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선대회장의 생전 육성 영상이 온라인에서 다시 주목받고 있다. 영상 속 이 회장은 단호한 어조로 "가난이라는 거는 나라도 못 구한다는 옛날 말이 있어"라고 말했다. 빈곤 문제를 둘러싼 논쟁이 반복될 때마다 이 영상이 다시 떠오르는 데는 이유가 있다.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선대회장. 지난 2023년 10월 18일 서울 삼성전자 서초사옥에서 열린 이건희 회장 3주기 추모 삼성 신경영 3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에서 참석자들이 이건희 회장 신경영 관련 영상을 지켜보고 있다. / 뉴스1
1987년 삼성그룹을 물려받아 시가총액 1조 원이던 회사를 약 400조 원 규모로 키운 그가, 가난을 바라보는 시각이 남달랐기 때문이다. 이 회장이 말한 해법은 돈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무엇이었을까.
이 회장은 같은 영상에서 "일하는 기회를 주는 게 더는 거야"라고 했다. 단순한 현금 지원이 아니라 스스로 일어설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진짜 도움이라는 뜻이다. 삼성을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운 경영 철학이 빈곤 문제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이 회장이 평생 붙잡았던 생각은 하나였다. 사람에게 무언가를 채워주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채울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 이 회장이 말한 해법 세 가지를 짚었다.
이 회장은 영상에서 "일은 하기 싫고 놀고먹으려고 하는 사람한테 밥 굶는다고 매달 10만 원, 20만 원 줘봐. 그건 그 사람한테 독약 주는 거다"라고 말했다. 무조건적인 현금 지원이 오히려 자립 의지를 꺾는다는 경고였다. 이 발언은 당시에도, 지금도 논쟁적이다. 복지를 확대해야 한다는 쪽에서는 지나치게 냉정한 시각이라고 비판하고, 반대쪽에서는 의존을 고착화하는 지원 방식을 경계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로 삼는다.
이 회장이 모든 지원을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일할 의지가 없는 사람에게 조건 없이 돈을 주는 것과,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주는 것은 결이 다르다는 뜻이었다. 이 회장은 1987년 삼성그룹 회장에 취임한 이후 줄곧 "성과 있는 곳에 보상이 있다"는 원칙을 내세웠다. 적당히 자리를 지키는 사람과 성과를 낸 사람을 같은 선상에 두지 않겠다는 철학이었다. 가난에 대한 시각도 같은 맥락이었다. 받는 사람의 자립 의지를 꺾는 방식의 지원은 도움이 아니라 독이 된다는 것이 이 회장의 생각이었다.
생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1993년 6월 7일 독일 프랑크푸르트 켐핀스키호텔에서 삼성 임원진들에게 '신경영' 구상을 밝히고 있다. / 뉴스1
이 회장은 같은 영상에서 구체적인 사례를 들었다. 일자리도 기술도 없는 데다 아이까지 있어 밖에 나가지 못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탁아소라고 이 회장은 말했다. 이 회장은 "탁아소를 해줘서 부부가 함께 일할 수 있게 되면, 한 달 50만 원 버는 가정이 150만 원, 200만 원을 벌게 된다. 평생 달동네에서 못 나가던 사람이 탈출하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일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는 철학이다.
이 철학은 실제 삼성의 사회 공헌 방향과도 겹친다. 이 회장 사후인 2021년 4월, 유족은 소아암·희귀질환 환아 지원에 3000억 원, 감염병 극복 인프라 구축에 7000억 원 등 총 1조 원을 기부했다. 이 기부금을 토대로 서울대어린이병원을 주축으로 소아암·희귀질환지원사업단이 출범했으며, 2023년 기준 전국 160개 의료기관에서 1071명의 의료진이 참여해 진단 3984건, 치료 2336건을 진행했다. 치료비를 보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치료받을 수 있는 환경 자체를 만든 방식으로, 이 회장이 말한 철학이 사후에도 이어진 셈이다.
1993년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임원진들에게 '신경영' 구상을 설명하고 있다. / 뉴스1
이 회장은 달동네 사례를 이어가며 이렇게 말했다. 이 회장은 "그지가 열심히 일을 해서 집을 사고 나가는 거를 옆에 사람이 보고 '아, 나도 저리 하면 집 사고 희망이 있다' 하니, 이거를 보여주고 이게 도와주는 거지"라고 했다. 한 사람의 자립이 주변에 희망을 전파하는 것, 그것이 이 회장이 말한 진짜 해법의 완성이었다.
이 시각은 하버드대 정치학자 로버트 D. 퍼트넘이 2000년 출간한 저서 『나 홀로 볼링』에서 말한 사회적 자본 개념과 닿아 있다. 퍼트넘은 저서에서 "사회적 자본은 시민의 사회적 참여를 북돋우는 요소일 뿐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를 더 건강하고 행복하게 만드는 핵심"이라고 밝힌 바 있다. 한 명이 달동네를 벗어나는 것이 단순한 개인의 성공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 가능성을 심는 일이 된다는 논리다. 이 회장이 말한 희망의 전파는 감상적인 표현이 아니라, 공동체가 작동하는 방식을 꿰뚫어 본 관찰이었다.
이 회장이 세상을 떠난 지 5년이 지났다. 그럼에도 이 육성 영상이 다시 주목받는 이유는 하나다. 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일어설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는 이 회장의 생각이,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울림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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