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호 LB인베스트먼트 대표. [사진=LB인베스트먼트]
경력 35년차의 베테랑이자 LB인베스트먼트를 이끄는 박기호 대표는 여전히 일주일에 수차례 스타트업 대표들과 만나 조찬을 나누고 홀로 해외 벤처캐피탈(VC)을 방문해 글로벌 트렌드를 흡수하는 대표적인 현장형 최고경영자(CEO)다. 2년 연속 8개사 상장이라는 대기록을 눈앞에 둔 박 대표를 만나 현 벤처 생태계의 진단과 투자 철학을 일문일답으로 풀었다.
-35년차 베테랑인데도 여전히 현장을 직접 발로 뛰고 계신데.
"해외 글로벌 트렌드를 보면 직급이 높아지고 나이가 들수록 더 많은 경험과 전문성을 바탕으로 가이던스를 주고 전략을 짠다. VC는 위에서 의사결정만 내리는 주니어 비즈니스가 아니라 축적된 내공으로 결과를 증명하는 시니어 비즈니스이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교수님들, 업체 대표들을 직접 만나 얘기를 많이 들을 때 훨씬 더 정확한 정보와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다.
평생을 투자 업무를 해왔고 현장을 지킬 때 비로소 진짜 정보가 쌓인다고 믿는다. 카이스트 겸임교수나 소부장 기업 관련 비상근 직책을 맡아 활동하는 것도 모두 현장과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서다."
-최근 후배 심사역들이나 시장에 가장 강조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답은 늘 현장에 있다는 점, 그리고 차원 다른 깊이로 파고들라는 점이다. 세미나에 가면 후배들이 종종 질문을 한다. '5명이 검토하는데 4명이 아니라고 할 때, 본인만 맞다는 생각이 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똑같이 100m를 파보고 생각이 다르면 본인이 틀린 것일 수 있지만 남들이 100m 파고 포기할 때 혼자 500m를 더 깊게 파고 들어가서 얻은 확신이라면 본인이 맞는 거라고 답한다. 얼마나 그 길을 깊게 파고들었느냐가 투자의 소신을 결정한다. 남들이 좋다고 줄 서서 쫓아가는 백화점 문 열기식 '오픈런 투자'는 결국 망가지는 법이다."
-하이브나 노타 같은 굵직한 성공 신화들도 그런 소신에서 비롯된 결과인가.
"그렇다. 하이브의 경우 방시혁 의장이 음악 프로듀서(PD)로서 검증됐을 뿐 아니라 음악을 '산업'으로 이해하는 남다른 역량이 있다고 판단해 초기 투자를 했다. 하지만 이후 2차 투자 시절에는 회사가 정말 어려웠다. 다들 외면할 때 LB인베스트먼트는 해외 진출 가능성을 보고 끝까지 믿으면서 지속해서 투자를 이어갔고 결국 (하이브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아이콘이 됐다.
인공지능(AI) 반도체 기업 노타 역시 세 번에 걸쳐 107(37억원, 30억원, 40억원)억원을 지속 투자해 상장 시 10% 지분을 유지했고 약 1조2000억원의 몸값을 기록하면서 큰 성과를 냈다. 핵심 역량이 있는 기업이라면 일시적인 버블이나 하락장에 흔들리지 않고 시간을 두고 2차, 3차 투자를 지속하며 견뎌내도록 돕는 것이 LB인베스트먼트의 철학이다."
-LB인베스트먼트는 투자와 상장 후 매각 조직을 완전히 분리해 운영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투자 업계의 오랜 격언 중 하나가 '주식과 사랑에 빠지지 말라'는 것이다. 초기 투자 단계부터 발굴해 상장까지 기업을 이끌어온 심사역은 해당 기업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감사의 마음을 갖고 있다. 그러다 보니 유통시장의 냉정하고 시시각각 변하는 유동성이나 주가 변동성에 다소 둔감해지거나 이성적인 매각 타이밍을 놓치기 쉽다.
그래서 우리는 기업이 상장하는 순간, 회수 및 매각 권한을 '경영전략본부'로 완전히 이관한다. 주식 유통시장의 메커니즘을 가장 잘 아는 전문가들이 독립적이고 상식적인 판단에 따라 펀드 회수 계획에 맞춰 매각을 주도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비상장 영역을 발굴하고 키워내는 것은 심사역의 영역이지만 유통시장에서 주가가 오르내리는 영역은 그 분야를 가장 잘하는 조직에 맡기는 것이 합리적이고 철저한 리스크 관리 기법이기 때문이다."
-심사역 구성을 보면 100% 산업계 베테랑 출신이다.
"VC는 단순히 재무제표만 보는 직업이 아니다. 산업의 생리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삼성전자 출신의 카이스트 박사, 현대자동차 출신, 제약바이오사 출신, 게임사 출신 등을 영입했다. 심사역은 딥테크, 콘텐츠·서비스, 바이오·헬스케어, 글로벌 등 4대 전문 섹터에 각각 집중한다."
