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스님의 첫 법문집 『일기일회』가 15년 만에 필사노트 형식으로 다시 독자를 찾는다. 입적 이후 절판돼 독자 곁을 떠나 있었던 법문집이 『생애 단 한 번』이라는 제목으로 새롭게 출간됐다. 시대와 종교를 넘어 수많은 이들의 삶의 길잡이가 되어 온 법정 스님의 맑은 가르침이, 이번에는 ‘직접 써 내려가는 책’으로 되살아난 것이다.
『생애 단 한 번』은 원전의 흐름과 문장을 해치지 않으면서도, 독자가 주요 구절을 읽고 따라 쓰며 마음에 새길 수 있도록 구성한 필사노트다. 단순한 독서용 에세이가 아니라, 한 글자씩 옮겨 적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성찰하게 하는 수행형 노트북에 가깝다. 출판사는 “읽는 데서 그치지 않고, 손으로 쓰며 몸과 마음에 새기는 책”이라는 점을 이번 기획의 핵심으로 내세운다.
책에는 서울 성북동 길상사 정기법회에서 전한 법문을 비롯해 여름·겨울 안거의 결제·해제 법문, 부처님오신날 법문, 사찰 창건법회 법문 등이 폭넓게 담겼다. 더불어 원불교 서울 청운회, 뉴욕 불광사 초청법회 등 종단과 국경을 넘나들며 전한 강연들도 함께 실려, 한 시대를 관통한 법정 스님의 육성을 입체적으로 복원한다.
법정 스님은 ‘무소유’의 정신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의 법문은 특정 종교의 교리를 넘어, 현대를 사는 이들에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던져왔다. 청빈한 삶을 몸소 실천한 수행자이자 자유로운 정신의 상징이었던 스님의 언어는, 오랫동안 독자들에게 정신적 양식이자 영혼의 샘물로 기능해왔다.
이번 필사노트에는 그 특유의 맑고 단단한 어조가 고스란히 살아 있다. “꽃과 잎들을 바라보면서 우리들 자신은 이 봄날에 어떤 꽃을 피우고 있는가 한번 되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라는 대목에서는, 계절의 변화 속에서 자기 삶의 준비와 변신을 점검하라는 메시지가 전해진다. 스님은 “준비된 나무와 풀만이 때를 만나 꽃과 잎을 열어 보입니다. 준비가 없으면 계절을 만나도 변신이 일어나지 않습니다”라고 강조하며, 삶을 향한 꾸준한 내적 준비를 당부한다.
행복과 불행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가르침도 눈에 띈다. “자신이 겪고 있는 행복이나 불행을 남의 일처럼 객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라는 구절에서 스님은, 자신의 삶을 ‘맑은 정신으로 지켜보는’ 깨어 있음의 중요성을 설파한다. 그에 따르면 “자기 삶을 주시하고 있으면 고통과 불행이 따라오지 않는다.” 필사노트 형식은 이러한 문장을 반복해 쓰며, 독자가 자연스럽게 자기 삶을 관찰하는 연습을 하도록 돕는다.
무상(無常)에 대한 통찰 역시 책 전반을 관통한다. “궂은일이든 좋은 일이든 어디까지나 한때의 일일 뿐입니다”라는 문장은, 몸의 병이나 집안의 근심이 영원할 것 같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모든 것은 변한다”는 불교의 근본 가르침을 상기시킨다. 스님은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단언하며, 집착을 내려놓는 용기를 권한다.
삶의 방향을 묻는 대목에서는 각자의 업과 다름을 인정하면서도, 분명한 가치 기준을 세울 것을 요구한다. “반드시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법은 없습니다. 각자의 업이 다르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 뒤, 스님은 “지금 나는 행복한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라고 제안한다. 필사노트는 이 질문을 손으로 되새기게 하며, 독자가 자신의 현재를 점검하도록 이끈다.
