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시사 취재1팀] 안예리 기자 = 국내 치매 환자가 100만명에 육박하면서 이들이 보유한 자산, 이른바 ‘치매머니’가 새로운 사회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치매 고령층 자산 규모는 이미 154조원을 넘어섰지만, 재산을 보호할 제도는 여전히 현실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현행 성년후견제도만으로는 경제적 학대, 조직화되는 고령층 대상 범죄를 막기에 한계가 있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이하 저고위)와 보건복지부 등에 따르면 국내 65세 이상 치매환자는 지난해 기준 약 97만명 수준으로 추산됐다. 경도인지장애 인구까지 포함하면 규모는 훨씬 커진다. 고령화 속도가 빨라지면서 치매환자 수는 앞으로도 꾸준히 증가할 전망이다. 정부는 2030년 치매환자가 120만명을 넘어설 것으로 보고 있으며, 2050년에는 200만명을 웃돌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2050년
200만명
이에 따라 치매환자가 보유한 자산 규모 역시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저고위 조사 결과를 보면 2023년 기준 치매 고령층 자산 규모는 약 154조원으로 추산됐다. 국내총생산(GDP)의 6%를 넘는 수준이다.
2050년에는 약 488조원까지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자산 대부분은 부동산과 금융자산에 집중돼있다. 고령층 자산 구조 특성상 부동산 비중이 70%를 넘는 것으로 분석된다.
문제는 치매가 진행될수록 본인이 재산을 관리하기 어려워진다는 점이다. 금융 거래나 계약 체결, 병원비 지출, 생활비 관리 같은 일상적인 경제활동에서부터 어려움을 겪는 사례가 적지 않다.
가족이 대신 재산을 관리하려 해도 법적 권한이 불명확하면 금융기관 이용이나 자산 처분 과정에서 제약이 발생하기도 한다. 이 때문에 실제로 치매 고령층 자산이 장기간 방치되거나, 반대로 사기와 경제적 학대에 노출되는 사례도 많아지고 있다.
치매나 경도인지장애로 판단 능력이 저하된 고령층을 상대로 거액의 투자금을 편취하거나, 혼인과 증여를 이용해 재산을 이전받는 사건들이 발생하고 있다.
최근에는 치매 고령층을 겨냥한 조직형 투자 사기 사건도 잇따라 적발됐다. 경찰에 따르면, 한 조직은 전국 단위 지사망과 사업 설명회를 운영하며 고령층을 상대로 투자금을 끌어모았다. ‘원금 보장’이나 ‘고수익 투자’ 등을 내세워 접근한 뒤 수천억원대 투자금을 편취한 사례도 있었다.
피해자 상당수는 60~80대 고령층이었다. 범행은 인지 능력이 떨어진 노인들을 표적 삼아 이뤄졌다. 농촌 지역 고령층을 노린 범죄도 있다. 한 태양광 사기 조직은 치매 증상이 있는 노인이나 독거노인을 상대로 접근해 계약금을 받아내거나, 부동산 담보대출을 유도한 뒤 자금을 빼돌리기도 했다.
이 같은 문제를 막기 위한 대표적인 장치로 꼽히는 것이 성년후견제도다. 치매나 발달장애, 정신질환 등으로 스스로 의사결정을 하기 어려운 사람에게 후견인을 선임해 재산 관리와 법률행위를 돕는 제도다.
치매 환자 100만 시대의 그늘
보호 체계는 여전히 사후 대응
가족이나 친족, 제3자가 법원에 후견 개시를 청구하면 법원이 심리를 거쳐 후견인을 지정하는 구조다. 치매 고령층의 금융 거래와 계약 체결, 재산 처분 등을 법적으로 지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사실상 마지막 안전장치로 여겨져 왔다.
후견은 유형에 따라 나뉜다. 판단 능력이 지속적으로 부족한 경우에는 ‘성년후견’, 일부 부족한 경우에는 ‘한정후견’, 특정 사안에 대해서만 지원하는 ‘특정후견’이 활용된다.
본인이 판단 능력이 있을 때 미리 후견인을 지정하는 ‘임의후견’ 제도도 존재한다. 법원이 후견인을 선임하면 후견인은 금융 거래와 계약 체결, 병원비 지급, 재산 관리 등을 법적으로 대리할 수 있게 된다.