-정부가 모험자본 역할을 강조하면서 지난 22일부터 일반 국민 대상 국민참여형 국민성장펀드 판매를 시작했다. 현장에서 느끼는 정책적 시의성은 어떠한가.
"정부가 메가 펀드를 통해 미래 성장 산업을 정하고 집중적으로 밀어주는 방향성은 대단히 시의적절하고 스마트하다고 본다. 현재 미국 시가총액 10대 기업 중 전통 기업은 월마트 1개뿐이고 나머지 9개는 모두 혁신 기술 기업이다. 우리나라도 차세대 혁신 기업을 키워내야만 한다. 정부가 재정과 함께 초기에 마켓플레이스 역할을 해주고 기술 기업들이 스케일업 단계에서 마주하는 '죽음의 계곡'을 넘도록 공급망을 지원해주는 정책은 시장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본다."
-올해 벤처투자 시장의 최대 대어로 꼽히는 무신사도 상장 준비 중이다. 투자자로서 바라보는 무신사의 가치는 어느 정도인지.
"무신사는 자체 PB 제품인 무신사 스탠다드와 압도적인 패션 마켓플레이스 역량 그리고 오프라인 시스템까지 완벽하게 장악한 독보적인 플랫폼이다. 특히 최근 K-컬처와 한국 패션 제품에 대한 글로벌 선호도가 급상승하는 타이밍에 맞춰 해외 진출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기 때문에 시장에서 최고의 평가를 받기를 기대하고 있고 또 충분히 그럴 역량이 있는 회사다."
-현재 투자 시장을 주도하는 AI 섹터의 흐름은 어떻게 진단하나.
"현재의 AI 흐름을 닷컴 버블이나 모바일 혁명 시기와 비교했을 때 최소 3배에서 5배 이상 강한 메가 트렌드라고 보고 있다. 이제 막 3년 반이 지난 극초기 단계다. 지금까지는 데이터센터나 PC 안의 소프트웨어 영역에 머물렀다면 앞으로는 로봇이나 제조 공정 등 물리적 영역인 피지컬 AI로 본격적으로 터져 나올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어떤 AI 기업들이 최종적으로 시장에서 살아남을지.
"세 가지가 모여야 한다. 강력하고 차별화된 빅데이터, 이를 정제하고 인사이트를 읽어낼 수 있는 도메인 지식, 그리고 철저한 AI 기술력이다. 정제되지 않은 일반 데이터는 쓰레기에 가깝다. 막강한 의료 데이터를 메디컬 인사이트로 튜닝해 내는 회사, 탄탄한 제조 현장 데이터를 바탕으로 공정을 이해하는 회사처럼 특정 전문 분야를 장악하는 '버티컬 AI' 기업들이 향후 글로벌 시장을 지배할 것이다."
-처음 이 업계에 입문했을 때는 어땠나.
"인터넷도 없던 시대였다. 벤처캐피탈이라는 개념에 매료돼 도서관에 있는 관련 서적이란 서적은 다 찾아서 복사기 앞에서 한 장당 돈을 내며 복사해 밤새워 읽었다. 미국에 벤처캐피탈리스트가 500명도 안 되던 시절이었다. 문과 출신으로서 기술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대기업 IT 부서로 옮겨 통신 시스템 분야에서 5년간 밤낮없이 바닥부터 구르며 기술을 배웠다. 이후 1999년 돌아와 스틱인베스트먼트 초기를 거쳐 2003년 LB인베스트먼트에 파트너로 합류해 24년째 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
-앞으로 남은 커리어 동안 VC 리더로서 꼭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다면.
"LB인베스트먼트는 지난해 8개사를 상장시켰고 올해도 무신사를 포함해 8개사의 상장을 위해 조율 중이다. 2년 만에 전체 포트폴리오의 13%를 상장시키는 셈인데 성과가 좋은 만큼 책임감도 무겁다. 투자의 결과는 결국 시간이 지나 펀드를 청산하고 투자자들에게 현금으로 돌려줄 때 명백하게 증명되기에 늘 겸손해야 한다.
미국은 펀드 운용 기간이 기본 10년에 연장 2년을 더해 12년인데 반해 한국은 7~8년에 연장 2년으로 총 9~10년 수준이라 훨씬 짧은 시간 안에 승부를 봐야 하는 터프한 환경이다. 자산 가치(NAV)와 실제 분배율(DPI)의 밸런스를 정교하게 설계해야 한다. 평생 현장에서 겪은 수많은 성공과 아픈 실패의 경험들을 후배 심사역들과 스타트업들에 지속해서 나눠주고 싶다. 건강한 선순환 생태계를 만드는 데 기여하는 선배로 남는 것이 마지막 소임이다."
Copyright ⓒ 아주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