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역사·시간 겹치는 칠판 회화…지우고 쌓으며 완성한 삶의 기록
유화·드로잉·칠판화 50여 점…김명희 반세기 작업 세계 조망
(서울=연합뉴스) 박의래 기자 =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며 시간이 쌓여있는 칠판을 캔버스 삼아 지나간 시간을 불러내 복원하는 작가 김명희(77) 개인전 '깊은 시간'이 갤러리현대에서 열리고 있다.
1970년대 캔버스 유화 작업부터 1980년대 목탄 드로잉, 1990년부터 시작된 칠판 회화와 최근작까지 50여 점을 통해 반세기 넘는 작업 세계를 조망하는 회고전 성격의 전시다.
김명희는 1990년 강원 춘천 내평리의 폐교에서 칠판을 발견하면서 칠판을 주요 매체로 삼아 작업하고 있다.
그는 한글 문장이나 수학 공식이 반쯤 지워진 칠판 위에 오일 파스텔을 사용해 인물과 사물을 그린다.
칠판의 판서 흔적은 개인의 기억과 집단의 역사, 현재와 과거가 중첩되는 구조를 만든다. 어두운 표면 위에 얹히는 오일 파스텔의 점과 선은 빛처럼 축적되며, 이미지가 부유하는 듯한 효과를 낸다.
김명희는 작가 노트에서 "내 그림은 과거에 대한 향수가 아닌 현실의 문제, 특히 제자리를 벗어난 삶의 상태(디스로케이션·Dislocation)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나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라며 삶과 작업의 긴밀한 관계를 강조해왔다.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차경, 봄·여름·가을·겨울' 연작은 뉴욕 작업실에서 제작한 것으로 작가의 기억 속 내평리 숲 연못의 사계절을 보여준다.
기억 속 내평리의 풍경은 단순한 기억의 재현을 넘어 작가에게 축적된 시간의 감각을 환기한다.
김명희는 "눈 속에서 솟은 풀을 본 날이 봄이고, 광야가 열리는 날이 여름, 울(울타리) 안으로 들어갈 준비하는 가을, 울 안에서 추위를 견디는 날이 겨울"이라고 적었다.
2025년 작 '김치 담그는 날'은 그림 안에 액정표시장치(LCD) 화면을 넣은 이중 스크린 구조다.
그림 속 주인공은 집 안에서 부엌일에 집중하고 있고, 왼쪽에는 작가의 노마드적 삶을 은유하는 지구본이, 배경에는 조선 시대 순조의 딸 복온 공주가 한글로 쓴 오륜행실도가 쓰여 있다. 화면 중간에는 LCD 모니터를 넣고, 비 내리는 영상을 재생시켰다. 정지된 회화와 흐르는 영상을 통해 일상의 장면과 내면의 사유를 동시에 드러낸다.
김명희는 서울 출생으로 서울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뉴욕으로 건너가 프랫 인스티튜트 대학원을 다녔다.
1990년 한국으로 돌아와 춘천에 있는 폐교를 개조해 작업실을 꾸리고 뉴욕의 소호와 춘천을 오가며 작업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국립현대미술관, 대한민국 국회, 서울시립미술관 등 주요 기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전시는 6월 14일까지.
laecorp@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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