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비뉴스와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영유아교육포럼은 조기 사교육 광풍 속에 대한민국 아이들의 빼앗긴 시간을 되찾기 위한 26인의 릴레이 기고 '아이들의 시간을 지켜주세요'를 연재합니다. 4살 아이가 영어학원 레벨테스트를 치르고, 만 5세가 되면 어린이집과 유치원 교실이 텅 비는 것이 지금 대한민국 영유아 교육의 현실입니다. 조기 선행학습은 아이들의 발달을 앞당기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누려야 할 놀이와 탐색의 시간을 빼앗고 있습니다. 영유아 교육 현장의 교사, 연구자, 부모, 정책 전문가 26인은 조기 사교육이 아이들의 발달에 미치는 영향과 우리 사회가 마주한 교육 현실을 짚고, 국가와 사회가 어떤 책임을 져야 하는지, 조기가 아닌 ‘적기교육’을 위해 무엇을 바꿔야 하는지를 제안합니다. 빨리 배우는 것이 아니라 제때 자라는 것, 그것이 아이들의 권리입니다. -편집자 말
저출생 대책 속에서 반드시 먼저 보아야 할 대상이 있다. 이미 태어나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영유아들이다. 아이를 더 낳게 하는 정책도 중요하지만 지금 자라는 아이들이 안정적인 보육·교육환경 안에서 건강하게 성장하도록 하는 일은 더 직접적이고 절박하다. ⓒ베이비뉴스
◇ 문제 제기: 아이의 하루를 먼저 보아야 한다
초저출생으로 지역의 인구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 인구소멸지역은 늘어나고 산부인과와 어린이집, 유치원, 초등학교가 사라지는 지역도 늘고 있다. 저출생은 지역의 문제이고 교육과 돌봄의 문제이며 국가 지속 가능성의 문제이다.
그러나 저출생 대책 속에서 반드시 먼저 보아야 할 대상이 있다. 이미 태어나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영유아들이다. 아이를 더 낳게 하는 정책도 중요하지만 지금 자라는 아이들이 안정적인 보육·교육환경 안에서 건강하게 성장하도록 하는 일은 더 직접적이고 절박하다.
어린이집은 오랜 시간 국가 보육의 현장을 지켜왔다. 맞벌이 가정의 일상을 받쳐왔고 영아 보육의 큰 축을 담당해왔다. 그러나 초저출생의 충격은 보육 현장에 가장 먼저 나타나고 있다. 원아 수 감소는 운영 불안으로 이어지고 운영 불안은 교사 고용과 보육환경의 불안정으로 연결된다.
어린이집 폐원이 이어지면 학부모는 아이를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선택지를 잃는다. 영유아도 익숙한 선생님, 교실, 친구, 하루의 리듬을 잃게 된다. 아이에게 어린이집은 단순한 이용시설이 아니라 매일의 관계와 경험이 쌓이는 삶의 공간이다.
초저출생 시대에 아이 한 명 한 명은 더욱 귀하다. 그렇다면 그 아이들이 머무는 보육 현장도 더 귀하게 다루어져야 한다. 보육 현장의 지속 가능성은 특정 기관의 생존 문제가 아니라 영유아의 안정적인 성장환경을 지키는 문제이다.
◇ 사교육 확산과 재정 방향의 문제
영유아기 교육의 핵심은 선행학습이 아니다. 영유아에게 필요한 것은 놀이, 관계, 신체활동, 정서 안정, 언어적 상호작용, 탐색과 표현의 기회이다. 아이는 놀이를 통해 배우고 관계 속에서 자라며 일상 속에서 세상을 익힌다.
하지만 지금의 아이들은 놀이를 충분히 경험하기도 전에 학습의 대상으로 놓이고 있다. 한글, 수, 영어, 독서, 사고력, 코딩이라는 이름의 프로그램이 영유아기의 일상으로 들어온다. 부모는 내 아이가 뒤처지지 않을까 불안해하고 기관은 무엇을 더 해줄 수 있는지 비교당한다. 조기교육은 부모의 불안을 먹고 자란다.
문제는 국가 재정이 이러한 흐름을 충분히 막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무상교육·보육이라는 이름으로 지원은 확대되고 있지만 그 재정이 아이의 발달 환경 개선으로 흐르고 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일부 현장에서는 지원금이 부모 부담을 낮추는 데 그치고 그 여력이 다시 특별활동이나 외부 사교육 선택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렇다고 모든 특별활동을 부정하자는 것은 아니다. 아이의 발달에 맞고 놀이와 경험을 넓히며 부모 부담을 과도하게 키우지 않는 활동은 필요할 수 있다. 문제는 그것이 교육과정을 대체하거나 원아 모집을 위한 경쟁 수단이 되거나 영유아에게 발달에 맞지 않는 학습 부담을 주는 경우이다.
결국 문제는 재정의 규모만이 아니다. 재정의 방향과 설계의 문제이다. 국가가 돈을 쓰고 있음에도 영유아의 놀이 시간은 줄고 기관 간 프로그램 경쟁은 커지고 부모의 사교육 불안이 해소되지 않는다면 재정의 방향을 다시 살펴야 한다.
◇ 유보통합과 재정 지원의 방향
유보통합은 어린이집과 유치원 사이의 격차를 줄이고 모든 영유아에게 균등한 교육·보육환경을 제공하기 위한 중요한 과제이다. 그러나 현장에서는 우려도 크다. 유보통합이 진정한 통합이 아니라 특정 체계 중심의 재편으로 흐를 수 있다는 걱정이다.
