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 바젤 홍콩 2026에서 우리가 느낀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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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바젤 홍콩 2026에서 우리가 느낀 것들

에스콰이어 2026-04-25 00:00:03 신고

올해 13회를 맞은 아트 바젤 홍콩 2026에는 41개국 240개 갤러리가 참가했고, 5일간 9만1500명이 다녀갔다. 11회째를 맞아 역대 최대 규모가 된 아트 센트럴을 포함해 대안 아트 페어 3개가 동시에 개장했고, 60여 개의 갤러리가 새 전시를 오픈했다. 홍콩이 세계 최대 규모의 미술 도시로 변모하는 이 시기. 그 도시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미술의 규모가 아니었다. 입구에서 나를 맞이한 것은 인도 원주민의 실이었고, 벽을 채운 것은 식민의 역사를 새긴 지도였으며, 내 걸음을 멈춘 것은 한 모델의 날카로운 눈이었다.

파라그 탄델(Parag Tandel), 인카운터스(Encounters) 섹터 전시 전경, 아트 바젤 홍콩 2026. 형형색색의 실과 와이어로 감싼 조각들이 아트 바젤 홍콩의 입구에서 우리를 맞이했다. 각각의 좌대는 콜리족이 사는 일곱 섬을 상징한다. © Courtesy of Art Basel

파라그 탄델(Parag Tandel), 인카운터스(Encounters) 섹터 전시 전경, 아트 바젤 홍콩 2026. 형형색색의 실과 와이어로 감싼 조각들이 아트 바젤 홍콩의 입구에서 우리를 맞이했다. 각각의 좌대는 콜리족이 사는 일곱 섬을 상징한다. © Courtesy of Art Basel


시안 다이릿(Cian Dayrit), 에코스(Echoes) 섹터 전시 전경, 아트 바젤 홍콩 2026. 필리핀의 지형도 위에 텍스트·아카이브 이미지·원주민 신화의 상징들을 중첩시킨 직조 작품. 작가는 이를 '대항 카토그래피(counter-cartography)'라 부른다. © Courtesy of Art Basel

시안 다이릿(Cian Dayrit), 에코스(Echoes) 섹터 전시 전경, 아트 바젤 홍콩 2026. 필리핀의 지형도 위에 텍스트·아카이브 이미지·원주민 신화의 상징들을 중첩시킨 직조 작품. 작가는 이를 '대항 카토그래피(counter-cartography)'라 부른다. © Courtesy of Art Basel

티파니 청(Tiffany Chung), 갤러리아 맥스 에스트렐라(Galería Max Estrella) 부스 전경, 아트 바젤 홍콩 2026. 향신료 무역로를 한땀 한땀 수 놓은 세계지도를 관람객이 보고 있다. © Courtesy of Art Basel

티파니 청(Tiffany Chung), 갤러리아 맥스 에스트렐라(Galería Max Estrella) 부스 전경, 아트 바젤 홍콩 2026. 향신료 무역로를 한땀 한땀 수 놓은 세계지도를 관람객이 보고 있다. © Courtesy of Art Basel

keyword 1 . Decentering

홍콩 컨벤션 센터에서 열린 아트 바젤 홍콩 2026의 입구에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우리를 맞이한 것은 리처드 세라처럼 압도하는 쇳덩이도, 올라퍼 엘리아슨처럼 영적인 오라를 풍기는 빛도 아니었다. 그것은 매우 연약한 색색의 실들로 구조물을 감싼 인도 작가 파라그 탄델의 소프트 조각이었다. 인도의 뭄바이에는 ‘콜리족’이라는 원주민 공동체가 있다. 일곱 개의 섬에 흩어져 생존 중인 이 원주민들은 수천 년 동안 노를 젓고 낚시를 하며 살아왔으나, 도시의 팽창과 그로 인한 오염 등으로 탈거주의 위기에 처했다. 콜리족의 일원인 탄델은 바다에서 목숨을 잃은 이들을 위해 콜리족이 치르던 바랄리 의식의 구조물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바랄리 의식을 치를 때 콜리족은 원형의 받침에 아홉 개의 막대를 붙이고, 이 막대에 생활지 주변의 숲에서 채집한 식물들을 장식했다. 탄델은 어망을 상징하는 형형색색의 실로 해양생물이나 바다의 터전에 사는 것들을 만들어 마치 제사상처럼 꾸몄다. 이 조각들의 좌대는 각각 다른 모양이었는데, 이는 콜리족이 사는 섬들을 상징한다.

