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 한 줄 평
“곳곳에서 시를 채굴하다가 나에게서 멈추었다.”
▲시 한 편
<초원의 지퍼를 열고> - 신새벽
시간의 한 귀퉁이 허물어져 갈 때, 뜨거운 불
화엄의 세계 속 바라보고 계시는 중인가요
먹물로 물들던 검은 눈동자
붓으로 경전을 쓰던 손목이 불을 쥐고 있네요
숲 저쪽의 빛은 허방
타닥타닥 튀어 오르는 소나무 이파리는
당신의 흰 눈썹처럼 사그라지고
오색 만장에 써놓은 검은 글씨는
시린 하늘 아래 눈물이 되어 흩어지네요
뜨겁고 차가웠던 삼매(三昧)
오랜 수행의 시간이 폭죽처럼 터지고 있네요
빈 항아리 속 허공엔 지긋한 미소를 품고
새로운 거처에 여장을 풀었네요
이제 지퍼를 닫을까요
▲시평
‘초원의 지퍼를 열고’라니, 이 시는 제목부터 눈길을 끈다. 초원은 본래 숲처럼 닫혀 있거나 도시처럼 구조화되지 않은 경계가 흐린 공간이다. 그런 곳에 ‘지퍼’라는 장치가 달리는 순간 연속된 공간은 분할되고, 초원은 무대의 막처럼 여닫을 수 있는 인위적인 공간으로 변한다. 초원의 지퍼는 다른 세계와의 경계이면서 통로가 된다. 지퍼는 두 세계를 여닫는 인터페이스(interface), 시의 화자는 그 지퍼를 다루는 존재로 자리한다.지퍼는 가로가 아닌 세로, 보통 위에서 아래로 열게 되어 있다. 녹색 화면의 강렬한 세로줄, 그런 점에서 이 시는바넷 뉴먼의 그림을 떠올리게 한다. 초현실주의 색면회화 화가인 바넷 뉴먼은 ‘지퍼(zips)’라고 지칭한 얇은 수직선으로 구분된 색상 영역을 특징으로 한다. 그 그림 앞에 서면, 그림뿐 아니라 하나의 공간을 경험할 수 있다. 지퍼로 분리된 세계지만 하나의 그림이면서 동시에 존재가 서 있는 자리라 할 수 있다. 이 시의 화자도 초원 앞에 서자, 불교(화엄)의 세계로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부분과 전체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부분은 전체에 속해 있고, 전체는 부분 없이 존재할 수 없다. 바넷 뉴먼의 그림은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 즉 하나가 곧 여럿이고, 여럿이 곧 하나라는 <화엄경>의 세계와 맞닿아 있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화엄의 세계”를 엿보던 화자는 그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새로운 경험을 한다. 불가에서는 화자가 그 자리에 서 있는 것도, 그 세계에 몰입하는 것도 우연이 아닌 연기(緣機)에 의한 것으로 본다. 사실 이 시는 한 수행자의 생애가 다비를 통해 완결되는 순간이다. 그런 해석이 더 개연적이다. 시 전반부는 경전을 필사하고, 사유하고, 내면을 들여다보던 수행자의 시간이다. 열반에 든 이후 화엄은 화염이 되어 “불을 쥐고”, 다비의 순간 “저쪽의 빛은 허방”이 된다. “소나무 이파리”는 노승의 “흰 눈썹”, “오색 만장”은 장례 의식, “삼매”는 살아생전의 수행 방식이다. 또 “빈 항아리”는 공(空), “새로운 거처”는 열반의 세계를 의미한다. 다비식이 끝나자, “이제 지퍼를 닫을까요” 묻는다. 지퍼는 이쪽과 저쪽의 세계를 여닫는 장치, 이를 주관하는 건 이 시의 화자다. 따라서 인간은 경험의 존재가 아니라 세계를 여닫는 존귀한 존재다. 우리는 지금 어떤 세계를 열어 두고 있을까.(김정수 시인)
▲김정수 시인은…
199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 『사과의 잠』 『홀연, 선잠』 『하늘로 가는 혀』 『서랍 속의 사막』과 평론집 『연민의 시학』을 냈다. 경희문학상과 사이펀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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