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극에 간 작가는 어떤 영감을 얻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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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에 간 작가는 어떤 영감을 얻었을까?

바자 2026-04-25 07:00:00 신고


어느 날 한 예술가가 북극으로 향했다


미디어, 설치, 회화를 오가며 작업하는 ‘극지연구소 협력 아라온호 승선 레지던시’ 프로그램. 이것은 2025년 8월부터 9월까지, 과학자와 연구원 사이 미지의 세계에 불쑥 발을 들인 작가 강현선의 예술 탐험기다. 돌아와 만든 그림과 영상, 조각 그리고 이 모든 것으로 채운 전시에서도 다 쏟아내지 못했던 어느 작가의 이야기가 이곳에 있다.


〈아라온 로그〉, 2026, 단채널 영상, 7분 55초.
〈아라온 로그〉, 2026, 단채널 영상, 7분 55초.

강철로 만들어진 빨간 쇄빙선이 바다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간다. 어느 순간 하얗고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해빙들이 하나둘 나타나더니, 곧 선수에 부딪히기 시작한다. 거대한 선체는 거리낌없이 얼음을 가르며 검은 바다에 길을 만든다. 배가 해빙과 충돌할 때마다 폭음 같은 둔탁한 굉음이 적막을 깨고 울려 퍼진다.

8월의 북극 바다는 시공간에 대한 감각을 모호하게 만든다. 태양은 내내 사라지지 않은 채 늦은 밤에도 바다 위 어딘가에 걸쳐 있다. 인생의 대부분을 도시에서 보낸 나에게 북극의 자연을 맞닥뜨리는 것은 분명 낯선 경험이지만, 이곳이 진정 극지임을 체감하게 만든 것은 문명과의 단절이었다. 항해를 하는 동안 휴대폰 통신 주파수는 연결되지 않았고, 선내의 저속 와이파이마저도 안테나가 위성을 등지면 작동하지 않았다. 나침반이 작동하지 않는 고위도 극지방의 생경함은 모니터에 표시된 배의 좌표와 시계를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었다.

피부로 감각하는 것과 공고한 시스템 사이 불일치는 추크치해(Chukchi Sea) 탐사를 마치고 베링해(Bering Sea)의 다이오메드 제도(The Diomede Islands)를 지나며 극대화되었다. 큰 섬인 빅 다이오메드와 작은 섬인 리틀 다이오메드는 바다가 얼면 걸어갈 수 있을 정도로 가깝지만, 그 사이로 날짜변경선(IDL)이 지나기 때문에 양쪽은 시간도, 날짜도 다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선 하나로 전혀 다른 세상이 된 셈이다. 섬들은 과거엔 원주민들이 얼어붙은 바다를 통해 자유롭게 오가던 장소였으나, 지금은 러시아와 미국의 영토가 되어 ‘오늘의 섬’과 ‘어제의 섬’이라는 별칭으로 나뉘어 불린다. 같은 바다 위에서 발생하는 기묘한 충돌. 인간은 자연을 설계 가능한 시스템과 정치적 합의 아래 작동하는 대상으로 만들어 버렸다.

 〈생존을 위한 지침 II〉, 2026, 패널에 유화 물감, 41x53cm.
〈생존을 위한 지침 II〉, 2026, 패널에 유화 물감, 41x53cm.

어려서부터 봐온 세계지도는 지구를 영원히 고정된 장소로 보여준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땅과 바다는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있으며, 지도의 선과 명칭 역시 어떤 모양과 이름으로든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동안 내가 창조해온 작업들은 이러한 인위적인 시스템과 분류 체계의 정당성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18세기 탐험가의 빛바랜 일기와, 작은 요트로 7년간 대양을 누빈 60대 모험가의 기록을 바탕으로 전개되는 내러티브. 내 신체 데이터를 기반으로 만든 가상 캐릭터 ‘루시’는 이 캐릭터들의 경험을 정보로 흡수해 관람객들에게 끝없는 탐험과 눈부신 발견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문득 이 모든 것을 만든 나를 돌아본다. 모험이나 탐험에 대한 어떤 열망도 없이 낯선 곳을 피하기만 했던 모습을. 루시가 미지를 향유하는 동안 나는 늘 제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사람들은 왜 탐험할까? 미지를 향해 목숨을 건 도전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풀리지 않는 근원적인 호기심이 나를 북극으로 이끌었다. 과거 탐험가들과 같은 새로운 발견이나 과학적 성취를 이룰 수는 없겠지만, 나 스스로는 극지 항해를 미지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예술적 탐험으로 정의했다. 그렇게 결심한 탐험은 준비부터 쉽지 않았다. 루시는 인공지능을 학습시켜 실시간 내러티브를 관객에게 들려주면 그만이었으나, 인간인 나는 탐험을 하기 위해 여러 가지 시스템과 프로세스를 통과해야 했다.

