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김효인 기자】 국내 퇴직연금 적립금 규모가 사상 처음으로 500조원을 넘어섰다. 증시 강세와 실적배당형 상품 확대에 힘입어 전체 평균 수익률도 제도 도입 이후 최고치를 기록했다.
그러나 가입자들이 체감하는 성적표는 운용 방식에 따라 갈렸다. 적립금의 상당 부분이 여전히 원리금보장형 상품에 머물러 있는 가운데, 실적배당형 상품과의 수익률 격차가 크게 벌어지면서 퇴직연금 시장 내 ‘운용 격차’가 부각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20일 고용노동부와 금융감독원이 공동 발표한 ‘2025년 우리나라 퇴직연금 투자 백서’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국내 퇴직연금 총 적립금은 501조4000억원으로 집계됐다. 전년 말 431조7000억원보다 약 70조원 증가한 수치로, 400조원을 넘어선 지 1년 만에 500조원대에 진입했다.
지난해 퇴직연금의 연간 평균 수익률은 6.47%로, 2005년 제도 도입 이후 가장 높았다. 국내외 증시 강세가 이어지면서 실적배당형 상품의 평가액이 늘어난 영향으로 풀이된다.
다만 운용 방식별 수익률 차이는 확연했다. 주식형 펀드나 ETF 등에 투자하는 실적배당형 상품의 평균 수익률은 16.80%에 달한 반면, 정기예금 중심의 원리금보장형은 3.09%에 그쳤다. 실적배당형 수익률이 원리금보장형의 5배를 웃돈 셈이다.
제도 유형별로도 희비가 엇갈렸다. 기업이 자금을 운용해 근로자에게 정해진 퇴직급여를 지급하는 확정급여형(DB)의 수익률은 3.53%에 머물렀다. DB형은 원금 손실 위험을 줄이기 위해 대부분 원리금보장형 위주로 운용되기 때문이다.
반면 근로자가 직접 적립금을 운용하는 확정기여형(DC)은 8.47%, 개인형 IRP는 9.44%의 수익률을 기록했다. 증시 상승기 속에서 개인이 실적배당형 상품 비중을 늘린 영향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평균의 착시…운용 방식이 가른 퇴직연금 성적표
이번 조사에서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퇴직연금 계좌 내 ETF(상장지수펀드)의 급부상이다. 백서에 따르면 퇴직연금을 통한 ETF 투자 금액은 48조7000억원으로, 3년 연속 100%대 증가율을 이어갔다. 전체 실적배당형 적립금에서 ETF가 차지하는 비중도 39.6%에 달했다.
공모펀드 시장에서는 은퇴 시점에 맞춰 자산 배분을 자동으로 조정하는 TDF(타깃데이트펀드)의 성장세가 두드러졌다. 퇴직연금 내 TDF 투자 금액은 전년 대비 50% 늘어난 20조1000억원을 기록했다. 과거 예금처럼 묻어두던 퇴직연금이 ETF와 TDF를 중심으로 개인이 직접 운용하는 투자형 계좌로 바뀌고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자금의 성격이 투자형으로 이동하면서 금융권역별 구도에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다. 은행권은 지난해 말 적립금 260조5000억원, 점유율 52.0%로 여전히 시장 1위 지위를 지켰다.
다만 점유율 확대 흐름은 증권사가 더 두드러졌다. 증권사의 퇴직연금 적립금은 131조5000억원으로 전체의 26.2%를 차지했다. 증권사 점유율은 2023년 22.7%, 2024년 24.1%에 이어 꾸준히 상승하고 있다.
특히 실적배당형 상품 운용 규모에서는 증권사가 59조4000억원을 기록하며 우위를 보였다. ETF와 TDF 등 투자형 상품 라인업을 앞세워 가입자 자금을 흡수한 결과로 풀이된다.
반면 원리금보장 상품과 장기 안정성을 강점으로 삼아온 보험업계의 존재감은 예전 같지 않다. 보험사의 적립금은 104조6000억원으로 점유율 20.9%를 기록했다. 시장의 관심이 안정성뿐만 아니라 수익률과 자산배분 역량으로 이동하면서 기존 영업 모델만으로는 성장세를 이어가기 쉽지 않다는 평가가 나온다.
다만 전체 평균 수익률 상승이 모든 가입자의 노후자산 증가로 이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전체 퇴직연금 적립금의 75.4%는 여전히 원리금보장형 상품과 대기성 자금에 머물러 있다. 투자형 상품을 선택한 가입자가 전체 평균을 끌어올린 반면, 보수적으로 운용한 가입자의 체감 수익률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구조다.
특히 DC형과 개인형 IRP 가입자는 스스로 상품을 선택해야 하는 만큼 개인의 금융 이해도와 정보 접근성에 따라 향후 노후자산 격차가 더 벌어질 가능성도 있다. 퇴직연금 시장이 커질수록 단순한 외형 성장보다 가입자의 운용 역량을 높이고 금융사의 자산관리 지원을 강화하는 것이 중요해지는 이유다.
금융권 관계자는 “퇴직연금 500조원 시대에는 단순히 어느 금융사에 돈을 맡겼느냐보다 어떤 방식으로 운용하느냐가 중요해지고 있다”며 “보험사 등 기존 안정형 금융사들도 장기 운용의 강점은 살리되, 가입자의 자산 배분을 도울 투자형 상품 라인업과 연금 교육 체계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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