다른 한 편에서는 기형인을 의학적 연구의 대상으로 바라보려는 움직임 역시 강화되었다. 이는 의학적 해부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해부는 공연의 또 다른 형태였다. 기형인의 신체 내부를 보여주고 그 속에서 질서를 찾으려는 해부학은 신의 놀라운 능력을 보여줄 수 있는 학문이었다.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Académie des Sciences)는 17세기 말 기형인을 다루는 태도에서 이런 해부학의 정점을 보여주었다. 과학 아카데미는 파리에 거주하는 20명의 과학자들을 선발했고 이들은 파리 대학교와 자연사 박물관의 저명한 교수들이었다. 그들은 단순히 기형을 항목별로 분류하던 것에서 벗어나 비교 해부학과 배아학의 확립된 분야에서 괴물에 접근했다.
비록 한계는 있었지만 기형아와 괴물들에 대한 의학적 접근을 통해 이제 경이롭고, 종교적이고, 약간 불길한 것들이 결합한 기형인에 대한 매력은 점차 사라졌다. 이들이 천상의 환영, 화산 폭발, 피가 섞인 비와 같은 다른 자연 이상 징후와 연결되어 있다는 가정도 힘을 잃었다. 18세기 말경이 되면 기형인이 지녔던 경이로움은 거의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18세기 영국 전역에서는 해부학자들과 큐레이터들이 특이한 신체를 가진 사람들의 유해를 모으는 데 관심을 보이면서, 무덤 도굴에 대한 우려가 널리 퍼졌다. 가장 유명한 사례 중 하나는 키가 2미터 30센티미터를 넘었던 거인 찰스 번(Charles Bryne, 1761-1783년)에 대한 이야기이다. 번의 신체에 대해 흥미를 지녔던 외과의사 존 헌터(John Hunter)는 번의 쇼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헌터는 자신의 개인 박물관을 위해 희귀한 '표본'(specimens)을 수집하고 있던 사람이었기에 번은 사악한 그를 보며 공포를 느꼈다. 번은 자신의 신체가 헌터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생의 마지막 시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얼마 후 의문스러운 죽음을 당한 번은 결국 전시물이 되고 말았다.(그림 6)
실제로 번은 신중한 계획을 세워 자신의 몸을 보호하려고 했지만 사후에 헌터는 그의 신체를 찾아냈다. 헌터는 시체를 발견한 후, 몇 분 안에 그의 유해를 조각조각 잘라내고 큰 통에 넣어 푹 삶은 후 뼈에서 살을 발라냈다. 번의 뼈와 그를 삶았던 통은 한 동안 런던의 왕립 외과 대학에서 볼 수 있었다. 이 사건은 기형 신체를 사물로 여겼던 당시의 심성을 잘 드러낸다. 결합 쌍둥이였던 콜로레도 형제의 공연과 큰 차이는 없었다. 기형의 신체를 물화시킴으로서 불안을 잠재우며, 더 나아가 이를 통해 신체의 정상성이 가지는 우월감을 강조하려는 의도는 많은 전시 속에 내포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번의 신체 옆에 키가 아주 작은 신체를 함께 두어 비교하게 했다는 점은 이러한 전시가 가진 의도를 명백히 보여준다.
5. 신체에 가해지는 과도한 폭력
17세기 이후 기형인들의 전시와 공연은 유럽 전역에서 점점 더 인기 있는 오락의 형태가 되었다. 동시에 '호기심의 방'(cabinets of curiosities)과 자연사 박물관에는 기형의 신체들이 전시되었다. 이제 기형에 대한 거부감과 혐오는 더욱 커졌으며, 그것은 안전한 자리에 놓여 사회의 통제를 받아야 하는 대상이 되었다. 신의 경고나 자연의 실수가 아닌 인간의 손을 거쳐 장식되고 통제되고, 더 나아가 희화화될 때에만 의미를 지니는 존재가 된 것이다.
'기괴한 쇼'는 극단적인 우열과 대조를 반영하는 행사였다. 학자들이 이들을 해부하고 분류하려는 시도 역시 같은 이유였다. 학문의 체계 속에 이들을 배치한다는 것은 더 이상 그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였다. 그렇게 그들은 사회 내로 편입되었지만 역으로 이것은 또 다른 배제이기도 했다.
생명윤리학자이자 문헌학자인 로즈마리 갈랜드톰슨(Rosemarie Garland-Thomson)은 17세기 후반부터 '괴물 문화'가 기형의 신체에 달려들어 그것을 윤색, 강화함으로써 관객들의 탄성을 자아내는 문화 의례가 되었다고 말했다. 즉 기이한 존재들이 구경거리가 됨으로서 사회에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구경거리가 되기 위해서는 그로테스크하고, 기괴하고, 불쾌한 요소를 지녀야만 했다. 다른 한편 기형적 신체에 대한 관찰과 분류 그리고 시각적 정리 작업은 기형을 만들고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부분이었다. 기형인은 이렇게 기형화되었다.
지금도 이런 생각은 여전히 남아있다. 1995년에 만들어져 투어를 하고 있는 <신체의 세계>(Bodyworlds) 전시는 이를 잘 보여준다. 이 전시회는 실리콘과 폴리에스테르로 만들어진 인간 유해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인체의 해부학과 생리학에 관심을 불러일으킨다는 명분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 전시는 "세계를 떠도는 가죽 벗기기 전시 카니발" 혹은 "시체들의 카바레"에 다름 아니다. 전시에서 볼 수 있는 인체 모양의 전시물은 정상적 신체의 표준을 보여주고 있지만 실제로는 그로테스크하며 거부감을 일으킨다. 또한 정상적 신체라는 기준 역시 장애나 기형에 대한 근대 초기의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의 소지가 있다.
'기형'은 정상의 범주에서 이탈했다는 전제 하에서 만들어진 개념이다. 비정상적인 신체를 가진 사람들은 계속해서 정상적인 신체를 공고히 하기 위한 사례로서 이용되었고, 그 속에서 인간이 아닌 물화를 강요당했다. 그러나 과연 무엇이 정상적인 신체이며, 그것은 누가 정하는 것인가? 나아가 소위 정상적 신체를 가졌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신체를 분류하고, 평가하는 양상은 여전히 진행되고 있지 않은가? 누군가는 키 때문에 루저가 되고, 누군가는 뚱뚱하다는 이유로 놀림을 당한다. 신체에 대해 가해지는 과도한 폭력은 비단 이 글에서 다룬 근대 시기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은 필자가 2021년에 <서양사론> 154호에 게재한 논문 '근대적 괴물과 기형인의 탄생'을 수정한 것입니다. 참고문헌과 각주를 비롯해 더 상세한 내용은 해당 논문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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