우트키아비크(Utqiaġvik)라는 알래스카 최북단 마을에 도착한 건 작년 8월이었다. 마침내 마을 앞바다에서 곧 승선하게 될 아라온호를 만났다. 그보다 멀리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흰 덩어리가 보였다. 배인지 건물인지 스티로폼 같은 것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는, 분명 생전 처음 보는 물체였다. 승선 후 한 과학자의 설명으로 그것이 캐나다 북쪽에서 떨어져 나온 빙산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땐 무척 당황스러웠다. 북극의 자연을 직접 확인하기 위해 떠난 탐험에서 바다에 떠 있는 거대한 얼음도 알아보지 못했다니. 얼음인 줄 알았다면 더 주의 깊게 살폈을 텐데. 탄식이 흘러나왔다. 감각이라는 것은 그 감각을 해석하기 위한 지식과 체계가 있어야만 완성될지도 모른다.


〈-1.8℃〉, 2025, PLA, 대리석, 유리, Ø 20x27cm. 사진 제공 노블레스 컬렉션, 사진 김태화.

〈-1.8℃〉, 2025, PLA, 대리석, 유리, Ø 20x27cm. 사진 제공 노블레스 컬렉션, 사진 김태화.

<무제 no.2(핑고)>, 2025, 캔버스에 아크릴릭, 53x45cm.

<무제 no.2(핑고)>, 2025, 캔버스에 아크릴릭, 53x45cm.

우리는 탐색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탐색의 끝은 우리가 출발했던 곳에 도착하여 그곳을 처음으로 알게 되는 것이다. -T.S. 엘리엇, ‘리틀 기딩(Little Gidding)’ 중


북극의 강풍을 피해 쇄빙선이 얼음 사이에서 잠시 머물고 있을 때 어떤 과학자와 승조원들은 해빙 연구를 위해 바다 위의 얼음 덩어리들을 건져냈다. 예술가로 승선한 나는 특별히 작은 한 조각을 얻을 수 있었다. 이 해빙을 온전히 소유하고 싶었지만 북극의 추위에도 해빙은 점점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조급한 마음으로 카메라와 휴대폰을 챙겨 와 얼음 덩어리를 옮겨가며 촬영하였고, 수차례의 시도 끝에 3D 스캔에 성공했다. 이 해빙은 〈-1.8℃〉라는 작업으로 완성되었다.

북극을 항해하며 나는 물리적 실체와 신체 감각, 세계의 의미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이 세계는 다양한 존재들이 뒤섞여 변화하고 있다. 하지만 내 감각이 인지하는 세계는 좁고 표상적인 것에만 머물러 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내 몸은 북위 78도에 도달해 있었다. 사람들은 이번 항해에서 가장 북쪽에 왔다는 사실에 들떠 모니터 안의 좌표를 카메라로 찍기 시작한다. 어느덧 수평선에 주황빛 노을이 비친다. 해가 지기 시작한다는 건, 9월 중순에 접어들었다는 뜻이다. 그 즈음 밤하늘의 오로라도 볼 수 있었다. “루시, 오로라는 사실 하얀색이야. 보면 무슨 말인지 알 거야.” 미국에서 온 과학자 로베르토가 건넨 말은 사실이었다. 북극에서 마주한 오로라는 구름이나 연기처럼 보였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일렁이기 시작했다. 상상했던 오로라와는 사뭇 달랐다. 배에서 오로라를 확인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휴대폰 카메라로 하늘을 찍어보는 것이다. 화면에 비치는 건 우리가 아는 그 오로라다. 구름처럼 보이던 것도 스크린에서는 선명한 녹색이나 보랏빛으로 나타났다. 두 눈으로 목도한 것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나, 렌즈는 다른 방식으로 오로라를 기록했다. 그건 항해 이전 상상했던 북극과 가장 다른 모습이었다.

