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데이신문 김재현·송수원 인턴기자】 “당신은 자신이 누구인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그리고 세상이 세상의 관념이 아닌, 당신 자신을 상대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1960년대 흑인 민권운동의 한복판에서 자신의 존재를 지우려는 세상에 맞서 싸우던 작가 제임스 볼드윈이 한 말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성소수자의 일상은 아직 이 말을 실현할 수 있는 조건 위에 놓여 있지 않다.
화장실에 들어갈 때, 자기소개서를 쓸 때, 면접장에서 질문을 받을 때, 자신의 당연한 일부를 드러내는 것이 망설여지는 사회. 누군가에게는 익숙한 일들이 어떤 이들에게는 매번 고민과 선택을 요구하는 순간이 된다. 성소수자 청소년들은 학교에서 친구들과 어울리고, 수업에 참여하고, 진로를 고민하는 평범한 순간에도 자신의 정체성을 숨길지 드러낼지를 저울질해야 한다.
인식은 분명 과거보다 나아졌다. 그러나 제도와 현실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유럽 다수 국가들이 차별금지법과 제도적 보호를 통해 성소수자의 일상 안정성을 보장해온 것과 달리 한국은 여전히 법적 공백 속에서 개인이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영국, 독일, 캐나다, 호주 등 대부분의 유럽 및 영미권 국가들은 이미 오래전 차별금지법을 만들어 성소수자의 일상을 제도로 보호했다. 한국은 발의된 지 20년째 그 법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 불안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이 같은 현실은 국가인권위원회가 지난해 발표한 ‘성적 지향·성별 정체성에 따른 차별 실태조사’에서 수치로 다시 확인된다. 2014년 이후 약 10년 만에 실시된 이번 조사는 설문과 심층면접을 통해 성소수자들이 일상과 교육, 노동 현장에서 겪는 차별과 배제의 구조를 분석했다.
해당 조사는 최근 5년간 한국에 거주했고 스스로 성소수자로 정체화하는 만 19세 이상 성인과 만 16~18세 청소년을 대상으로 지난해 7월 8일부터 28일까지 3주간 온라인 설문조사로 진행됐다. 그 결과 응답자 중 20대 이상 성소수자인 2495명은 일상 속 차별 경험은 과거 조사에 비해 일부 개선됐으나 여전히 적지 않은 수준이라고 답했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이들 응답자 중 27.1%가 최근 1년간 일상생활에서 차별을 경험했다고 응답했다. 이는 과거 조사에서 나타난 35.6%에 비해 감소한 수치로, 일정 부분 개선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약 4명 중 1명 이상이 차별을 경험하고 있다. 특히 성소수자 집단별로 보면 격차는 더욱 뚜렷하다. 트랜스젠더 응답자의 경우 41.6%가 차별을 경험했다고 답해, 전체 평균을 크게 웃돌았다. 반면 남성 동성애자·양성애자는 18.8%, 여성 동성애자·양성애자는 21.2%로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을 보였다.
이 같은 결과는 차별이 전반적으로 감소하는 흐름 속에서도 특정 집단에는 여전히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시사한다. 트랜스젠더 집단의 높은 수치는 사회적 인식과 제도적 보호가 아직 충분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또한 성소수자 차별 문제가 여전히 일상 속에서 반복적으로 발생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어떤 집단에서 어떤 형태의 차별이 지속되고 있는지에 대한 보다 정밀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점을 시사한다.
응답자 중 성인에서는 45.8%(1095명), 청소년에서는 69.0%(303명)가 우울 증상이 의심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성소수자에 대한 혐오표현을 접하게 되는 경로로 ‘페이스북,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 SNS’가89.1%에 달했다. 이는 대부분의 응답자가 SNS를 통해 혐오표현을 접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어 ‘유튜브·틱톡 등 동영상 플랫폼’이 77.8%, ‘뉴스·인터넷 기사 등 언론’이 75.4%, ‘온라인 기사 댓글’이 75%로 나타나, 디지털 기반 플랫폼 전반에서 혐오표현이 광범위하게 유통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없음’(3.3%) 응답은 매우 적어, 대부분의 응답자가 어떤 형태로든 혐오표현에 노출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결과는 성소수자 혐오표현이 일상적인 미디어 소비 과정 속에서 반복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SNS와 댓글 문화처럼 즉각적이고 익명성이 보장되는 플랫폼에서 높은 비율이 나타난 점은 규제의 어려움과 함께 혐오표현이 빠르게 확산되는 구조적 특징을 반영한다.