중요한 것은 기관 간 서열화 해소이다. 어린이집에 다니는 아이와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가 달라서는 안 된다. 부모가 체감하는 지원 수준, 교사가 일하는 환경, 기관이 운영되는 기준, 아이가 경험하는 교육·보육의 질이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지원 구조가 균형을 잃으면 부모의 선택도 왜곡된다. 같은 연령의 아이를 두고도 어린이집과 유치원 사이에 지원 방식이나 부모 부담 구조가 다르게 설계되면, 특정 기관으로의 쏠림이 생길 수 있다. 이는 유보통합의 취지와 맞지 않는다.
유보통합은 어린이집을 유치원에 맞추는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진정한 통합은 아이가 어느 기관에 다니든 안정적인 교사, 충분한 놀이, 안전한 돌봄, 발달에 맞는 교육과정을 보장받게 하는 것이다.
무상교육·보육 재정 역시 같은 방향이어야 한다. 이제는 “얼마를 지원할 것인가”를 넘어 “무엇을 위해 지원하는가”, “그 결과 아이의 발달권이 보장되는가”를 함께 물어야 한다. 지원금은 기관 간 모집 경쟁이나 외부 프로그램 확대가 아니라 교사 배치, 처우 개선, 대체교사 지원, 급식과 안전, 발달 지원, 교육과정 운영 여건 개선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 발달권 보장을 위한 재정과 제도 개선 과제
첫째, 유보통합 재정은 기관 간 격차 해소를 원칙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어린이집과 유치원 사이의 지원 방식과 부모 부담 구조가 불균형하면 부모의 선택은 왜곡된다. 유보통합은 어느 기관에 다니느냐에 따라 아이가 받는 지원과 환경이 달라지는 구조를 바로잡는 데서 출발해야 한다.
둘째, 무상교육·보육 재정은 현장이 보육의 질을 높이는 데 안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어야 한다. 현재 현장은 인건비, 급식비, 안전관리, 교육과정 운영, 발달지원 등 다양한 비용을 함께 감당하고 있다. 따라서 지원은 단순한 통제 항목이 아니라 실제 보육 현장에서 필요한 비용을 충분히 반영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그래야 어린이집은 외부 프로그램 경쟁에 기대지 않고 교사와 아이의 일상, 놀이와 돌봄의 질을 높이는 데 재정을 사용할 수 있다.
셋째, 보육 현장의 운영 안정성을 보육의 질 관리와 연결해야 한다. 폐원이 늘어나면 부모의 선택권은 줄고 아이의 생활환경은 불안정해진다. 어린이집의 안정적 운영은 지역 보육망을 유지하고 영유아의 일상을 지키는 일이다. 운영이 안정되어야 교사 고용도 안정되고 아이의 하루도 흔들리지 않는다.
넷째, 교사 처우와 배치 기준을 개선해야 한다. 영유아 보육의 질은 교사에게서 나온다. 교사가 지치고 불안정하면 아이의 하루도 흔들린다. 교사 대 아동 비율 개선, 보조·대체교사 지원, 교사 전문성 개발, 처우 개선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다섯째, 특별활동과 특성화 프로그램은 규제의 대상이기 전에 발달 적합성의 관점에서 정비되어야 한다. 모든 특별활동을 부정할 수는 없다. 다만 영유아의 놀이 시간과 휴식 시간을 침해하거나 부모 불안을 자극하는 인지 중심 프로그램으로 흐르지 않도록 기준을 세울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현장을 옥죄는 규제가 아니라 아이의 발달에 맞는 교육·보육 환경을 함께 만들어가는 관리 체계이다.
여섯째, 재정지원의 성과는 현장의 부담 완화와 아이의 발달권 보장으로 평가되어야 한다. 부모 부담이 실제로 줄었는지, 아이들의 놀이 시간이 보장되었는지, 교사의 교육과정 운영 여건이 개선되었는지, 기관이 안정적으로 운영될 수 있는지를 함께 보아야 한다. 재정의 성과는 서류상 집행률이 아니라 아이의 하루와 현장의 안정성에서 확인되어야 한다.
◇ 결론: 아이의 성장으로 흐르는 재정이 필요하다
초저출생 시대에 국가는 아이를 낳게 하는 정책만 말해서는 안 된다. 이미 태어난 아이들이 어떻게 자라고 있는지 어떤 환경에서 하루를 보내는지 봐야 한다.
어린이집과 유치원이 문을 닫고 부모의 불안은 커지고 영유아 대상 사교육은 낮은 연령으로 내려오고 있다. 이 흐름 속에서 무상교육·보육 재정이 제대로 설계되지 않으면, 그 재정은 공공성을 강화하기보다 사교육을 보전하는 장치가 될 수 있다.
보육 현장은 국가 보육의 주변부가 아니다. 오랜 시간 아이들의 가장 가까운 일상을 지켜온 현장이다. 특히 영아 보육과 맞벌이 가정 지원, 지역사회 돌봄의 영역에서 어린이집이 감당해온 역할은 결코 작지 않다.
영유아기는 다시 오지 않는다. 이 시기의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선행학습이 아니라 안정된 관계, 충분한 놀이, 따뜻한 돌봄, 건강한 식사, 안전한 공간, 교사의 세심한 관찰과 상호작용이다.
무상은 공공성의 출발일 뿐이다. 공공성은 돈의 규모가 아니라 돈의 방향에서 완성된다. 국가 재정이 사교육을 키우는 현실을 멈추려면 재정의 방향을 아이의 발달 환경 개선으로 돌려야 한다. 현장을 의심하고 옥죄는 방식이 아니라 현장이 본래의 역할을 충실히 할 수 있도록 재정과 제도를 현실화해야 한다.
그것이 부모의 불안을 줄이고 어린이집과 유치원의 균형 있는 발전을 이루며 자라는 아이들의 발달권을 지키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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