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소연 저 | 한겨레출판
두고두고 떠올리게 되는 추모글이 있다. 고인은 많은 영화를 소개하고, 비평하고, 번역하고, 알린 사람이었으므로 부음이 전해진 직후 뒤따른 글 역시 대부분 그런 ‘업적’에 관한 것이었다. 그런데 그 글은 달랐다. 글쓴이는 고인이 생전에 얼마나 집요한 사람이었는지, 얼마나 외골수였는지, 그런 그의 성미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고통받았는지에 대해 썼다. 한 시절 아주 가깝게 지냈고 어느 시절 멀어져 버린 고인을 담담히 회고했다.
누군가는 사후에 고인의 ‘별로였던’ 면모에 대해 얘기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다고도 느끼는 모양이었지만, 바로 그래서 나는 그 글이 좋았다. 추앙하지 않고 회고하기. 심지어는 좀, 고약했던 면모까지 포함해서. 그게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람을 무척 정확하게 되살려내는 한 방식처럼 느껴졌다. 월스트리트 저널 부고 전문기자 제임스R.해거티도 그의 책 『그렇게 인생은 이야기가 된다』에서 “누군가가 우리를 애틋하게 기억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성공 때문만은 아니”고, “때로는 별난 성격, 이상한 습관, 실패, 고집” 등이 누군가를 더 오래 기억하게 만든다고 했다. 애초에 그렇지 않나? 우리 대부분이 단순하게 좋거나 (or) 나쁜 사람이 아니고, 복잡하게 좋고도 (and) 별로인 사람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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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소연의 소설을 읽을 때면, 아주 잘 쓰인 부고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상문학상 최연소 수상자라는 타이틀을 안겨준 출세작 「그 개와 혁명」이 1980년대 학생운동을 했던 아버지의 장례식장에 페미니스트 딸이 진돗개 ‘유자’를 풀어 ‘개판’을 벌이는 이야기임을 떠올리면 더더욱 그렇다. 납작하고 뭉툭하게 한 인간의 삶을 요약하려는 시도에 맞서 그가 생전 얼마나 복잡한 인간이었는지 기억하려는 몸부림 같달까. 그리고 아마 그런 소설은, 삶이라는 것이 결국엔 죽음을 앞두고 아주 오랫동안 하는 작별인사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만이 쓸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신작 소설집 『너의 나쁜 무리』를 보자. 여기에도 죽음이 임박했거나, 이미 죽은 사람들이 나온다. 하지만 이들이 죽음 앞에서 짓는 표정은 결코 하나의 얼굴로 수렴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단편 「작은 벌」에서 사설 구급차를 모는 구급대원 이중일은 죽음을 앞둔 환자를 다른 병원으로 이송하던 중 환자와 보호자에게 구급차를 빼앗긴다. 이들의 갈취는 이를테면 “병원에서 닥쳐올 죽음을 기다리는” 대신, 차라리 “무엇을 해나가며 함께 그 ‘상태’에 당도하고자” 하는 적극적 행위에 해당한다. “나는 그것들의 계획대로 놀아나지 않을 거예요(…) 최대한 나를 건사하는 방식으로, 멀리 도망칠 거라고요.”(54쪽)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구급차를 내어주지 않을 도리는 없다.
그런가 하면, 「뜰의 미래」의 문주는 연락을 끊고 살던 둘째 고모의 집을 오랜만에 방문한다. 친구 근정의 연락을 받고 이뤄진 방문인데, 6년 만에 만난 고모는 자신이 근정과 한 달 전에 혼인신고를 했고, 자신은 곧 죽을 것이며, 자신이 죽으면 근정과 문주가 집과 땅을 나눠 가졌으면 좋겠다는 유언을 전한다. 문주는 ‘조카의 친구’와 결혼한 고모를 위해 서약식의 증인이 되어 준다. 고모는 오래전 자신이 써 둔 “사랑하는 이에게 모든 것을 내주고서. 나의 방식대로 나를 물림할 것이다”(274쪽)라는 유언을 실현한다.
당신들이 죽으라는 방식대로 죽지 않겠다는 선언은, 당신들이 살라는 방식대로 살지 않겠다는 선언이기도 하다. 표제작인 「너의 나쁜 무리」에서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유선은 할머니인 ‘여사’와 함께 산다. 마찬가지로 버림받는 것이 두려워 매번 애인을 갈아치우는 여사는 손녀인 유선에게는 “너는 그러지 않고도 살 수 있으면 좋겠다”고 조언하지만, 정작 유선은 이렇게 대꾸한다.
“나는 여사처럼 살 거다. 아주 많은 사람에게 마음 주고 몸 주고 절절매며 그게 사랑이라고 생각하며 평생을 살아갈 테다. 그러다 진심으로 그런 생각도 했다. 나쁘지 않은데…?”(102쪽)
예소연의 소설 속 인물은 그러니까, “최소한으로라도 살기 위해서는 최대한으로 노력해야 한다”라고 말하는 세상한테 “그냥 살아도 살아지던데”라고 되받아치고, “아무도 구제해 주지 않는다”라는 걱정에는 “그럼 우리가 우리를 구제해야겠네”(95쪽)라고 말하는 사람들이다. 모두가 시끄럽게 자기 할 말만 외치는 세상에서 오히려 “속삭임으로써 우리는 세상의 전부가 된다”(「소란한 속삭임」,135쪽)라는 비밀을 아는 사람들.
이때의 ‘우리’는 어떤 ‘우리’인가? 우리는 층간 소음으로 엮인 위아래층 주민 사이이기도 하고, 구급차에 태운 환자와 보호자이기도 하고, 할머니의 돈을 떼먹은 남자친구이기도 하고, 시터인 내가 돌보는 할머니이기도 하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곁에 있는 함께 희미한 존재들.” 설사 그런 우리 사이를 이어주는 것이 ‘빚’이나 ‘미련’ 같은 것이라 할지라도, 그런 것까지도 얼마든지 인연의 빌미로 삼아 기꺼이 서로의 ‘우리’가 되어가는 사람들. 세상의 기준으로 보자면 약간은 ‘하자’ 있는 사람들이 한패가 되어 스스로를 구제하는 이런 이야기들을 좋아하지 않기는 힘들다. 그러니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삶이 아니라 비선형적인 죽음뿐”이라는 깨달음 뒤에 오는 것이 꼭 절망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 식대로, ‘비선형적인 삶’으로 되갚아주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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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보고 있는 드라마에서 “우리의 삶은 이미 끝났고 눈 감기 직전에 그리운 시절을 회상하는 거래요.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건 죽기 직전 회상 속 영상.”이라는 대사가 나오는 것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나도 종종 그렇게 삶을 한 발짝 떨어져 보게 될 때가 있어서. 그때마다 나는 혼자 이렇게 중얼거린다. ‘정말… 정말 많은 일이 있었어요…’
『너의 나쁜 무리』를 읽고, 내가 죽기 전 하는 회상이 예소연 소설 속 장면 같았으면 좋겠다고 문득 생각했다. 살면서 이룬 성취나 업적이 아니라, 당신들과 치른 작당모의들이 떠오르면 좋겠다고. 떠올리며 킬킬 웃고 싶다고. 거기에는 미운 얼굴도 사랑한 얼굴도 섞여 있지만, 모두 하나같이 그리운 얼굴들이다. 그러니 사는 동안 우리 함께 저지르자. 나누자. 매일매일 우리들만의 방식으로, 아주 오래 하는 작별 인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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