탄델의 작품이 전시된 섹터는 ‘인카운터스’다. 인카운터스는 말하자면 아트 바젤 전체의 파사드다. 입구나 출구 등 가장 많은 사람이 오가는 곳에 가장 큰 공간을 할애해 아트 바젤의 큐레이터들이 엄선한 설치 작품을 선보이는 섹터. 모리 미술관 관장 마미 카타오카가 이끄는 이번 전시의 큐레이터 팀(홍콩 대표 이사벨라 탐, 동남아시아 대표 알리아 스와스티카, 일본 대표 도쿠야마 히로카즈)이 아트 바젤 홍콩의 얼굴을 책임지는 대형 설치 작품 중 하나로 뭄바이 최초의 원주민인 콜리족의 이야기를 선택했다.

올해 아트 바젤 홍콩이 ‘최근 5년 이내에 제작된 중견 작가들의 작품을 집중 조명하겠다’며 처음 도입한 에코스 섹션에는 갤러리 놈(NOME)과 카틴카 타바카루(Catinca Tabacaru)가 공동으로 반식민예술가 동맹인 NAM(Non-Aligned Movement)의 전시를 선보이고 있었다. 짐바브웨의 벽옥을 쇼나족의 전통 방식으로 조각한 기괴한 얼굴과 마치 삼각대처럼 이를 받치고 있는 세 개의 단단한 금속 손, 또 1945년과 1970년에 벌어졌던 짐바브웨의 전쟁에서 수거한 포탄 껍데기로 만든 받침에 달린 두상들은 마치 아트 바젤이 아니라 비엔날레에 온 듯한 착각을 자아냈다. 같은 공간의 다른 쪽은 필리핀 작가 시안 다이릿(Cian Dayrit)의 직조 작품이 벽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얼핏 보면 지도처럼 생긴 이 작품은 필리핀의 지형도 위에 텍스트와 아카이브 이미지, 원주민 신화의 상징들을 중첩시킨 것이다. 다이릿은 이를 ‘대항 카토그래피(counter-cartography)’라 부른다. 지도라는 형식 자체가 식민지 시대 서양이 발명하고 강요한 권력의 언어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는 침략자의 도구를 가져다 식민의 역사를 고발하는 데 쓰고 있는 셈이다.

맞은편에 있는 갤러리아 맥스 에스트렐라의 부스에서는 베트남계 미국인 작가 티파니 청(Tiffany Chung)의 자수 작품이 다른 방식으로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벽 한 면을 가득 채운 이 니들 포인트 작품은 향신료 무역로의 세계지도였다. 후추, 계피, 정향이 어떤 경로로 세계를 건넜는지를 추적하는 이 지도는 동시에 향신료를 향한 욕망의 항로들이 어떻게 식민지 건설의 야욕과 겹쳐 있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탄델의 작품을 감상하는 데 서양 미술사 교과서는 필요하지 않다. 콜리족의 역사와 콜리족으로 태어나 성장한 그의 개인사가 더 궁금해진다. 이번 아트 바젤 홍콩에서 느낀 많은 것들이 이런 식이었다. 여러 작품들은 서양 미술사의 흐름 안에서 좌표를 찍거나 읽어낼 필요가 없었다. 그 작품들은 그 자체로 혹은 작품을 둘러싼 이야기 안에서 해석됐다. 미니멀리즘이니 추상표현주의니 장소특정성이니. 그동안 알은 척 뱉어온 수많은 이정표가 무용하다. 이제 다른 지도가 필요하다. 콜리족을 알아야 하고, 필리핀 식민의 역사를 알아야 하고, 향신료 무역이 어떤 착취의 역사였는지를 대충이라도 알고 있는 부지런함이 필요하다.


