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강민석 기자
삼성전자 반도체 생산라인이 총파업 예고일을 일주일 앞두고 사실상 비상 대응 국면에 들어갔다. 반도체 공정은 한 번 멈추면 재가동까지 수주가 걸리는 만큼, 파업이 현실화되기 전부터 신규 웨이퍼 투입량을 줄이고 고부가 제품 중심으로 생산 우선순위를 재편하는 이른바 '웜다운' 작업이 불가피하다는 분석이 나온다. 재계에서는 파업 피해가 삼성전자 한 곳을 넘어 협력사 생태계와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으로 번질 수 있다며 정부의 긴급조정권 검토 필요성까지 거론하고 있다.
14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노조 총파업에 따른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생산라인 운영 점검과 비상관리 체계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초기업노동조합 삼성전자지부는 오는 21일부터 다음 달 7일까지 18일간 총파업을 예고한 상태다.
업계에서는 해당 기간 직접 피해액만 20조~30조원 이상에 달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 단순 환산하면 하루 1조1000억~1조6000억원 규모의 손실이 발생할 수 있다는 계산이다.
문제는 반도체 생산이 일반 제조업처럼 파업 당일 라인을 세우거나 재가동하는 방식으로 대응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반도체는 라인 초입에 웨이퍼가 투입된 뒤 수백 개 공정을 거쳐 완제품으로 출하된다. 파업 기간 인력 공백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평소처럼 웨이퍼를 계속 투입할 경우 중간 공정에 물량이 쌓이고, 품질 관리 부담도 급격히 커질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삼성전자가 파업 전부터 신규 웨이퍼 투입량을 줄이고, HBM과 최첨단 선단 공정 등 고부가 제품 중심으로 생산 우선순위를 다시 짜야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갑작스러운 라인 중단을 막기 위한 선제적 감산 성격의 대응이다.
업계 관계자는 "전면 파업 피해를 줄이려면 파업 1주일 전부터 생산 프로세스를 조정해야 한다"며 "라인 초입에 투입하는 신규 웨이퍼 수량을 제한하고 HBM, 최첨단 선단 공정 등 단가가 높은 제품 위주로 제품 믹스를 재편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파업 18일이 한 달 공백 될 수도···재가동 리스크도 부담
사전 대응 필요성은 파업 참여 규모가 커질수록 더 커진다. 이날 기준 파업 참가 신청자는 4만3286명에 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단순한 일부 인력 이탈 수준을 넘어 생산라인 운영 전반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규모다.
더 큰 문제는 파업 충격이 노조가 예고한 18일에 그치지 않을 수 있다는 점이다. 반도체 생산라인은 공정별 장비 상태 점검, 수율 확인, 품질 검증, 고객사 납기 조정 등이 순차적으로 뒤따른다. 파업 기간 일부 공정이 멈추거나 속도가 늦어질 경우 이후 병목 현상도 불가피하다.
결국 18일간의 파업이 실제로는 한 달 이상 생산 공백으로 번질 수 있다는 우려가 뒤따른다. 김동원 KB증권 리서치본부장은 최근 보고서에서 "최악의 시나리오를 가정할 때 파업이 18일간 지속될 경우, 종료 이후에도 자동화 라인의 재가동 및 정상화 과정에 추가로 2~3주의 시간이 소요될 가능성이 크다"고 분석했다.
삼성전자가 노조를 상대로 제기한 위법 파업행위 금지 가처분 신청이 법원에서 인용되더라도 손실을 피하기 어렵다는 전망도 제기된다. 이미 파업 가능성을 전제로 생산량 조정과 공급 대응이 시작된 이상 최소 10조~20조원 규모의 손실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제조공정이 전면 중단되는 최악의 경우 피해 규모가 100조원대까지 치솟을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눈에 보이는 손실보다 신뢰 훼손이 더 치명적"
직접 손실보다 더 큰 리스크는 고객 신뢰 훼손이다. 송헌재 서울시립대 경제학부 교수는 △신뢰 자산의 소멸 △전환비용에 따른 영구적 시장 상실 △인공지능(AI) 반도체 패권 경쟁기의 기회비용 상실 △핵심 인재 이탈 △코리아 디스카운트 심화 등을 핵심 리스크로 꼽으며 "한 번 이탈한 고객은 다시 돌아오기 어렵다"고 경고했다.
