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에게는 직함도 없었고, 그녀를 위해 내려진 깃발도 없었다. 그러나 인도전역에서 사람들이 그 이름을 기억 한다" - 크리슈나 메논(1897~1974), 인도초대 영국주재 고등판무관
"쓸모없는" 여자가 역사를 만들다
영국 정보당국은 그녀를 이렇게 평가했다.
"감상적이고, 선의는 있으며, 해롭지는 않은 인물."
이보다 더 틀린 평가가 역사에 있었던가. 아가사 메리 해리슨(Agatha Mary Harrison, 1885~1954). 그녀는 영국 버크셔 주 샌드허스트에서 감리교 목사의 딸로 태어났다. 대학은 가지 못했다. 아버지가 1898년 세상을 떠나자 학비면제 조건으로 켄트 칼리지(켄트 주 폴크스턴 소재)에서 교사보조로 일했다. 겉으로 보면 평범하다 못해 초라한 출발이다.
그러나 이 여자는 "감상적이고 해롭지 않은" 사람이기는커녕, 20세기 전반 가장 거대한 탈식민 운동의 물밑에서 쐐기를 박았고, 제국의 외교문서들이 뒤늦게 실토하듯 역사의 물꼬를 실질적으로 돌렸다.
당시 영국정보국이 그녀를 "해롭지 않다"고 분류한 것은 그녀가 여자였기 때문이다. 감시는 했지만 위협으로 보지 않았다. 1946년 5월에는 아예 인도입국 금지명단에 올렸다. 그러면서도 인도독립협상 핵심현장에는 늘 그녀가 있었다. 참으로 "해롭지 않은" 존재였다.
약자의 편에 서는 것이 직업이 된 삶
해리슨의 이력은 한마디로 "힘없는 사람들 곁에 서는 것"의 연속이었다. 노팅엄의 약국 체인 부츠(Boots)와 헐의 금속상자 공장 데어리코츠(Dairycoates)에서 여성노동자들의 임금을 협상하고 작업환경을 개선하는 일을 했다. 학위도 없이 1917년 영국 런던경제대학(LSE)에 산업복지 강사로 임용됐다. 영국최초의 그 직책이었다.
1921년에는 기독교 여자청년회(YWCA)의 의뢰로 중국에 갔다. 어린이 노동착취를 목격하고, 고용주들을 설득해 이를 멈추게 했다. 협박이 아니라 설득으로. 총독의 훈령이 아니라 인내와 신뢰로. 이후 미국에서도 같은 활동을 이어가다 1928년 귀국해 국제여성평화자유연맹(WILPF)에서 일했다.
그리고 1929년, 인도를 처음 방문했다. 그녀의 나이 44세였다. 그곳에서 그녀는 인도가 독립을 원한다는 사실을 단순한 정치적 주장이 아니라 인간의 존엄이 걸린 문제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삶의 방향이 바뀌었다.
간디와의 만남, 그리고 198통의 편지
1931년, 간디(1869~1948)가 인도의 미래를 논의하는 제2차 원탁회의(런던, 1931년 9월 7일~12월 1일)에 참석하기 위해 영국을 찾았다. 해리슨은 선교사이자 활동가인 찰스 앤드루스(Charles Freer Andrews, 1871~1940)를 도와 간디의 방문을 준비했다. 두 사람이 처음 대면한 순간, 간디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후 간디가 남긴 저작 전집에는 그녀의 이름이 198회 등장한다. 단순한 지지자가 아니라 실질적 동반자였다는 뜻이다. 간디는 1932년 3월 8일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당신이 그곳 벗들의 활동을 상세히 전하지 않아도 됩니다. 나는 여러분 모두가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이 짧은 문장 속에는 신뢰가 있다. 수십 년을 쌓아 올린 신뢰.
해리슨은 이후 인도화해모임(India Conciliation Group)을 공동 창설했다. 인도의 정치적 열망을 영국사회에 알리고, 양쪽의 오해를 걷어내는 중간자 역할을 맡는 단체였다. 1930년대에 그녀는 세 차례에 걸쳐 장기간 인도에 머물렀다. 감옥을 방문했고, 민중집회에 참석했고, 여성 단체들과 함께 일했다.
1939년, 간디가 단식투쟁에 들어갔을 때 해리슨은 중간에서 의사소통 역할을 했다. 몸이 약해진 상태에서도. 간디는 훗날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나를 이해하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다."