문제는 치매가 상당 부분 진행된 이후 가족들이 뒤늦게 후견을 신청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부모의 반복적인 현금 인출이나 부동산 계약, 투자 사기 피해 등을 겪고 난 뒤에야 후견 필요성을 인지하는 식이다.
특히 전문가들은 치매 자산 문제의 상당수가 ‘완전히 판단 능력을 잃은 상태’보다, 오히려 판단 능력이 애매하게 흔들리는 단계에서 발생한다고 지적한다.
경도인지장애나 초기 치매 단계에서는 일상 대화와 기본적인 생활은 가능하지만 금융 문제에 대한 판단이나 계약 이해 능력은 크게 떨어진다. 하지만 이 단계에서는 법적으로 본인의 의사를 최대한 존중해야 하기 때문에 가족이 재산 관리에 적극 개입하기 어렵다.
반대로 후견 개시를 신청하려 해도 법원이 판단 능력 저하 정도를 엄격하게 판단하는 만큼 실제 개시까지 시간이 걸리는 경우가 많다. 후견 절차 자체도 적지 않은 부담이다.
가족이 법원에 후견 개시 심판을 청구하면 진단서와 재산 목록, 가족관계 자료 등을 제출해야 하고, 이후 법원 심리와 감정 절차 등을 거쳐야 한다. 상황에 따라 수개월 이상 걸리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재산 피해가 계속 발생하거나 생활비·병원비 집행이 지연되기도 한다.
범죄는
느는데…
후견이 개시된 이후에도 현실적인 한계는 남는다. 후견은 기본적으로 법률행위와 재산 보호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보니, 실제 생활 속 자산 운용과 돌봄 비용 관리에까지 세밀하게 대응하기 어렵다.
예컨대 치매환자의 요양비와 생활비를 장기간 안정적으로 집행하거나, 보험·연금·부동산 등 다양한 자산을 종합적으로 관리하는 데에는 제약이 있다는 것이다.
친족 후견 구조 역시 문제로 지적된다. 현재 성년후견인의 상당수는 가족이나 친족이 맡고 있다. 물론 가족이 직접 돌보는 사례가 대부분이지만, 후견 과정이 오히려 재산 갈등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형제자매 간 의견 충돌이나 재산 처분 문제로 법적 다툼이 벌어지기도 하고, 후견인의 재산 남용 문제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 같은 문제의식 속에 최근 정부와 금융권에서는 후견 제도의 한계를 보완할 대안으로 ‘신탁’ 제도에 주목하고 있다. 치매가 상당 부분 진행된 이후 법원이 개입하는 후견과 달리, 판단 능력이 남아 있을 때 미리 자산 관리 계획을 설계할 수 있다는 점에서다.
실제로 정부도 올해 처음으로 치매 고령층 자산을 공공이 관리하는 ‘치매안심재산관리서비스’ 시범사업에 착수했다. 보건복지부와 국민연금공단이 운영하는 해당 사업은 치매 또는 경도인지장애를 가진 고령층의 현금성 자산을 공공기관이 위탁받아 관리하는 방식이다.
본인이나 가족이 신청하면 공단이 재산 현황과 생활 환경 등을 조사한 뒤 생활비·요양비·의료비 등을 포함한 재정지원 계획을 수립한다. 이후 계획에 따라 생활비와 병원비 등을 지급하는 구조다.
정부는 이를 통해 치매 고령층 재산이 본인 의사와 필요에 맞게 사용되도록 하고, 경제적 학대와 재산 공백을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특히 요양시설 입소 이후 재산이 방치되거나, 가족 갈등 속에서 생활비 지급이 어려워지는 문제 등을 줄이겠다는 취지다. 복지부는 2년간 시범사업을 운영한 뒤 2028년 본사업 도입 여부를 검토할 계획이다.