진정한 아름다움과 나눔에 대한 구절도 인상적이다. “진정한 아름다움은 샘물과 같아서 아무리 퍼내도 다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가꾸지 않으면 솟아나지 않습니다”라는 말처럼, 스님은 아름다움이 외부 대상이 아니라 ‘내 안의 샘’에서 솟아나는 것임을 일깨운다. 그는 “남과 나누는 일을 통해 나 자신을 수시로 가꾸어야 한다”고 말하며, 나눔의 실천이 곧 자기 수양임을 강조한다.
물질적 풍요 속에서의 자기 관리에 대한 경고도 담겨 있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말하고 생각하는 것은 모두 업이 됩니다”라고 시작되는 구절에서, 스님은 반복되는 행위와 생각이 결국 ‘업장’으로 쌓인다고 지적한다. “물질이 넘쳐 나는 세상에서 정신을 차리고 자주적인 삶을 이루려면 철저한 자기 관리가 필요합니다”라는 말은, 가치판단의 기준을 “내가 이 일을 해서 행복할 것인가, 불행할 것인가”에 두라고 권유한다. “순간에 속지 마십시오. 순간순간을 살되 거기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라는 문장은 오늘의 소비·욕망 사회를 향한 날카로운 경책이기도 하다.
법정 스님은 수행의 현장을 특정 사찰로 한정하지 않는다. “우리가 처한 삶의 현장이 곧 도량입니다”라는 구절에서 그는, 가정과 일터야말로 진정한 수행의 장이라고 말한다. 어수선한 시대에 “도량이 없으면 세상의 물결에 휩쓸려 버린다”며, 분별과 집착을 떠나 스스로 마음을 다스리는 곳이 곧 도량임을 일깨운다.
한 생애의 결산에 대한 가르침은 더욱 직설적이다. “결국 한 생애에서 무엇이 남습니까? 얼마만큼 사랑했는가, 얼마만큼 베풀고 나누었는가, 그것만이 재산으로 남습니다”라는 문장은, 소유와 성취에 매달린 현대인에게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다. 스님은 “그 밖의 것은 다 허무하고 무상합니다. 아무것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라고 못 박으며, 자비심이 곧 여래임을 상기시킨다.
법정 스님의 삶 자체도 이러한 가르침을 증명한다. 1932년 전남 해남 우수영에서 태어난 그는 한국전쟁의 비극을 겪으며 진리의 길을 찾아 나섰다. 1956년 효봉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은 뒤 통영 미래사, 지리산 쌍계사 등에서 수행했고, 해인사 선원과 강원에서 기초를 다졌다. 1960년대에는 통도사에서 『불교사전』 편찬과 경전 번역에 참여하며, 불교계와 언론을 통해 날카로운 필치로 새로운 바람을 일으켰다.
1970년대에는 함석헌, 장준하 등과 민주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해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1975년 제2인혁당 사건을 목격한 뒤 큰 충격을 받은 그는, 송광사 뒷산에 불일암을 짓고 본래의 수행자로 돌아가 ‘무소유’의 삶을 실천했다. 그러나 세상에 알려진 명성을 피해 1992년 강원도 산골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겨 홀로 정진했고, 1994년에는 시민모임 ‘맑고 향기롭게’를 발족해 생명 중심의 나눔을 주창했다.
2010년 길상사에서 세수 78세, 법랍 55세로 입적한 뒤에도, 스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검은 의식도, 사리도, 관과 수의도 없이, 평소 승복을 입은 채 간소한 다비”를 당부하며 무소유를 실천했다. 남은 이들에게는 “맑고 향기로운 가르침”만을 유산으로 남겼다.
『생애 단 한 번』이라는 제목에는, 스님이 즐겨 말하던 ‘일기일회(一期一會)’의 뜻이 겹쳐 있다. 한 번뿐인 이 생, 한 번뿐인 이 만남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필사노트 형식으로 다시 태어난 이번 책은, 독자가 그 질문을 자기 손글씨로 되새기도록 유도한다.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출간된 이 책은, 법정 스님을 그리워해 온 독자들에게 오랜 기다림 끝에 찾아온 ‘반가운 단비’가 될 전망이다. 세대와 종교, 가치관을 초월해 여전히 유효한 삶의 화두를 품은 그의 법문이, 이번에는 한 줄 한 줄 필사되는 글씨 속에서 조용히 되살아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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