우한나(Woo Hanna), 인사이츠(Insights) 섹터 부스 전경, 아트 바젤 홍콩 2026. 폐,위,장 등 신체 기관을 직물로 꿰맨 ‘Bag with You’ 시리즈가 설치된 G 갤러리 부스. © Courtesy of Art Basel

우한나(Woo Hanna), 인사이츠(Insights) 섹터 부스 전경, 아트 바젤 홍콩 2026. 폐,위,장 등 신체 기관을 직물로 꿰맨 ‘Bag with You’ 시리즈가 설치된 G 갤러리 부스. © Courtesy of Art Basel

keyword 2 . Softness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중심으로 한 명 혹은 두 명의 작가만 집중 조명하는 인사이츠(Insights) 섹터에서 나는 낯익은 우한나의 패브릭 조각들과 만났다. 한국 작가 우한나의 ‘Bag with You’ 시리즈는 폐, 위장, 장 같은 신체 기관을 직물로 꿰매어 착용하거나 들고 다닐 수 있는 오브제로 만든다. 비정형적인 내장의 형태를 산업의 상징인 직물로 만들고, 지극히 사적인 형태를 겉으로 드러내 휴대 가능하게 만드는 이 작업은 모든 것을 뒤집는다.

같은 페어장의 다른 한편에서는 영국-프랑스 듀오 다니엘 듀어 & 그레고리 지켈(Daniel Dewar & Grégory Gicquel)의 거대한 니트 스웨터 조각이 걸려 있었다. 15년 이상 나무 조각, 석재 조각, 도예, 태피스트리 직조, 울 뜨개질을 넘나들며 작업해 온 이 듀오에 대해 비평가들은 “자신의 손으로 일하는 삶의 시련과 만족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고 평해왔다. 그러나 이들의 스웨터 조각은 재미있는 동시에 진지하다. 인간이 착용하기에는 터무니없이 커서 웃음을 자아내는 이 직물의 형태는 조각의 영속성과 위계의 허위를 폭로하면서, 수공예 노동 시간과 그 온기를 아트 페어라는 차가운 상업 공간 안으로 끌어들인다.

아트 바젤 홍콩 2026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걸개 형태의 면직 작품들이 눈에 띄게 많았다는 것, 그리고 나무나 돌 혹은 브론즈로 된 전통적인 형태의 조각들 못지않게 부드럽거나 연약한 재질의 조각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물론 패브릭 아트가 미술 현장과 제도권에 진입하기 시작한 건 꽤 오래전, 그러니까 대략 루이스 부르주아 시절의 이야기다. 그 시절과 대비해 2010년대 이후 부드러운 조각들이 돌아온 사건은 '귀환'으로 설명한다. 이 귀환은 이미 수많은 미술 이론가들에 의해 여러 번 감지되어 왔고 여러 각도에서 쓴 비평들이 나왔다. 다만, 갤러리가 돈을 내고 부스를 사서 전시하는 냉철한 자본의 세계인 아트 페어에서 패브릭 아트가 점점 더 많이 눈에 띈다면, 다시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봐도 나쁠 것은 없지 않을까?

오래된 질문은 이것이다. 왜 조각은 딱딱해야 하는가? 아니, 왜 조각은 그동안 딱딱했는가? 예술 이론가 로지카 파커는 1984년 저서 〈The Subversive Stitch〉에서 직물은 언제나 젠더화된 매체였다고 지적하며, 천이 사적이고 여성적인 가정 영역의 기호라고 주장했다. 단단함의 젠더를 생각해보자. 돌, 대리석, 청동처럼 단단한 재료들로 조형을 만든 이유는 무엇일까? 매우 단순하다. 그것들이 깨뜨리기 힘들고 좀처럼 닳지 않는 재질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조각은 위계와 영속을 상징하는 수단으로 사용됐다. 그렇다면 동시대 예술에서 천을 사용하는 이유는, 그 단단함이 놓치고 있는 것들을 드러내기 위해서가 아닐까? 천은 그 부드러움으로덧없는 유약함, 논리와 도덕이 아닌 욕망과 감정에 흔들리는 인간의 내면, 호르몬 균형에 이상만 생겨도 완전히 다른 자아가 되어버리는 유기체로서 인간이 가진 유한성을 드러내며, 오히려 전통적 조각이 맺은 영속의 약속이 거짓이었다는 사실을 환기시킨다.

