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프저신’, ‘저프고신’ 가짜 심리학의 환상
노트북 화면 옆에 출력해 둔 상담 결과지를 펼쳐본다.
빼곡한 글씨 사이로 빨간 펜으로 동그라미를 쳐둔 낯선 단어가 눈에 띈다. ‘고프저신(고프레임 저신뢰감)’. 상담사는 내 연애가 실패한 이유를 이 네 글자로 명쾌하게 진단했다. 매력과 주도권은 높았지만, 상대에게 안도감을 주는 신뢰가 부족해서 관계가 부러졌다는 뜻이라고 했다.
반대 상황인 ‘저프고신(저프레임 고신뢰감)’이나 ‘저프저신’ 같은 조합어들도 표처럼 정리되어 있다. 마치 병원에서 혈액 검사 결과를 받아든 것처럼, 알 수 없는 안도감이 밀려온다. 내 복잡하고 진흙탕 같았던 이별에 드디어 명확한 병명이 붙은 것만 같다.
얄팍한 사분면이 주는 위안
재회 업체들이 가장 즐겨 쓰는 이 조합어들은 사람의 마음을 네 개의 칸으로 나눈 조잡한 사분면이다.
매력(프레임)과 믿음(신뢰감)이라는 두 가지 축을 세워두고, 모든 연애의 흥망성쇠를 이 표 안에 구겨 넣는다. 혈액형별 성격 테스트나 MBTI의 맹신과 다를 바 없는 구조다. 하지만 이별 직후 극심한 혼란에 빠진 사람에게 이 가짜 정밀함은 엄청난 위력을 발휘한다.
이별은 본질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재난이다. 왜 헤어졌는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도무지 알 수 없어 밤새 머리를 뜯으며 괴로워한다. 이때 누군가 나타나 ‘고프저신’이라는 그럴싸한 전문 용어로 상황을 규정해 주면, 뇌는 이 혼돈이 통제 가능한 문제로 바뀌었다고 착각한다. 원인을 알았으니 이제 해답만 찾으면 된다는 논리적 오류에 기꺼이 몸을 던지게 된다.
인간을 수치화하는 오만
이 기형적인 용어들이 지닌 가장 큰 함정은 인간의 감정을 RPG 게임의 능력치처럼 다룬다는 점이다.
그들의 이론에 따르면, 연애는 지능이나 체력 스탯을 찍듯 프레임과 신뢰감 수치를 적절히 조절하는 게임이 된다. 프레임이 낮아서 차였다면 질투 유발로 매력 스탯을 올리고, 신뢰감이 낮아서 차였다면 장문의 사과 문자로 신뢰 스탯을 채우면 그만이다.
하지만 사람 사이의 역사는 사운드 믹서의 볼륨 다이얼처럼 독립적으로 조절되지 않는다. 어제 크게 다퉈서 신뢰가 바닥을 쳤어도, 오늘 아침 출근길에 무심코 건넨 따뜻한 커피 한 잔에 묘한 매력을 느끼고 다시 마음이 녹아내리는 게 사람이다. 매력과 믿음, 서운함과 애틋함은 수백 가지의 맥락 속에서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이것을 무 자르듯 두 개의 변수로 쪼개어 수치화할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인간 내면에 대한 지독한 무지다.
정답이라는 환상을 파는 비즈니스
업체들이 이토록 조잡한 단어 조합에 집착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문제가 공식의 형태를 띠어야만, 그 공식을 푸는 정답지를 비싸게 팔아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담자를 ‘고프저신’ 환자로 낙인찍고 나면, 그다음 순서는 정해져 있다. 신뢰감을 높이기 위한 2차 지침 문자를 구매하라고 유도한다. 상대방이 예상과 다르게 반응하면, 이번에는 프레임 관리에 실패했다며 또 다른 처방전을 들이민다.
용어가 복잡하고 분석이 정교해 보일수록 내담자는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잃는다. 상대의 표정 변화나 말투에 담긴 진짜 의미를 헤아리려 노력하는 대신, 상담사가 내려준 프레임과 신뢰감이라는 가짜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본다. 한때 서로의 밑바닥까지 공유했던 고유한 인연은 온데간데없고, 오직 스탯을 맞추기 위한 차가운 기계적 대응만 남는다.
형광펜으로 밑줄을 그어둔 결과지를 조용히 반으로 접는다.
마음의 상실을 몇 개의 한자어 조합으로 명쾌하게 설명해 준다는 그들의 진단서는 참으로 달콤하고 편리하다. 부족한 수치를 채워 넣기만 하면 언제든 끊어진 인연의 스위치를 다시 켤 수 있을 것처럼 사람을 홀린다.
그렇게 그들이 짜놓은 얄팍한 사분면의 틀에 맞춰, 나의 매력을 계산하고 당신의 신뢰를 연기하며 기어코 재회의 공식을 풀어냈다고 치자.
수많은 맥락과 진심을 소거한 채 오직 ‘고프저신’이라는 꼬리표를 떼어내기 위해 조립된 그 앙상한 관계 안에서, 당신은 과연 예전처럼 무장해제된 얼굴로 상대를 마주 보며 웃을 수 있겠는가.
By. 나만 아는 상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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