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 이래 부침을 거듭해온 남북관계의 최악의 형태는 '통일지향적인 적대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쌍방이 적대성에 기초해 통일을 지향한다는 것은 상대를 제거하고 자신의 체제로 통일하겠다는 의미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최악의 형태는 1950년 조선(북한)의 전면 남침으로 발현된 바 있고, 이후로도 남북관계에 잠재된 문제였다.
이에 반해 최선의 형태는 '통일지향적인 우호 관계'를, 차악은 '적대적 두 국가'를, 차선은 '우호적이고 평화적인 두 국가'를 뽑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관계라는 것이 적대와 우호로 양분할 수만은 없다는 점에서 이들 사이에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도 이렇게 네 가지로 모델링을 해본 이유는 최선은 차차 모색하더라도 우선 차선부터 도모하자는 주장을 펴기 위함에 있다.
일단 최악으로 치달았던 남북관계가 다소나마 풀릴 조짐을 보이고 있다. 2019년 이래 악화되기 시작한 남북관계는 윤석열 정부의 '자유의 북진론'과 김정은 정권의 '적대적 두 국가론'이 강하게 충돌하면서 날개없는 추락을 거듭했었다. 다행히 내란 세력이 '빛의 혁명'에 힘입어 퇴출당하고 새로운 정부가 남북관계의 안정화를 추구하면서 전쟁 위기 자체는 크게 수그러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이 최근 개정한 헌법이 주목을 끈다. 3월 하순 최고인민회의에서 개정한 헌법에는 대한민국이라는 표현이 딱 한번 등장한다. 영토 규정을 신설하면서 "북쪽으로 중화인민공화국과 로씨야(러시아)련방, 남쪽으로 대한민국과 접하고 있는 영토와 그에 기초하여 설정된 영해와 영공을 포함한다"라는 대목에서만 언급한 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의미를 품고 있는 이유는 김정은 위원장의 과거 발언에서 찾을 수 있다. 김 위원장은 2024년 1월 15일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한국을 "철저한 타국으로, 가장 적대적인 국가로 규제한 이상" 이를 정확히 규정짓는 헌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했었다. 또 "전쟁이 일어나는 경우 대한민국을 완전히 점령, 평정, 수복하고 공화국 영역에 편입시키는 문제를 반영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본다"고 밝혀, 전시 무력통일론을 헌법에 포함할 뜻도 밝혔었다.
아울러 "불법 무법의 북방한계선을 비롯한 그 어떤 경계선도 허용될 수 없으며 대한민국이 우리의 영토·영공·영해를 0.001㎜라도 침범한다면 그것은 곧 전쟁 도발"이라며, "헌법의 일부 내용을 개정할 필요가 있다"고도 덧붙였었다.
하지만 이번에 확인된 개정 헌법에는 이런 내용이 전혀 담겨 있지 않다. 조선의 다른 언술체계에서도 한국을 "불변의 제1 적대국"이라고 규정한 것이 누그러질지는 두고 봐야겠지만, 일단 헌법에는 적대적인 취지를 담은 표현을 일체 사용하지 않은 것은 분명 주목할 만하다.
물론 조선이 '두 국가'를 포기할 의사가 없다는 점을 이번 헌법에도 명시한 셈이어서 남북관계의 간극은 여전히 멀다. 하지만 남북관계의 가장 본질적인 문제인 적대성을 완화하면서 평화공존을 도모할 수 있는 가능성은 조금이나마 가까워졌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조선의 국가성을 인정하는 방향으로 한걸음씩 움직인다면, 적대적 관계에서 일반적인 관계로, 일반적인 관계에서 평화적이고 우호적인 관계로 바꿔나갈 수 있는 여지를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공식 국호 사용은 그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해 작지만 의미 있는 경험을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다. 필자를 포함한 한국 응원단은 호주 동포들과 함께 3월 9일에 호주에서 열린 조선과 중국의 여자축구 경기에서 "조선 이겨라"를 힘껏 외치면서 응원한 적이 있다. 그러자 경기 후에 조선 선수들이 우리 응원단을 향해 인사했고, 선수단은 호주 동포를 통해 한국 응원단에 감사의 뜻도 전해왔다.
그리고 5월 20일 7시에는 수원종합운동장에서 수원FC 위민과 평양의 내고향여자축구단이 준결승을 치를 예정이다. 이 소식을 접한 많은 시민사회단체들과 시민들은 공동 응원을 준비하고 있다. 승패를 떠나 멋진 경기를 해달라고 양팀 모두를 응원할 예정이다.
치열한 승부를 펼치는 스포츠 경기에서 화해와 평화의 가능성을 찾는 것이 스포츠의 매력이 아닐까 한다. 모처럼 그 매력을 발산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선수들이 공을 차는 90분이, 그 선수들을 뜨겁게 응원하는 우리들의 시간이, 정치가 수십 년째 풀지 못한 것을 조금씩 녹여가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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