이 흐름은 페어장 밖 오프 사이트에서도 이어졌다. 홍콩 텍스타일 전문 전시 기관 CHAT(Centre for Heritage, Arts and Textile)에서 열리고 있는 〈Threading Inwards〉는 아트위크 전체를 통틀어 가장 크게 감정을 뒤흔드는 전시 중 하나다. 전시의 첫 관문에서 관람객을 맞이하는 것은 한국 작가 한상아의 ‘Threshold 1’(2024)이다. 먹을 물들인 흰 면으로 만든 이 섬유 조각 설치의 시작은 복도에 설치된 문이다. 방문객들은 이 문에 걸린 발을 손으로 치우고 몸으로 스치며 지나가야 한다. 그 너머에는 기증받은 인형들에서 빼낸 솜 충전재로 채워진 파고다 형태의 부드러운 신전이 놓여 있다. 이 파고다를 지나 관람객은 그것과 가지런하게 정렬된 출구를 다시 한번 통과한다. 자궁을 상징하는 입구와 출구의 섬유 조각은 이 세계와 다른 세계를 잇는 포털로 작동한다. 해당 작품의 전시를 책임진 박유진 큐레이터는 이렇게 말했다. “한중일의 동아시아 뿐 아니라 인도 등의 범아시아권 지역 대부분이 직녀 설화의 원형을 공유하고 있어요. 그리고 산업사회 이후에도 여성은 늘 직물과 얽혀왔지요. 그리고 여성과 직물 내면과 영혼의 이야기는 종종 고통과 결부되곤 합니다. 그러나 저희는 이번에는 단순한 내적 치유 너머로 직물의 시간과 정신이 어떻게 커뮤니티와 연결되는지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이어 그는 말했다. “작가들이 다루는 유연한 물질들은 서로 경계를 허물고 섞이며, 때로는 서로를 물들이고 이염시킵니다. 이 과정은 오히려 우리가 서로에게 얼마나 긴밀하고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매개체이자, 무력감을 이겨내는 유연한 저항의 방식이라고 생각해요.”

미술 전문 매거진 〈프리즈〉는 2024년 패브릭 아트의 귀환에 대해 이야기하며 “직물로의 전환은 AI가 우리 모두의 미래라고 선고받은 시대에, 예술의 물성·촉각·신체적 친밀성으로의 귀환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분석했다. 이 말은 올해 아트 바젤 홍콩을 설명하는 데도 꽤 정확한 표현이다. 같은 페어장 안 Zero 10 섹터에서는 AI 생성 디지털 아트와 뇌파를 활용한 자동 드로잉 퍼포먼스가 이어지고 있었다. 탄델의 실과 우한나의 바느질과 한상아의 먹물 든 천은 그것들과는 전혀 다른 언어로 말한다. 유한하고, 측정될 수 없고, 스크린으로 전송할 수 없고, 알고리즘으로 생성될 수 없는 것들에 대해.