삼성전자의 주요 고객사는 엔비디아, AMD, 구글, 메타 등 글로벌 빅테크와 연결돼 있다. 이들은 AI 인프라 투자 확대에 따라 HBM과 고성능 D램을 안정적으로 확보해야 한다고 한다. 공급이 빠듯한 상황에서 삼성전자의 생산 차질이 현실화되면 고객사들이 대체 공급망을 찾는 속도도 빨라질 수밖에 없다.
일각에서는 삼성전자 공급에 구멍이 생길 경우 CXMT, YMTC 등 중국 메모리 업체들이 반사이익을 노릴 수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중국 메모리 업체들은 정부 보조금과 내수 시장을 기반으로 기술 격차를 좁혀왔다. 아직 최첨단 제품 경쟁력에서는 삼성전자와 차이가 있지만, 글로벌 고객사들이 공급망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 대체 공급선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일부 레퍼런스를 확보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이번 파업이 단기 물량 차질을 넘어 중국 반도체 굴기를 앞당기는 변곡점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AI 인프라 투자 확대로 메모리 수요가 견조한 상황에서 공급 안정성은 기술력만큼 중요한 평가 요소가 되고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글로벌 고객사 입장에서는 필요한 시점에 안정적으로 공급받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며 "삼성전자가 공급 안정성에 의문을 남기면 경쟁사뿐 아니라 중국 업체들에도 기회가 생길 수 있다"고 말했다.
협력사 생태계도 직격탄을 맞을 수 있다. 삼성전자 반도체 생산 차질이 장기화되면 1754개 소재·부품·장비 협력사 전반에 가동률 하락과 고용 감소가 연쇄적으로 번질 수 있다. 삼성전자 평택캠퍼스의 경우 생산라인 1개당 협력사를 포함해 약 3만명의 고용을 창출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생산라인이 흔들리면 협력사와 지역 상권까지 함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다.
재계 "긴급조정권 검토해야"···반도체는 파업 뒤 막으면 늦다
파업이 임박하면서 재계에서는 정부가 긴급조정권 발동을 선제적으로 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삼성전자 반도체 생산라인이 멈출 경우 피해가 한 기업의 노사 갈등에 그치지 않고 협력사 생태계, 국내 수출, 세수, 자본시장,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으로 번질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긴급조정권은 노동조합 및 노동관계조정법 제76조에 근거한 예외적 조정 절차다. 쟁의행위가 국민의 일상생활을 위태롭게 하거나 국민경제를 현저히 해칠 우려가 있을 때 고용노동부 장관이 발동할 수 있다. 긴급조정이 결정되면 해당 노조는 즉시 30일간 파업 등 일체의 쟁의행위를 중단해야 하며, 중앙노동위원회가 직권 조정 절차에 착수한다.
재계가 긴급조정권을 거론하는 배경에는 반도체 산업의 파급력이 있다. 반도체는 한국 수출의 약 35%를 차지하는 핵심 산업이다. 한국개발연구원(KDI) 분석에 따르면 반도체 수출이 10% 감소할 경우 국내총생산(GDP)은 0.78% 줄어들 수 있다. 여기에 삼성전자가 국내 유가증권시장 시가총액의 4분의 1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파업 충격이 생산라인을 넘어 한국 자본시장 전반의 불안으로 확산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한 반도체 전문가는 "노사 자율 협의가 우선이라는 원칙은 존중돼야 하지만, 이번 사안은 461만 소액주주의 자산, 1700여 협력사의 생계, 글로벌 반도체 공급망의 안정성이 모두 걸린 문제"라며 "이미 노조 측이 협상 테이블을 박차고 강경 투쟁을 예고한 상황에서 자율 해결만 기대하기 어렵다면 정부가 긴급조정권이라는 법적 장치를 적극 검토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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