이처럼 혐오표현이 일상적으로 노출되는 환경은 실제 삶의 중요한 영역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고용·노동 영역에서는 개인의 정체성이 구직 과정에 실질적인 변수로 작용하고 있었다.
최근 5년간 구직활동 경험이 있는 성소수자 응답자 1943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정체성이 취업 과정에 영향을 미쳤다는 응답이 적지 않았다. 전체 응답자 중 13.4%는 ‘매우 영향을 미쳤다’, 25.8%는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고 답해, 약 39.2%가 구직 과정에서 자신의 성적 지향이나 성별 정체성이 영향을 미쳤다고 인식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집단 간 격차도 뚜렷했다. 트랜스젠더 응답자의 경우 ‘매우 영향을 미쳤다’는 응답이 34.3%로, 다른 집단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았다. 여기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36.3%)까지 포함하면 약 70% 이상이 구직 과정에서 정체성의 영향을 체감한 셈이다. 이는 성소수자 내부에서도 차별 경험이 균등하지 않으며 특정 집단에 더 집중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가장 비율이 낮은 여성 동성애자·양성애자 집단에서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응답이 42.7%로 가장 높게 나타나 상대적으로 영향 체감이 낮은 경향을 보였다. 비율이 가장 낮았던 여성 동성애자·양성애자 집단도 27.5%가 구직 과정에서 정체성으로 인한 영향을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용 영역에서의 문제는 실제 구직 과정 전반에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가장 많은 응답은 ‘이력서나 자기소개서에서 성소수자와 관련된 이력이나 개인적 배경을 숨겼다’로 47.1%에 달했다. 이는 절반에 가까운 응답자가 취업 과정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직업 선택의 폭을 스스로 제한했다’는 응답도 30.0%로 나타나 차별을 피하기 위해 애초에 선택지를 좁히는 ‘사전적 위축’ 현상이 확인됐다. 이어 ‘외모·복장·말투 등에서 부정적 반응을 경험했다’(24.0%), ‘특정 직종이나 업계를 피했다’(21.0%) 등의 응답도 적지 않았다.
특히 트랜스젠더 응답자의 경우 어려움이 더욱 두드러졌다. ‘직업 선택을 제한했다’는 응답이 59.8%, ‘정체성이 드러날까 봐 직종을 피했다’는 응답이 44.6%에 달하는 등 다른 집단에 비해 훨씬 높은 수준의 제약을 경험하고 있었다. 특정 집단이 고용 시장에서 더 큰 차별을 경험하고 있음을 다시 한번 보여준다.
한편 ‘성소수자라는 이유로 채용이 거부되거나 취소됐다’는 응답도 2.4%로 나타났는데, 수치 자체는 낮지만 이는 명시적 차별 사례이다. 구직 과정에서는 공식적인 배제보다 자기검열이나 우회적 불이익이 더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결과는 성소수자들이 취업 과정에서 자신을 숨기거나 선택을 제한해야 하는 구조 속에서 구직 활동을 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또한 이들의 월평균 개인소득을 조사한 결과 응답자 상당수가 낮은 소득 구간에 집중돼 있어 경제적 취약성이 드러난다. 월평균 개인소득 기준으로 보면, ‘200만 원 미만’ 응답이 58.4%로 과반을 넘었다. 이는 절반 이상의 성소수자가 저소득 구간에 속해 있음을 의미한다. 반면 ‘200~300만 원’은 20.6%, ‘300~400만 원’은 10.5%, ‘400만 원 이상’은 10.5%에 그쳐, 소득이 높아질수록 비율이 급격히 감소하는 구조를 보인다.
