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악관이 준비한 대규모 서명식이 하루 만에 무산됐다. 고성능 인공지능 모델에 대한 정부 차원의 검증 절차를 담은 행정명령이 막판에 제동이 걸린 것이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벤처투자자이자 트럼프 대통령의 최측근인 데이비드 색스가 직접 대통령과 통화해 해당 조치가 산업 성장을 저해하고 중국과의 패권 다툼에서 뒤처지게 만들 수 있다고 경고한 것으로 알려졌다.
색스는 이 규제가 그동안 AI 산업에 강력한 통제를 요구해온 비관론자들의 손을 들어주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그는 트럼프 행정부 초기 'AI·가상화폐 차르'로서 관련 정책을 총괄했으며, 공식 직책에서 물러난 뒤에도 현재 백악관 과학기술자문위원회 공동위원장으로 활동 중이다. 일론 머스크와 함께 페이팔을 거대 기업으로 성장시킨 이른바 '페이팔 마피아'의 일원이기도 하다.
원래 트럼프 대통령은 이 행정명령에 미온적인 입장이었다. 그러나 색스가 제기한 중국 경쟁력 약화 우려에 공감하면서 서명을 전격 연기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보도했다. 기업인들을 워싱턴으로 불러들이고 행사장 세팅까지 완료한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서명 보류 이유를 묻는 취재진에게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이 중국을 리드하고 있는데, 그 격차를 훼손할 행동은 원치 않는다"고 답변했다.
복수의 소식통에 따르면 서명 연기 결정 후에도 색스는 백악관 집무실을 다시 찾아 대통령과 면담했다.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 저커버그 메타 CEO 등 빅테크 수장들과의 논의도 이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해당 행정명령에는 민간 기업이 출시하는 첨단 AI 모델에 대해 정부와 정보를 공유하고 안전성 테스트를 의무화하는 내용이 담겼던 것으로 파악된다. 사이버 공격 수행 능력이나 소프트웨어 보안 허점 탐지 기능을 갖춘 최신 모델들이 속속 등장하면서, 백악관 안보 담당 라인에서는 최소한의 사전 검증 체계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반면 실리콘밸리와 업계 일각의 시각은 달랐다. 이런 규제가 미국 기업들의 개발 속도에 발목을 잡아 궁극적으로 중국에 추월당할 빌미를 줄 수 있다는 우려였다. 업계 관계자들은 오픈AI와 앤트로픽이 아직 중국 경쟁사들을 앞서고 있다고 평가하면서도, 딥시크 등 오픈소스 기반 중국 모델의 급속한 확산세를 경계하고 있다.
이번 사태로 백악관 내부의 AI 정책 갈등이 공개적으로 노출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기술 패권 경쟁을 최우선 과제로 삼는 친기업 성향의 실리콘밸리 인맥이 사이버 안보 중시 세력을 압도한 셈이다. WSJ에 따르면 일부 백악관 참모들은 대통령이 이미 해당 행정명령을 승인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고, 색스가 공식 절차를 건너뛰어 마지막 순간에 개입한 데 대해 강한 불만을 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스티브 배넌 전 백악관 수석전략가는 "AI 개발을 무리하게 가속하면 부작용이 쌓여 결국 더 강력한 규제를 자초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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