랩-시 람(Lap-See Lam), ‘Breath, Vessel (I)’, 2026, 핸드블론 유리·대나무, 블라인드 스폿 갤러리(Blindspot Gallery), 아트 바젤 홍콩 2026. 마르세유 국제 유리 및 시각예술 연구소 레지던시에서 탄생한 람의 신작이다. © Courtesy of the artist and Blindspot Gallery

랩-시 람(Lap-See Lam), ‘Breath, Vessel (I)’, 2026, 핸드블론 유리·대나무, 블라인드 스폿 갤러리(Blindspot Gallery), 아트 바젤 홍콩 2026. 마르세유 국제 유리 및 시각예술 연구소 레지던시에서 탄생한 람의 신작이다. © Courtesy of the artist and Blindspot Gallery

김상우(Sang Woo Kim), ‘Closer 025–026’ 설치 전경, 2026, 캔버스에 유화, 각 41x31 cm, 헤럴드 스트리트(Herald St) 갤러리 부스, 아트 바젤 홍콩 2026. 갤러리는 이 작업을 서구의 시선에 대한 ‘조용한 저항(quiet protest)’이라 표현했다. PHOTO PARK SEHOI

김상우(Sang Woo Kim), ‘Closer 025–026’ 설치 전경, 2026, 캔버스에 유화, 각 41x31 cm, 헤럴드 스트리트(Herald St) 갤러리 부스, 아트 바젤 홍콩 2026. 갤러리는 이 작업을 서구의 시선에 대한 ‘조용한 저항(quiet protest)’이라 표현했다. PHOTO PARK SEHOI

keyword 3 . Inward

2022년 한국에 아트 페어 프리즈가 들어오고 나서 매년 행사장을 찾을 때마다 지겹도록 다양한 사이즈와 색상으로 만난 작품은 루초 폰타나의 찢어진 캔버스였다. 평면인 캔버스 공간 너머를 탐색하며 아무도 가보지 않았던 곳으로 발길을 내딛은 예술사의 획기적인 사건이라는 설명도 질리도록 들었다. 이제 우리는, 아니 어쩌면 나는 그런 ‘예술사’라든지 역사적 사건보다는 좀 더 개인적인 이야기에 끌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많은 인기를 끈 작품 중 하나는 대나무였다. 유리로 만든 대나무. 작가 랩-시 람은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중식당을 운영하는 홍콩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식당의 이름은 ‘대나무 정원’(Bamboo Garden). 식당 뒤편에 있는 방이 가족의 주거 공간이었기에, 그는 중식 향신료와 기름 냄새, 주방에서 이루어지는 광둥어 대화와 스웨덴 손님들이 주고받는 스웨덴어가 뒤섞인 공간을 학습했다. 이 혼종의 세계가 모두 그의 이야기가 됐다. 2014년, 그의 가족들이 1960년대에 외할머니의 손으로 세운 ‘밤부 가든’의 분점인 ‘초이스 가든’을 폐업하기로 결정했을 때, 람은 3D 스캐너를 들고 정든 그 공간을 데이터로 옮겼고, 나아가 초이스 가든뿐 아니라 스웨덴 전역의 다른 중식 레스토랑의 기구·기물·가구 등을 스캔했다. 그를 미술계에 알린 작품 ‘유령의 전시’는 이때 스캔한 가구들을 3D로 프린팅해 배치한 전시다.

이번 아트 바젤 블라인드스팟 갤러리에서 선보인 랩-시 람의 신작 ‘Breath, Vessel’(2026) 연작은 마르세유 국제 유리 및 시각예술 연구소 레지던시에서 만든 핸드블론 조각들이다. 어떤 작품은 반투명한 유리 뗏목 형태로, 또 어떤 작품은 마치 대나무 껍질 바깥으로 투명한 풍선 모양의 유리가 비집고 나온 듯한 형태(2번 참조)로 표현되어 있다. 두 작품을 통해 내게 전달된 심상은 단단해 보이는 대나무, 물 위에 표류할 수 있는 가벼움, 단단한 대나무에 갇힌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 연약한 자아다.

헤럴드 스트리트 갤러리의 부스에서 흠칫 놀랐던 것 역시 빼놓을 수 없다. 날카로운 눈이 나를 째려보고 있었다. 들어 가 보니 갤러리 부스의 거의 모든 벽이 한 남자의 얼굴로 가득 차 있었고, 한국인 모델 출신 작가 김상우의 그 연작들은 전통적인 자화상과는 많이 달랐다. 얼굴 전체가 아니라 눈의 코너, 날카로운 턱선, 깎아낸 듯한 광대뼈의 사면만을 그렸다. 캔버스는 작고, 크롭은 극단적이다. 갤러리스트의 표현에 의하면 “마치 누군가 그를 클로즈업으로 찍다가 셔터를 잘못 누른 것”처럼 보인다.