이러한 분포는 앞서 확인된 고용 영역에서의 제약과 연결해 해석할 수 있다. 성소수자들은 구직 과정에서 정체성을 숨기거나 직업 선택을 제한하는 경험을 하고 있으며 이는 안정적인 일자리 진입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크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구조적 제약이 소득 격차로 이어지고 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이들 2495명의 연령 분포를 보면 20대가 63.6%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 전체적으로 젊은 층 중심의 표본이라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결국 이 표는 성소수자 차별 문제가 젊은 나이대에 고용 기회와 소득 수준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경제적 불평등 문제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렇듯 노동시장 진입 단계에서의 제약이 누적될 경우 장기적인 소득 격차로 고착될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이러한 차별은 고용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고 일상생활 전반에서도 폭넓게 나타나고 있었다.
성소수자로서 일상에서 차별을 경험한 응답자 676명을 분석한 결과, 가장 많은 차별 경험 장소는 ‘직장’으로 30.0%를 기록했다. 이어 ‘화장실·탈의실·사우나 등’이 28.8%, ‘학교’가 21.8%, ‘공공기관’이 20.1%로 나타났다.
특히 공간과 집단의 특성에 따라 차별 양상이 다르게 나타나는 점이 눈에 띈다. 트랜스젠더 응답자의 경우 ‘화장실·탈의실 등’에서 차별을 경험했다는 응답이 50.0%로 가장 높았으며, ‘신분증 확인 상황’에서도 36.9%로 높은 수치를 보였다. 이는 성별 구분이 강하게 작동하는 공간에서 차별이 집중됨을 보여준다.
또한 ‘일자리를 구할 때’ 차별을 경험했다는 응답도 18.8%로 나타나 일상 영역에서도 고용에 어려움을 겪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의료기관(17.9%), 카페·식당 등 생활공간(19.1%)에서도 차별이 발생하는 등 차별 경험이 생활 전반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문제임이 드러난다.
‘상점’, ‘주거 구하기’, ‘상담기관’ 등에서도 일정 수준의 차별이 확인되며 성소수자에게 일상은 지속적으로 긴장과 위험을 동반하는 공간으로 작용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청소년들 또한 성별정체성으로 인한 차별과 갈등, 고민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성소수자 청소년 455명 중 ‘차별을 경험했다’고 답한 95명이 차별 경험 장소를 묻는 질문에 77.9%가 ‘학교’를 선택했다. 이어 ‘학원’이라고 응답한 비율이 29.5%로 두번째로 많았다. 다음으로 화장실, 탈의실, 사우나 같은 성별로 구분되는 공간에서의 차별 경험이 25.3% 였으며 공공기관과 의료기관 등 순이었다.
청소년이 가장 오랫동안 머무를 공간에서 차별을 경험하는 일이 많은 것은 당연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동시에 청소년들의 보호막이 돼야 할 교육기관에서조차 차별에 무방비하게 노출돼 있음을 알 수 있다.
학교 생활에서 겪는 어려움의 원인으로는 과거부터 지속되어 왔던 성별 구분을 지목했다. ‘교복, 번호, 줄서기나 체육 활동 등 성별에 따른 구별’을 32.6%로 가장 많은 청소년이 어려움 느낀다고 답했다. 이어 ‘각종 신청서나 답안지 등에 성별정체성에 맞지 않는 성별을 기입하는 것’은 24.5%로 나타났다. 그밖에 성별정체성에 맞지 않는 화장실, 특정 성별만 모여 있는 학교, 탈의실 부재 등에서 어려움을 겪는다고 응답했다.
이는 관습적으로 혹은 편의를 위해 유지 오는 제도들이 오늘날 성소수자 청소년들에게는 불편함과 어려움으로 느껴지고 있음을 나타낸다.
상담 교사에게 성정체성을 이야기하는 데에도 많은 고민이 따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응답자의 89.5%인 407명이 상담교사에게 자신의 성정체성을 말한 적 없다고 답했다. 그 이유로 ‘성소수자에 대한 지식이 없을 것 같아’를 전체에서 55.3%로 가장 많이 꼽았고 다음으로 ‘담임, 부모 등에게 아우팅할 것 같아서’를 52.8%로 두 번째로 많이 선택했다.
