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0만원 짜리 차를 딱 한 대만 고르라면···토요타 'GR 86'입니다

실시간 키워드

2022.08.01 00:00 기준

5000만원 짜리 차를 딱 한 대만 고르라면···토요타 'GR 86'입니다

뉴스웨이 2026-05-01 09:10:00 신고

토요타 GR 86. 사진=권지용 기자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자동차의 신이 내려와 당신에게 소원을 묻습니다. 조건은 까다롭습니다. "딱 5000만원 예산 안에서 평생을 함께할 차를 딱 한 대만 골라보라." 여러분은 무엇을 고르시겠습니까? 실내 공간 널찍한 국산 패밀리 SUV? 아니면 브랜드 이미지 챙길 수 있는 엔트리급 독일 세단? 저처럼 자동차를 사랑하는 이라면 단 1초의 주저함도 없이 이 차의 이름을 외칠 겁니다. "제게 토요타 GR 86의 키를 주십시오." 이 대답은 결코 객기가 아닙니다. 자동차를 사랑하고 운전의 순수한 재미를 즐기는 이들에게는 단 1원도 아깝지 않을 녀석이죠.

우선 이 차의 이름표에 붙은 'GR'이라는 딱지부터 살펴봅시다. 단순히 멋 부리려고 붙인 스티커가 아닙니다. '토요타 가주 레이싱(TOYOTA GAZOO Racing, TGR)'의 약자입니다. 여기서 '가주(GAZOO)'라는 단어가 참 묘합니다. 정체불명의 이 이름은 3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토요타 대리점들이 보유한 중고차 재고를 사진으로 찍어 보여주던 웹사이트 이름이 '가주닷컴'이었습니다. 일본어로 화상(image)을 뜻하는 '가조우(画像)'에서 유래했죠. 지금이야 웹서핑이 당연한 세상이지만, 당시로서는 파격적이면서 급진적인 도전이었습니다. 토요타는 이 이름을 승리의 상징으로 탈바꿈하기 시작했죠.

토요타 창업자 토요다 키이치로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자동차의 내구성과 성능을 테스트하려면 극한의 경쟁 속에 차를 던져넣어야 한다." 그 정신은 오늘날 '모리조(MORIZO)'라는 가명으로 직접 레이싱 헬멧을 쓰는 토요다 아키오 회장에게로 이어졌습니다.

토요타 GR 86. 사진=권지용 기자

이들이 GR 86을 빚어낸 곳은 안락한 연구실이 아닙니다. '녹색 지옥'이라 불리는 독일 뉘르부르크링의 거친 노면, 먼지가 휘날리는 WRC의 랠리 코스, 그리고 밤낮없이 달리는 WEC의 서킷 위였죠. TGR은 "길은 사람을 만들고, 사람은 차를 만든다"는 철학을 가졌습니다. 좋은 차는 컴퓨터 시뮬레이션이 아니라, 드라이버의 엉덩이와 손끝에서 나오는 피드백으로 완성된다는 믿음이죠. GR 86은 '피 끓는 현장'의 결과물입니다.

본격적으로 GR 86의 운전석에 몸을 구겨 넣어봅니다. 시트 포지션은 지면에 닿을 듯 낮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커다란 스크린이나 화려한 앰비언트 라이트는 기대하면 안 됩니다. 투박하기 그지없죠. 그런데 그게 이 차의 매력입니다.

이 차를 몰고 도로로 나서는 순간 저는 결심했습니다. 오늘은 세상의 그 어떤 방해도 받지 않겠다고요. 스마트폰 미러링은 커녕 내비게이션, 음악조차 껐습니다. 아는 길로만 가기로 마음먹었죠. 오로지 엔진 소리와 타이어가 노면을 움켜쥐는 소리에만 집중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요즘 차들이 자율주행이니 뭐니 하며 운전자의 권리를 뺏어갈 때, GR 86은 반대로 말합니다. "자, 이제 네가 주인공이야. 네가 실수하면 차도 미끄러질 거고 네가 완벽하면 차도 완벽한 곡선을 그릴 거야."

토요타 GR 86 수동변속기. 사진=권지용 기자

2.4L 자연흡기 엔진은 과급기(터보)가 주는 인위적인 '뻥 마력'이 없습니다. 밟는 만큼 정직하게 올라가는 rpm 게이지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정화됩니다. 엔진회전수가 오르는 속도가 정말 빨라요. 231마력이라는 숫자에 방심했다가는 큰코다칠 지경입니다. 수동변속기 레버를 조작할 때의 그 묵직한 손맛은 어떤 디지털 기기도 줄 수 없는 아날로그의 극치입니다.