후견도 부족
신탁도 미완
민간 금융권에서도 치매신탁과 유언대용신탁 등을 확대하려는 움직임이 이어지고 있다. 치매 발생 이전에 신탁 계약을 체결하면 이후 판단 능력이 저하되더라도 미리 정한 방식에 따라 생활비와 의료비, 요양비 등을 지급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일부 전문가들은 후견이 ‘법적 대리’ 중심이라면, 신탁은 ‘사전 자산 설계’ 기능에 가깝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현장에서는 공공신탁 역시 아직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우선 현재 시범사업은 예금과 주택연금, 임대차보증금 반환채권 등 현금성 자산 위주로만 운영된다.
치매 고령층 자산 대부분을 차지하는 부동산은 사실상 제외돼있다. 실제 조사에서도 치매머니의 70% 이상은 부동산 자산으로 분석된다.
보험금과 연금 활용 제한도 한계로 지적된다. 현행 제도상 일부 사망보험금 청구권 정도만 신탁이 가능하고, 치매보험금이나 연금 수급권은 활용 범위가 제한적이다. 이 때문에 정작 치매 환자에게 필요한 간병비와 생활비, 의료비를 안정적으로 집행하는 데에는 제약이 따른다는 것이다.
진단 절차 역시 또 다른 변수다. 공공신탁이나 후견 절차 모두 기본적으로 의료기관의 치매 진단이 선행돼야 한다. 하지만 신경과 외래 예약과 MRI·PET-CT 검사 적체 등이 이어지면서 진단 자체가 늦어지는 사례도 적지 않다.
결국 전문가들은 후견과 신탁을 대체 관계가 아니라 상호 보완 관계로 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판단 능력이 남아 있을 때는 신탁을 통해 자산 관리 계획을 미리 설계하고, 이후 판단 능력이 크게 저하되면 후견인이 이를 감독하거나 보완하는 구조가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특히 우리 사회가 초고령사회에 본격 진입하면서 문제는 더 커질 가능성이 높다. 베이비붐 세대가 후기 고령층에 진입하는 시점부터 치매 고령층 자산 규모가 급격히 증가할 것으로 예상되기 때문이다.
2050년 488조 전망…커지는 잠든 자산
혼인, 유언…환자들 노린 범죄 반복
실제 정부 추산대로라면 치매머니 규모는 앞으로 20여년 사이 3배 가까이 증가하게 된다. 반면 이를 보호할 제도는 아직도 후견과 제한적인 신탁 중심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해외에서는 이미 후견과 신탁, 돌봄 체계를 함께 연계하려는 움직임이 확대되고 있다.
미국은 생전신탁과 법인 수탁 시스템을 활용해 치매 이후에도 자산 관리와 의료·돌봄 비용 집행이 이어지도록 설계하고 있다.
일본은 고령층 금융사기를 막기 위해 고액 인출 시 동의권자 확인 절차를 강화하고 있으며, 영국 역시 신뢰 관계인을 통한 금융 위임 시스템을 운영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돌봄 계획 자체를 신탁 구조에 반영해 생활 지원과 자산 관리를 함께 운영하는 방식까지 도입했다.
국내에서도 공공신탁과 후견제도를 연계하고, 보험·연금·부동산까지 포함한 종합 자산관리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특히 치매 초기 단계부터 재산관리 상담과 사전 설계를 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현재처럼 판단 능력이 상당 부분 저하된 이후에야 후견 절차에 들어가는 구조로는 현실 속 위험을 따라가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다만 제도 확대 과정에서 또 다른 과제도 남아 있다. 공공이 어디까지 개인 자산 관리에 개입할 것인지, 판단 능력 저하 여부를 누가 어떤 기준으로 결정할 것인지 등을 둘러싼 논란도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치매 진단과 의사결정 능력 판단은 의료적·법률적 해석이 동시에 필요한 영역인 만큼, 자칫 개인의 자기결정권 침해 논란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반쪽짜리
공공신탁
그럼에도 전문가들은 지금과 같은 관리 공백을 그대로 방치하기 어렵다고 입을 모은다. 후견만으로는 이미 복잡해진 초고령사회 자산 문제를 감당하기 어렵고, 공공신탁 역시 아직은 제한적인 단계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치매 머니 문제는 판단 능력이 떨어지기 시작한 이후에도 인간다운 삶을 어떻게 유지하게 할 것인지에 대한 사회 시스템의 문제에 가깝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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