주목할 점은 지정성별로 분류했을 때 다른 응답 양상을 보였다는 것이다. 지정성별여성 청소년의 경우 ‘성소수자에 대한 지식이 없을 것 같아’에 61.1%로 가장 많이 응답했지만 지정성별남성 청소년은 35.2%에 그쳤다. 반면 지정성별남성 청소년이 ‘성소수자라는 것이 다른 친구들에게 소문날까 봐’에 60.4%로 응답해 가장 큰 이유로 뽑았지만 지정성별여성 청소년은 46.5%만 이유로 뽑았다.
이는 교사에 대한 신뢰의 문제가 공통되는 원인이지만 그로 인해 가장 우려하는 상황은 지정성별에 따라 적절한 상담의 가능 여부와 사회 관계 속에서의 두려움 등으로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성소수자 청소년들은 차별에 대한 해결책으로 교육을 가장 많이 선택했다. 전체의 55.8%가 ‘교육과정 내 성소수자에 관한 내용 포함’을, 48.4%가 ‘성소수자 관련 혐오/차별 예방 교육 실시’가 해결책으로 꼽았다. 이외에도 인식 개선, 혐오 차별 금지하는 교칙 마련, 성 역할 강조하는 교육 개선 등을 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차별 혹은 혐오 등에 대한 대응 방안으로 교육 체계와 제도 같은 사회 시스템의 변화를 통한 개선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청소년들이 구조적 변화를 요구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실제 성소수자에 대한 인식이 형성되는 원인을 살펴보았을 때 사회 구조적 영향이 큰 것으로 나타났다. 인식이 악화된 이유를 묻는 질문에 80.2%가 ‘정치인 및 정당의 부정적인 태도와 발언 때문’이라고 답했고 60.3%는 ‘공인 및 사회 지도층의 지지가 부족해서’를 꼽았다. 이는 개인의 인식이 형성됨에 있어 사회에서 공유되는 시선 및 분위기가 큰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결과이다.
개선된 이유를 묻는 질문에는 ‘일상생활에서 성소수자 가시성과 참여로 인해’가 82.4%로 가장 많은 응답을 얻었다. 구조적으로 형성된 부정적 인식이 일상생활 속에서의 경험을 통해 수정되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시민사회의 지지로 인해’가 56%, ‘공인 및 사회 지도층의 지지’가 13.1%로 뒤를 이어 인식 개선에 있어서도 구조적 요인이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결국 인식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가 함께 만들어가는 것임을 보여준다.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 조혜인 변호사는 “성인 성소수자 4명 중 1명 이상이 지난 1년간 일상에서 차별을 경험하고 절반 이상이 우울 증상을 겪는 등 삶의 전 영역에서 차별 실태가 여전히 심각하다”고 지적했다. 이어 “청소년 성소수자의 71.1%가 편견과 혐오 표현을 경험했고 학교 내 상담 등 지원체계를 통한 문제 해결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조 변호사는 이러한 문제의 대응 방안으로 “성소수자를 정부의 명시적 정책 대상으로 설정하고 고용·교육·복지 등 부처별로 구체적인 차별 시정 정책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특히 조 변호사는 “일본의 경우 후생노동성이 성소수자 노동자를 정책 대상에 포함해 채용 차별 금지 안내, 직장 내 괴롭힘 방지 지침 반영, 실태조사 및 기업 사례 발간 등을 추진하고 있다”며 “한국은 관련 정책이 사실상 부재한 만큼 최소한 차별 금지 원칙에 대한 정부 차원의 적극적인 홍보와 실태 파악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성적지향과 성별정체성을 차별금지 사유로 명시한 차별금지법 제정을 비롯해 법·제도 전반의 개선이 필요하다”면서도 “입법 이전에도 즉각 추진할 수 있는 정책들이 이미 존재하는 만큼, 이를 실행하는 것이 시급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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