승선 전 가장 선명하게 기억나는 것은 이 땅이 “부엉이와 북극곰의 것”이라고 말한 어느 원주민의 목소리다. 북극이 인간만의 공간이 아님을 힘주어 말하던 차분하고 단호한 목소리. 우트키아비크에서 만난 그는 우리가 이 땅을 빌려 살고 있을 뿐, 진정한 주인은 자연과 그 안에 사는 모든 생명체라는 이야기를 반복했다. 북극은 단순한 탐험의 대상이 아닌, 존중하고 이해해야 할 공간이다. 기후 변화로 빠르게 녹아내리는 빙산과 해빙, 지형은 인간이 만들어 놓은 지도 위에 머물지 않는다. 자연은 인간의 시스템으로 규정되거나 고정될 수 없으며, 그 너머의 시간대를 흐르고 있다.

보퍼트해(Beaufort Sea)의 얼음 바다 위, 아라온호에서 촬영 중인 강현선 작가.

보퍼트해(Beaufort Sea)의 얼음 바다 위, 아라온호에서 촬영 중인 강현선 작가.

<생존을 위한 지침 III>, 2026, 패널에 유화 물감, 41x53cm.

<생존을 위한 지침 III>, 2026, 패널에 유화 물감, 41x53cm.

미지를 향해 도전하는 마음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떠난 북극 항해에서 나는 아무런 답을 얻지 못한 것 같다. 항해를 마치고 돌아온 지금도 탐험가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의 열정은 나에겐 여전히 북극의 자연환경만큼이나 낯선 것이다. 그러나 일상으로 돌아와 다시 작업을 하기 시작할 땐, 무언가 달라졌음을 느꼈다. 기존의 작업이 나에 대한 확신 없이 시스템 안에서 벗어나려는 시도에 그쳤다면, 지금은 더 거시적인 관점에서 이 시스템을 관찰하고 표현하려 한다. 내가 이해하는 세계는 지구의 아주 작은 일부일 테니까. 내가 누구인지 찾아가던 과정은 내가 감각하는 세계를 표현하는 일로 확장되었다. 나를 둘러싼 고정관념은 날짜변경선 같은 가상의 개념일 뿐 내 신체를 구속할 수 없다는 것을 이제는 안다.

이제 나의 아바타 루시도 다른 이야기를 말하게 될 것이다. 인간은 왜 미지로 떠나는지, 혹은 미지에서 무엇을 발견했는지보다 지금 우리가 무엇을 느끼고 감각하며 사는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최근에 연 개인전 «Second Nature»에서 발표한 신작 〈아라온 로그〉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북극에서 촬영한 비디오와 인공지능이 만든 이미지를 조합해 제작한 영상에서 화자가 된 루시는 떠다니는 해빙과 과학자들의 탐사를 관찰하며 끝없는 탐험에 대해 이야기한다. 여기서 북극은 수치화되거나 역사를 통해 묘사된다. 인간이 부여한 좌표나 명칭 말고. 경이로운 해빙과 유유히 일렁이는 오로라만이 고유한 시공간 속에 남을 것이다.

나의 탐험은 정교한 데이터로 구성된 북극과, 인간의 언어로는 포착할 수 없는 숭고한 실재의 북극 사이 어딘가에 걸쳐 있다. 나는 그 간극에서 발생하는 불일치를 통해 세계를 새롭게 이해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탐험이라는 것은 미지를 향한 것이 아니라 다 안다고 생각했던 세계를 다시 이해하고, 그 안에서 다시금 나를 바라보는 일이 아닐까. 한 달간의 항해, 극지에서의 경험이 가져다준 영감은 앞으로의 작업을 통해 점차 드러날 것이다. 어느새 나는 다시 출발했던 곳에 서서 새로운 탐험을 상상하고 있다.

글&사진/ 강현선 에디터/ 고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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