김상우는 모델로 활동하는 동안 피사체로 수없이 촬영되었고, 그 이미지들은 널리 확산되었으며 상업화되어 팔렸다. 그런 이미지들을 볼 때 유럽 사람들의 시선이 머물렀던 신체는 그의 눈이었다. 쌍꺼풀이 없고 날카롭게 찢어진 작은 눈. 그는 서양인들이 자신의 눈을 ‘한국인처럼 생긴 얼굴’을 식별하는 특징으로 삼는다는 것을 누구보다 자주, 보통 사람보다 훨씬 넓은 범위로 퍼진 이미지를 통해 경험했다. 그의 기괴한 크롭은 바로 그 눈을 담고 있다.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속도로, 자신의 의도로 그는 자신의 눈을 그린다. 갤러리는 이를 ‘조용한 저항’이라 표현했다.

그러니까 아트 바젤에서 늘 내 걸음을 멈춘 작품들은 개인적이었다. 종종 그 개인의 서사가 더 큰 차원의 이야기로 확대되는 경우는 있었다. 동양인 모델의 눈과 대나무가 지시하는 바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직접적이었으나, 그것들이 갖는 은유의 파장은 그보다 훨씬 넓고 깊었다. 앞서 언급한 CHAT의 직물 작품 전시 제목이 〈Threading Inwards〉였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내면으로 꿰매기’라 번역할 수 있는 이 전시는 직물이라는 매체를 통한 내면의 탐색을 주제로 삼았다. 전시 공간이 과거 직물 공장이었으며 텍스타일 소재의 작품을 주로 소개하기 위한 기획이었다고는 하나, 산업사회의 산물인 직물을 내면을 돌아보고 실에 꿰는 심상과 연결한 것은 필연일 수밖에 없다. 흥미롭게도 우리가 타인, 즉 사회를 사유하는 일은 늘 우리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는 과정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번 호 〈에스콰이어〉 저널에서 정신의학 박사 권순재는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efault Mode Network, DMN)’라는 개념을 설명하며 이렇게 말했다. “DMN은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고 있을 때 오히려 활성화되는 특정한 뇌의 영역으로, 주로 내측 전두엽 피질, 후방 대상 피질, 각회 등으로 이루어지는 네트워크다. (…) 인간의 뇌에서 자기 참조와 타인의 감정 이해는 동일한 인지 회로로 처리된다. 즉 자아와 타자는 같은 신경망을 공유한다.”

아트시(Artsy)는 ‘16명의 큐레이터들이 예측한 2026년의 아트 트렌드’라는 기사를 발행한 바 있다. 이 기사에서 테이트 모던의 어시스턴트 큐레이터 제스 백스터는 이렇게 말했다. “작가들은 점점 더 시간의 교차와 신체적이거나 개인적이거나 사회적인 과거의 상처들을 탐구하며, 기억이 어떻게 파편화되고 시간이 어떻게 자기 자신에게로 되돌아오는지를 들여다보고 있다.” 나는 이 경향이 당분간 미술뿐 아니라 문학과 콘텐츠 영역 전반에 계속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한상아, ‘Threshold 1’, 2024, 섬유 조각 설치, CHAT(Centre for Heritage, Arts and Textile) 〈Threading Inwards〉 전시 전경. 먹을 물들인 흰 면으로 만든 파고다 형태의 신전이 여성의 신체를 상징하는 문과 함께 설치되어 있다. © Courtesy of CHAT

한상아, ‘Threshold 1’, 2024, 섬유 조각 설치, CHAT(Centre for Heritage, Arts and Textile) 〈Threading Inwards〉 전시 전경. 먹을 물들인 흰 면으로 만든 파고다 형태의 신전이 여성의 신체를 상징하는 문과 함께 설치되어 있다. © Courtesy of CH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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