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컬처 이준섭 기자] 국립극장이 또 한 번 무대의 문턱을 낮춘다. 이번에는 비극이 아닌 희극이다. 장애와 비장애, 음성언어와 수어, 배우와 관객의 거리를 유쾌한 웃음 속에서 허무는 연극 '당신 좋을 대로'가 5월 28일부터 31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관객과 만난다.
작품은 셰익스피어의 대표 희극 '좋으실 대로(As You Like It)'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사랑과 오해, 추방과 화해가 뒤섞인 원작의 구조를 유지하면서도 오늘의 감각과 동시대적 시선으로 재구성했다. 무엇보다 국립극장 무장애 공연 최초의 본격 코미디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동안 국립극장 무장애 공연은 장애 당사자의 현실과 사회 구조를 정면으로 다루는 작품들에 집중해 왔다. 음악극 '합★체', 연극 '틴에이지 딕'과 '맥베스', '헌치백' 등이 대표적이다. 대부분 묵직한 질문과 긴장감 있는 서사를 중심으로 전개됐다. 반면 '당신 좋을 대로'는 웃음과 사랑, 장난과 유희를 전면에 내세운다. 접근성을 보완하는 차원을 넘어 누구나 함께 즐기는 극장 경험 자체를 목표로 한다.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유랑극단’이라는 형식이다. 무대 위에는 단 7명의 배우가 등장하지만, 이들은 극 중 20여 명의 인물을 쉼 없이 오가며 연기한다. 누군가는 배우이자 해설자가 되고, 또 다른 순간에는 광대나 귀족, 연인과 하인이 된다. 배우들이 무대 위에서 직접 역할을 갈아입고 변신하는 과정은 이야기의 일부가 된다. 관객은 극을 감상하는 동시에 극이 만들어지는 순간을 함께 목격한다.
여기에 원작에는 없는 ‘해설자’가 새롭게 등장한다. 해설자는 유랑극단의 단장처럼 극 전체를 조율한다. 때로는 연출가처럼 배우들의 움직임을 정리하고, 때로는 관객에게 상황을 설명하며 극 안팎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셰익스피어 희극 특유의 장난스러운 메타극 형식이 한층 선명해지는 지점이다.
연출은 양손프로젝트의 박지혜가 맡았다. 박 연출은 고전을 오늘의 언어로 다시 번역해내는 작업으로 꾸준히 주목받아온 창작자다. 그는 이번 작품에서 배우 개인의 신체 조건과 언어 습관, 움직임과 호흡 자체를 공연의 중요한 요소로 끌어올렸다. 장애와 비장애를 구분의 기준으로 두지 않고, 서로 다른 몸이 만들어내는 리듬과 속도를 공연의 문법으로 활용한 것이다.
작품 속 사랑은 연인 간 감정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손을 내밀고, 상대의 속도에 맞춰 움직이는 행위 전체가 사랑의 표현으로 확장된다. 무대 위 배우들은 서로의 몸짓과 호흡을 끊임없이 살피며 장면을 이어간다. 관객은 그 과정을 통해 관계란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체감하게 된다.
장애인 배우 최초로 백상예술대상 연극 부문 연기상을 받은 하지성은 올랜도 역으로 무대에 오른다. 형의 억압에서 벗어나 사랑을 향해 달려가는 인물이다. 2023년 '틴에이지 딕'에서 강렬한 존재감을 보여준 그는 이번 작품에서는 보다 밝고 유연한 얼굴로 변신한다. 하지성의 몸짓은 올랜도의 순수함과 열정을 더욱 생생하게 드러낸다.
로잘린드 역은 코다(CODA) 배우 장혜진이 맡았다. 그는 수어를 모어처럼 사용해온 경험을 바탕으로 음성과 수어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연기를 선보인다. 남장을 한 채 사랑을 시험하는 로잘린드의 장난기와 복합적인 감정이 몸 전체의 표현으로 이어진다. 음성언어만으로는 전달하기 어려운 감정의 결이 수어와 표정, 움직임 안에서 살아난다.
이번 공연에서 수어는 통역 수단에 머물지 않는다. 극의 중요한 유머 장치로 기능한다. 누군가 수어를 잘못 이해해 엉뚱한 의미가 전달되기도 하고, 이를 다시 통역사가 음성언어로 바꾸는 과정에서 예상치 못한 웃음이 발생한다. 언어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어긋남을 긴장이나 불편이 아닌 유쾌한 에너지로 전환한 셈이다.
국립극장은 이를 위해 배역별 전담 수어 통역사 4명을 배치했다. 일반적인 무장애 공연처럼 한 명의 통역사가 전체 공연을 전달하는 방식이 아니다. 각 인물의 감정선과 말투, 속도까지 세밀하게 표현하기 위해 캐릭터별로 통역 방식을 달리했다. 수어 역시 하나의 연기이자 공연 언어로 인정한 결과다.
무대 디자인 역시 접근성과 유희성을 동시에 고려했다. 유럽 유랑극단의 이동식 무대에서 영감을 얻은 공간 구조는 배우들이 객석과 무대를 자유롭게 오갈 수 있도록 설계됐다. 경사로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휠체어 이동과 동선의 제약을 줄였고, 배우들은 객석 사이를 누비며 관객과 직접 호흡한다. 공연장은 관람 공간을 넘어 모두가 함께 머무는 광장처럼 변한다.
사운드 작업도 독특하다. 일렉트로닉 뮤지션 카입과 폴리 사운드 디자이너 박준오가 참여해 배우들이 직접 만드는 소리를 적극 활용했다. 발소리와 숨소리, 손짓과 움직임이 효과음이 되고 음악이 된다. 이는 배우의 몸 자체를 공연의 중심에 놓겠다는 연출 의도와도 맞닿아 있다.
무장애 공연을 완성하기 위한 준비 과정 역시 세심했다. 제작진과 배우들은 창작 초기부터 장애 인식 개선 교육과 신체 워크숍을 함께 진행했다. 각자의 움직임과 속도, 유머 감각을 공유하며 서로의 몸을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다. 또 장애인과 비장애인 관객을 대상으로 사전 낭독회를 열어 이야기 전달 방식과 접근성을 반복 점검했다.
이 과정 전체는 다큐멘터리 감독 이지현에 의해 영상으로 기록되고 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배우가 함께 창작 과정을 조율하는 장면, 서로의 언어를 익혀가는 시간이 모두 담긴다. 향후 이 기록은 국내 무장애 공연 제작 사례로 활용될 예정이다. 공연 기록을 넘어 한국 공연예술계의 새로운 창작 모델을 축적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당신 좋을 대로'가 던지는 가장 큰 메시지는 ‘특별한 배려’가 아니라 ‘함께 존재하는 방식’에 가깝다. 누군가를 위한 공연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공연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장애인 배우의 출연 자체를 이벤트처럼 소비하지 않고, 각자의 몸과 언어를 공연 미학의 일부로 자연스럽게 녹여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셰익스피어가 그려낸 아르덴 숲은 권력과 규범에서 벗어난 공간이었다. 국립극장의 '당신 좋을 대로' 역시 현실의 경계를 잠시 내려놓게 만든다. 음성과 수어, 장애와 비장애, 배우와 관객이 뒤섞인 무대 위에서 관객은 새로운 방식의 공존을 경험하게 된다. 웃음 속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결국 오늘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어가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뉴스컬처 이준섭 rhees@nc.p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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