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국립극장의 밤은 늘 깊은 울림으로 시작된다. 오는 6월 6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는 한 소리꾼이 오랜 시간 축적해온 내공과 해석이 온전히 펼쳐지는 무대가 마련된다. 국립창극단이 이어온 ‘완창판소리’ 시리즈는 판소리의 본질을 가장 충실하게 드러내는 형식으로 자리 잡았고, 그 흐름 속에서 박성희 명창의 ‘수궁가’는 다시 한번 전통과 현재가 교차하는 긴 호흡의 공연으로 관객을 맞이할 준비를 마쳤다. 무대는 한 편의 공연을 넘어, 소리꾼 개인의 시간과 한국 전통음악의 맥락이 응축된 결과물을 선보인다.
완창판소리는 소리꾼이 한 바탕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끌어가는 형식으로, 그 자체로 극한의 집중력과 체력을 요구하는 장르다. 발췌나 축약 없이 서사의 흐름 전체를 감당해야 하기에, 창자의 호흡 조절과 감정 운용, 그리고 이야기의 흐름을 조율하는 능력이 긴밀하게 맞물린다. 긴 시간 동안 이어지는 소리의 흐름은 관객에게도 깊은 몰입을 요구하며, 그 과정에서 형성되는 긴장과 이완의 반복은 공연의 밀도를 더욱 끌어올린다. 이처럼 완창은 소리꾼과 관객이 같은 시간을 공유하며 만들어가는 체험으로 기능한다.
박성희 명창의 예술 여정은 일정한 궤도를 따라가기보다 여러 갈래를 거쳐 형성된 독특한 이력을 보여준다. 어린 시절 김소희 명창에게서 소리를 배우며 재능을 드러냈지만, 이후에는 국악 이론과 타악 연주로 관심을 확장하며 다른 길을 경험했다.
삶의 전환은 예기치 않은 시점에 찾아왔다. 1993년 첫 아이를 출산한 이후, 박성희 명창은 다시 판소리의 매력에 깊이 빠져들었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소리꾼의 길을 선택하게 된다. 이후 전정민 명창을 스승으로 삼아 전통의 맥을 이어받으며 소리의 깊이를 더해갔다. 다양한 경험을 거쳐 다시 돌아온 판소리는 이전보다 더 단단한 기반 위에서 성장했고, 이는 박성희 명창의 소리에 축적된 시간의 결을 더욱 선명하게 만들었다.
이번 무대에서 선보이는 ‘수궁가’는 판소리 다섯 바탕 가운데서도 해학과 긴장, 그리고 기지가 조화를 이루는 작품이다. 병든 용왕을 위해 자라가 토끼를 데려오는 이야기 구조 속에서, 토끼가 위기를 벗어나는 과정은 서사의 핵심을 이룬다. 이미 널리 알려진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판소리에서는 창자의 해석과 표현에 따라 전혀 다른 감정의 흐름이 형성된다.
박성희 명창이 선택한 미산제 ‘수궁가’는 동편제의 강건한 소리 위에 서편제의 섬세한 감성이 더해진 형태로 알려져 있다. 송흥록에서 시작된 계보가 박초월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며 형성된 유파는 힘 있는 통성과 또렷한 성음이 중심을 이루면서도, 감정의 진폭을 넓히는 특징을 지닌다. 이러한 구조는 소리의 긴장감을 유지하면서도 서사의 감정선을 풍부하게 확장시키는 역할을 한다.
이 유파는 전통을 유지하는 동시에 각 명창의 해석이 더해지며 끊임없이 변화해왔다. 박성희 명창 역시 그 흐름 속에서 자신의 소리를 구축해왔으며, 상청과 하청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운용을 통해 폭넓은 표현력을 보여준다. 이는 단순한 기교를 넘어, 이야기의 흐름을 입체적으로 구성하는 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
부산에서 활동해온 그의 이력 또한 주목할 만하다. 판소리의 중심지로 여겨지지 않았던 환경 속에서 꾸준히 무대를 지켜온 경험은, 스스로 길을 개척해온 시간과 맞닿아 있다. 지역적 한계를 넘어 축적된 경험은 그의 소리에 독특한 색을 더하며, 이번 국립극장 무대에서 더욱 또렷하게 드러날 것으로 보인다.
고수의 존재는 공연의 완성도를 좌우하는 핵심 요소다. 북 장단은 소리의 흐름을 지탱하며, 창자의 호흡과 긴밀하게 맞물린다. 이번 공연에는 신문범과 조용안이 함께하며, 각각 교육 현장과 무형유산 계승의 경험을 바탕으로 안정적인 장단을 제공한다. 두 고수가 만들어내는 리듬은 소리의 흐름을 단단하게 받치며 공연의 긴장감을 유지시킨다.
해설을 맡은 성기련 교수는 긴 공연 시간 동안 관객이 서사를 따라갈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수행한다. 완창판소리는 익숙하지 않은 관객에게는 접근이 쉽지 않은 형식일 수 있지만, 적절한 해설은 작품의 이해를 돕고 감상의 깊이를 확장시킨다. 이러한 구성은 전통 공연의 문턱을 낮추면서도 작품의 본질을 유지하는 데 기여한다.
‘완창판소리’ 시리즈는 1984년 시작된 이후 4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어져온 국립극장의 대표 기획이다. 300회가 넘는 공연이 축적되며 하나의 전통으로 자리 잡았고, 판소리의 원형을 유지하는 동시에 현대 관객과의 접점을 넓혀왔다. 이 시리즈는 단순한 공연 프로그램을 넘어, 전통예술의 지속성을 보여주는 사례로 평가된다.
이 무대는 소리꾼에게 있어 중요한 이정표로 기능한다. 완창을 통해 자신의 해석과 기량을 온전히 드러내야 하기에, 그 과정은 곧 예술적 성취를 입증하는 자리로 이어진다. 동시에 관객에게는 판소리의 전모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로 작용하며, 긴 시간 동안 이어지는 소리의 흐름 속에서 깊은 몰입을 유도한다.
박성희 명창에게 이번 공연은 네 번째 ‘수궁가’ 완창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같은 작품을 반복해온 시간은 그의 소리에 축적된 변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으며, 이전과는 다른 결의 해석을 만들어낸다. 이는 반복이 아니라 확장의 과정으로 읽히며, 매 공연마다 새로운 감각을 형성한다.
박성의 명창은 이번 무대를 통해 후배들에게 길을 비추는 선배로 남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냈다. 한 사람의 무대가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통로로 기능하는 순간, 전통은 단절되지 않고 이어진다. 완창판소리는 그 자체로 전승의 형식이며, 무대 위에서 이어지는 시간은 미래를 향한 연결로 확장된다.
판소리는 여전히 현재의 예술로 존재한다. 과거의 형식을 유지하면서도 매 공연마다 새롭게 구성되며, 창자의 해석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한다. 같은 ‘수궁가’라도 오늘의 소리는 오늘의 감각으로 완성되며, 그 차이는 현장에서만 체감할 수 있는 경험으로 남는다.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펼쳐질 이번 공연은 기록으로 환원되기 어려운 순간의 예술이다. 현장에서 공유되는 호흡과 긴장, 그리고 해소의 과정은 오직 그 자리에서만 완성된다. 박성희 명창의 소리는 그 시간을 관통하며 관객에게 깊은 여운을 남길 것으로 기대된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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