GR 86에도 '드라이브 모드 셀렉터' 버튼이 있긴 합니다만, 바뀌는 점이라고는 계기판 그래픽과 트랙션 제어 정도가 전부입니다. 반대로 이 차는 무한대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죠. 바로 당신의 왼발과 오른손에 의해서 말이죠.

내가 거칠게 클러치를 떼고 엔진 회전수를 레드존까지 밀어붙이면 그게 바로 '슈퍼 스포츠 모드'입니다. 반대로 부드럽게 기어를 올리며 창밖의 풍경을 즐기면 그게 세상에서 가장 안락한 '에코 모드'가 됩니다. 기계가 정해준 로직에 나를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 기분에 따라 차의 성격을 실시간으로 재창조하는 재미. 이것이 바로 GR 86이 선사하는 '완벽한 장난감'으로서의 면모입니다.

토요타 GR 86 엔진룸. 사진=권지용 기자

놀라운 반전도 있습니다. 이 고집불통 같은 수동 모델에도 '어댑티브 크루즈 컨트롤'이 들어갔습니다. "수동차에 웬 크루즈 컨트롤?"이라고 비웃을지 모르지만, 막히는 강변북로나 장거리 고속도로 주행에서 이 기능은 구세주와 같습니다. 지독하게 운전자를 고생시키다가도, 힘들 때 슬쩍 어깨를 빌려주는 츤데레 같은 매력이랄까요.

심지어 연비도 기특합니다. 자유로에서 정속 주행을 해보니 리터당 18km라는 숫자가 찍힙니다. 아무래도 가벼운 차체(1285kg, 1.3t이 채 넘지 않습니다) 덕분인 듯한데, 6단 수동변속기 스포츠카를 타면서 지갑 걱정까지 덜어주다니 이쯤 되면 이 녀석을 사랑하지 않을 재간이 없습니다.

여기서 잠시 시선을 일본의 서킷으로 돌려봅시다. TGR이 가장 공을 들이는 대회 중 하나가 바로 슈퍼 다이큐 시리즈입니다. 1991년에 시작된 이 대회는 프로 선수들만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아마추어 드라이버들도 함께 참여하는 참여형 레이스의 끝판왕이죠.

토요타 GR 86 계기판. 사진=권지용 기자

토요타가 왜 여기에 목숨을 거냐고요? 여기서 얻은 노하우가 곧바로 양산차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레이스 도중 부서진 부품을 분석하고, 드라이버의 불편함을 개선하는 과정이 반복됩니다. "향후 100년 동안 사람들이 즐겁게 운전할 수 있는 차를 만들겠다"는 토요다 아키오 회장의 비전은 이런 풀뿌리 모터스포츠에서 싹을 틔웁니다.

단순히 1등을 하는 것이 목표가 아닙니다. 공정한 경쟁 속에서 기술력을 연마하고, 그 혜택을 일반 소비자에게 GR 86 같은 차로 돌려주는 것. 그것이 TGR이 추구하는 선순환 구조입니다. 우리가 지금 밟고 있는 이 엑셀 페달의 답력 하나하나가 수많은 레이서의 땀방울로 조율된 결과물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이 차가 다시 보이기 시작합니다.

토요타 GR 86 사진=권지용 기자

시승을 마치고 차에서 내리는데 묘한 허탈감이 몰려왔습니다. "아, 이제 다시 무미건조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는구나" 하는 아쉬움이었죠.

GR 86은 단순히 A지점에서 B지점으로 이동하는 수단이 아닙니다. 이 차는 당신의 잊고 있었던 열정을 일깨우는 도파민 방출기입니다. 자연흡기, 후륜구동, 수동변속기라는 멸종 위기종급 특징을 모아 이렇게 완벽한 하모니를 만들어 냈다는 사실만으로 토요타에 경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세상은 자율주행과 전기차의 시대로 빠르게 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누군가는 여전히 직접 기어를 바꾸고, 엔진의 진동을 온몸으로 느끼며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저와 같은 순수주의자이고, 수중에 5000만원이라는 예산이 있다면 고민하지 마세요. 신이 묻는다면 저처럼 대답하시길 바랍니다. "저도 GR 86으로 하겠습니다!"

Copyright ⓒ 뉴스웨이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실시간 키워드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0000.00.00 00:00 기준

이 시각 주요뉴스

알림 문구가 한줄로 들어가는 영역입니다

신고하기

작성 아이디가 들어갑니다

내용 내용이 최대 두 줄로 노출됩니다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이 이야기를
공유하세요

이 콘텐츠를 공유하세요.

콘텐츠 공유하고 수익 받는 방법이 궁금하다면👋>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유튜브로 이동하여 공유해 주세요.
유튜브 활용 방법 알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