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전화 하나 개통하는 데 반나절이 걸렸다. 도쿄에 정착하며 대형 통신사 대리점을 찾았더니 예약 없이는 상담조차 불가능했다. 점심시간 직후였음에도 당일 예약은 이미 마감. 현지인 조언을 따라 대형 전자상가로 발길을 돌렸지만 4시간 대기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기다림 끝에 겨우 자리에 앉았으나 끝이 아니었다. 각종 서류에 서명하고 복사하는 과정만 2시간 가까이 소요됐다. 손에 쥔 쇼핑백은 휴대전화를 빼고도 계약서와 안내서 무게로 묵직했다. 한국이었다면 직접 찾아온 고객을 이토록 지치게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주소 이전은 더 험난한 여정이었다. 임시 거처에서 새 집으로 주소를 옮기려면 먼저 이전 거주지 구청에서 전출 허가를 받아야 한다. 이 과정에 2시간이 소요됐고, 새 동네 구청에 오후 4시쯤 도착하니 대기 시간이 3시간이라고 했다. 퇴근 시간을 넘기는 것 아니냐고 되물으니 공무원들이 잔업으로 처리한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격주로 일요일에도 민원 창구를 연다며 주말 방문을 권유받았을 때는 입이 벌어졌다.
구청 민원실 풍경도 낯설었다. 창구 공무원 외에 중년 여성 안내 인력들이 분주히 민원인을 맞이한다. 전입 신고를 요청하자 건네받은 서류는 신고서가 아니라 민원인의 방문 목적을 기록하는 종이였다. 담당자 배치를 위한 사전 서류 작성이라니, 전자정부에 익숙한 한국인 입장에서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이러한 절차들이 켜켜이 쌓여 민원인은 시간을 허비하고 공무원은 야근과 휴일 근무에 시달리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민간 영역도 사정은 비슷하다. 서울의 대형 가전매장은 2층 전체에 직원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지만, 도쿄 외곽의 가전 매장에서는 판매대마다 담당 직원이 배치돼 있었다. 가전 구매 시에도 신용카드 한 장으로 끝나지 않는다. 배송 계약서, 회원 가입서 등을 작성해야 하며 상담 직원이 일일이 서류를 받아 입력하는 방식이다.
이쯤 되면 일본이 이 아날로그 시스템을 무심코 방치하는 것은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인구 1억2천만 명을 부양해야 하는 국가다. 2023년 기준 내수 소비 비중이 54.5%에 달하는 내수 중심 경제 구조에서, 한국인 눈에 비효율로 보이는 것이 이들에게는 다수의 인력을 고용해 적정 임금을 지급하며 내수 경제의 톱니바퀴를 굴리는 나름의 전략일 수 있다.
작년 한국 수출 규모가 일본에 바짝 근접했다는 소식이 화제였다. 메모리 반도체 호황 덕분이다. 그러나 같은 시기 일본의 실질 GDP 성장률은 1.1%를 기록하며 27년 만에 한국을 추월했다. 인공지능이 경제 담론을 지배하는 시점에 AI 후발주자 일본이 조용히 성장 곡선을 그리고 있었던 셈이다.
한국에서는 도처에서 'AI 퍼스트' 구호가 울려 퍼지지만, AI 확산으로 일자리를 위협받는 초급 회계사나 IT 개발자를 위한 뚜렷한 대안은 보이지 않는다. AI 기술 고도화로 인간의 노동 상당 부분이 대체될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AI가 창출한 경제적 과실을 기본소득 형태로 분배받아 노동 없이 살아가는 미래를 그리는 이들도 있지만, 미국과 중국이 아닌 국가에서 그런 유토피아가 실현될지 회의적인 시각도 만만찮다.
일본 정부와 기업들은 뒤늦게 AI 경쟁에 뛰어들었고, 대규모 투자 소식도 간간이 들린다. 그러나 일본인들의 일상에서 AI 도입에 대한 절박함은 크게 느껴지지 않는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대체하는 시대가 도래해도 1억 인구 대부분이 각자의 자리에서 사람으로서 일하며 경제를 지탱하는 이 구조는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Copyright ⓒ 나남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