독립의 산파, 뒤에서 민 손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영국노동당의 새 정부는 인도독립 협상을 위한 사절단을 꾸렸다. 해리슨과 호레이스 알렉산더(1889~1989)는 그 사절단과 함께 인도로 갔다. 공식 직함 없이. 급여도 없이. 그러나 그들이 없었다면 협상은 달랐을지도 모른다.
해리슨은 직접 이렇게 설명했다.
"우리는 내각장관들을 개인적으로 알았고, 인도지도자들을 만날 수 있었으며, 상호이해를 위한 기회가 생길 때마다 다리를 놓았다."
간디가 영국 측 대표단을 신뢰하도록 설득하는 데 두 사람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것이 역사가들의 일치된 평가다.
1947년 8월 15일, 인도가 독립했다. 해리슨은 공식기록 어디에도 주요인물로 등재되지 않았다. 그러나 크리슈나 메논(1897~1974)이 추도 연설에서 말했듯, "인도 전역에서 사람들이 그 이름을 기억했다."
그녀는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긴 것 같다. 이 사람, 꽤 괜찮다.
마지막 현장, 제네바의 심장마비
1950년, 해리슨은 유엔총회에 퀘이커 참관인으로 참석했다. 모든 나라가 외면하던 중국대표단에게 다가가 말을 건 사람도 그녀였다. 캐슬린 론즈데일(1903~1971)은 이렇게 기록했다.
"그녀만이 유엔 회의장에서 중국 대표들을 에워싼 두터운 적대의 벽을 뚫고 들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1954년 5월, 해리슨은 인도차이나(지금의 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 일대)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제네바회의에 참석하던 중 갑작스러운 심장발작으로 세상을 떠났다. 현장에서. 그 마지막 순간까지 평화를 위한 자리에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일하다 쓰러지는 것을 비극으로 부른다. 그러나 해리슨이라면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할 일이 남아 있었으니 다행이에요."
한국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이제 한반도를 눈을 돌려보자. 지금 한국은 어떤가.
해리슨의 삶을 돌아보며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직함 없는 사람들의 힘"이다. 그녀는 국회의원도, 장관도, 교수도 아니었다. 그러나 영국과 인도사이의 역사를 바꾸는 데 누구보다 깊이 관여했다. 오늘날 한국에서 진짜 변화는 어디서 만들어지고 있는가. 거대정당의 원내대표실인가, 아니면 이름도 없는 활동가들의 회의실인가.
둘째, 해리슨은 "편이 없는 중간자"였다. 그녀는 인도의 독립을 지지했지만, 영국관리들과도 신뢰관계를 유지했다. 한쪽만의 대변인이 아니라 양쪽이 서로를 이해하도록 만드는 사람이었다. 오늘날 한국의 공론장에서 이런 역할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는가. 남북문제든, 세대갈등이든, 노동문제든, 우리는 너무 쉽게 한쪽 편에 서서 반대쪽을 적으로 규정한다.
셋째, 해리슨은 "약자의 편에 서는 것이 직업"인 삶을 선택했다. 이건 구호가 아니라 행동이었다. 그녀가 중국에서 어린이노동을 멈추게 한 것도, 인도의 독립을 도운 것도, 유엔에서 고립된 중국대표단에게 말을 건 것도 모두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 약하고 소외된 쪽에 다가가는 것. 지금 한국사회에서 이주노동자, 비정규직, 소수자들 곁에 진짜로 서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넷째, 그리고 가장 쓴웃음을 짓게 하는 부분. 영국정보당국은 해리슨을 "감상적이고 해롭지 않은 인물"이라고 분류했다. 그 평가가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는 역사가 증명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사회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지 않는가. 권력은 늘 조용히, 끈질기게 일하는 사람들을 "별로 위협적이지 않다"고 무시한다. 그 무시야말로 때로 가장 좋은 보호막이 된다.
깃발이 내려지지 않은 자리
해리슨이 세상을 떠났을 때 어느 나라도 깃발을 내리지 않았다. 그녀의 이름으로 지어진 건물도, 동상도 없다. 그러나 1947년 인도와 파키스탄이 독립의 새벽을 맞이했을 때, 그 물밑에는 수십 년을 지치지 않고 일한 이 영국여자의 손이 있었다.
역사는 늘 무대 위의 배우만 기억한다. 그러나 정작 막을 올리고 내린 것은 무대 뒤의 사람들이었다.
아가사 해리슨. 1885년생, 1954년 사망. 직함 없음. 깃발 없음. 대신 198통의 편지. 그리고 인도라는 나라의 자유.
그녀가 지금 한국에 있었다면, 아마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딘가에서 쪽지 하나를 들고 누군가의 문을 두드리고 있을 것이다. 소리 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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