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거진=정혜련 작가] 서울 송파구 더갤러리 호수에서 열리고 있는 ‘틈을 걷다’ 전시를 찾은 날, 나는 유난히도 천천히 걸었다. 전시를 ‘본다’기보다, 그 사이를 ‘지나간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경험이었다. 작품과 작품 사이, 빛과 그림자 사이, 그리고 나와 작품 사이에 놓인 보이지 않는 간격들이 유독 또렷하게 느껴졌다.
우리는 일상에서 수많은 틈을 지나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 말과 말 사이의 침묵, 그리고 감정과 감정 사이에 생기는 작은 균열들. 하지만 대부분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 채 채워야 할 무언가로만 여긴다. 비어 있는 것은 불완전하다고, 채워야만 온전해진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전시는 그 생각을 잠시 멈추게 한다. 틈은 결핍이 아니라 하나의 ‘상태’이며, 때로는 가장 솔직한 감정이 머무는 자리라는 것을 말없이 보여준다. 작품들은 무엇인가를 강하게 주장하기보다, 오히려 덜어냄으로써 더 많은 것을 느끼게 한다. 설명되지 않은 공간, 비워진 자리, 그리고 그 사이를 걷는 나 자신의 감각이 전시의 일부가 된다.
특히 인상 깊었던 것은 이 전시가 관람자를 조용히 ‘멈추게’ 한다는 점이었다. 우리는 보통 전시장에서 다음 작품으로 빠르게 이동한다. 더 많이 보고, 더 많이 이해하려는 마음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오히려 멈추게 된다. 그리고 그 멈춤 속에서, 그동안 놓치고 있던 감정들이 천천히 떠오른다. 그것은 거창한 감정이 아니라 아주 사소한 것들이다. 오래된 기억의 잔상, 설명할 수 없던 기분, 혹은 말하지 못했던 어떤 마음.
나는 문득 ‘내 작업은 어떤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게 되었다. 나의 작업은 줄곧 ‘행복’을 이야기해왔다. 밝고 따뜻한 색, 캐릭터, 그리고 긍정의 메시지들. 사람들에게 위로를 전하고 싶었고,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런데 이 전시를 보며 깨닫게 된 것은, 어쩌면 나는 그동안 ‘채우는 일’에만 집중해왔던 것은 아닐까 하는 점이었다.
행복은 분명 중요하다. 하지만 그 이전에 존재하는 감정들, 즉 외로움, 공허함, 혹은 설명되지 않는 불안 같은 것들도 우리의 일부다. 그리고 그 감정들이 머무는 자리가 바로 ‘틈’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 할 일은 단순히 그 틈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그 틈을 이해하고 바라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 전시는 나에게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비어 있는 공간 위에 무엇을 더할 것인가가 아니라, 그 공간 자체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었다. 만약 나의 캐릭터가 그 틈 사이를 걷는다면 어떨까. 혹은 누군가의 마음속 작은 틈에 조용히 앉아 있는 존재가 된다면. 그 순간, 나의 작업은 지금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틈을 걷다’는 화려하거나 직관적인 전시는 아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오래 남는다. 전시장을 나선 후에도, 그 ‘사이’의 감각이 계속해서 따라온다. 그리고 어느 순간, 우리는 일상 속에서도 그 틈을 발견하게 된다. 바쁜 하루 속 잠깐의 멈춤, 익숙한 공간 속 낯선 공기, 그리고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나만의 감정.
어쩌면 우리는 모두 각자의 틈을 안고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틈이 있기에, 우리는 더 깊이 느끼고, 더 천천히 이해하며, 결국에는 서로에게 다가갈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나는 다시 걷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무언가를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사이를 더 잘 느끼기 위해서. 그리고 언젠가 나의 작업 속에서도, 누군가가 자신의 틈을 조용히 마주할 수 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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