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거진=윤나애 작가] 아들이 교회에서 무릎을 다쳤다. ‘뛰지 말아라’, ‘나무에 올라가지 말아라’, ‘제발 사라지지 말아라’ 그렇게도 이야기했건만 또 말을 안 듣고 뛰어다니다가 기어코 계단에서 넘어져 피를 봤다. 교회 행정실엔 이럴 때를 대비해 구급상자가 있다. 밴드라도 붙여주기 위해 그곳으로 향했다. 사실 이번이 첫 방문이 아닌데 오늘따라 행정실 벽에 붙은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평소에는 ‘그냥 렘브란트 그림이 있네’하고 넘겼던 게 특별히 느껴진 이유는 아마도 저 작품이 ‘돌아온 탕자’였기 때문이리라. 아이는 무릎에 밴드를 붙이자마자 절뚝거리면서도 금방 달려 나갔다. 다시 밖으로 나가 형들과 놀기 위해 사라져 버린 아들을 뒤로하고 허탈하게 그림을 바라보는데, 그 아버지의 표정이 낯설게 느껴진다. ‘와, 저 아버지는 저렇게 품어줄 수 있구나’. 나는 지금 저 청년이랑 비교도 안 되게 작은 녀석한테 이미 속이 타들어 가고 있는데.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 1606-1669)의 ‘돌아온 탕자(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1668)’는 재산을 탕진하고 거지가 되어서야 돌아온 아들과 그를 맞아들이는 아버지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아들은 신발도 너덜너덜한 상태로 무릎을 꿇고 있고 아버지는 말없이 두 손으로 그 등을 감싸 안는다. 이 그림 속 아버지의 두 손이 서로 다르게 생겼다는 것은 그림 좀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많이들 알고 있는 이야기 중 하나다.
왼손은 크고 투박하다. 손가락이 굵고 두툼하며 힘이 실려있다. 오랜 세월을 버텨온 손, 집안을 지켜온 손, 화가 나도 참아온 손이다. 반면 오른손은 가늘고 부드럽다. 꽉 쥐지 않고 살며시 얹혀 있는 그 손은 마치 어린아이의 등을 달래듯 조심스럽다. 이 두 손은 단순한 해부학적 실수가 아니다. 렘브란트는 강인함과 온유함, 엄격함과 자애로움이 한 품 안에 공존하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두 손을 다르게 그렸다. 받아주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그러나 그럼에도 받아주고 있다는 것을 그 두 손이 동시에 말하고 있다. 오래 기다렸던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손의 언어다.
우리는 오랫동안 지구에게 탕자처럼 살았다. 땅을 파고 하늘을 태우고 바다를 채우면서도 그 대가를 외면했다. 그러다 점점 더 더워지는 날씨와 자연의 심상찮음을 느끼면서 서서히 고쳐가려는 몸짓도 일어나고 있다. 일회용 컵을 거절하고, 채식을 시도하고, 기후 문제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있다. 하지만 나는 가끔 이런 질문이 들기도 한다. 우리가 지금 돌아간다 한들, 지구는 우리를 받아줄까. 이미 늦어버린 것은 아닐까. 그림 속 아들의 귀환이 진정한 화해가 되려면 조건이 있다. 돌아온 뒤 다시 같은 방식으로 살아서는 안 된다. 무릎을 꿇은 그 자세에는 이전의 삶을 내려놓겠다는 포기가 담겨있다. 그것이 빠진 귀환은 잠시 쉬다 가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의 돌아옴도 그래야 한다. 뉘우침 없이 편리함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돌아오는 척만 한다면 그건 집 앞을 서성이다 다시 떠나는 것이다. 진짜 귀환에는 반드시 방향의 전환이 따라야 한다.
아들이 속한 교회 어린이 합창단 연습 시간이 되어 연습실로 향했다. 이 녀석은 언제 왔는지 맨 앞자리에 앉아 뒤를 돌아보며 나와 눈을 자꾸만 마주친다.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밉지가 않았다. 그냥 옆에 있으니 됐다. 그렇게 감정이 스르르 풀리는 걸 느끼면서 나는 그 아버지의 마음과 한 손으론 꽉 잡고 싶고 한 손으론 토닥여 주고 싶은 그 두 손의 의미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지구도 아마 그러지 않을까. 다만 조건이 있다. 슬그머니 와서 모른 척 앉아있는 것이 아니라 신발이 닳도록 걸어서 고개를 숙이고 돌아와야 한다는 것. 그리고 다시는 같은 방식으로 살지 않겠다는 것. 그 마음을 담아 무릎을 꿇을 때 지구는 분명 그 크고 투박한 손과 가늘고 부드러운 손을 함께 우리의 등에 얹어줄 것이다.
Copyright ⓒ 문화매거진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