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국가의 자동차 시장이 각 나라 별로 압도적 시장 지배력을 갖춘 단일 기업 중심의 '1국 1기업' 체제로 재편되고 있다. 미래차 기술 전환에 필요한 막대한 투자비를 감당하지 못한 기업들이 도태되면서 상위 기업에 시장 지배력이 집중되는 구조가 고착화되는 모습이다. 살아남은 기업은 각 나라의 자동차 산업을 주도하며 다른 나라 기업들과 글로벌 시장에서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사실상 국가대표 체제나 다름없는 구조다. 전문가들은 자동차 산업이 국가 경제와 내수 고용의 핵심인 만큼 정부도 자국 1위 기업의 글로벌 경쟁에 정책적 역량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고 입을 모았다.
현대차·도요타·BYD·빈패스트·페로두아…안방 넘어 글로벌 무대로 나온 국가대표 기업들
일본자동차판매협회 등에 따르면 최근 일본 자동차 시장에선 1위 기업인 도요타의 지배력이 갈수록 공고해지고 있다. 지난해 일본 내수 시장에서 가장 많이 판매된 자동차 10개 중 8개가 도요타 차량이었다. 도요타의 야리스(Yaris)가 판매량 1위에 올랐고 2위와 3위 역시 도요타에서 생산한 코롤라(Corolla)와 시엔타(Sienta)가 차지했다. 도요타는 지난해 해외에서도 역대 최대 판매 실적을 올리면서 '6년 연속 세계 판매량 1위'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반면 도요타를 제외한 혼다와 닛산 등 나머지 자동차 업체들은 경영 악화에 시달리고 있다. 지난해 일본 내수시장에서 혼다의 신차 판매량은 33만3137대로 전년 대비 12% 감소했다. 안방의 위기는 곧장 해외로 이어졌다. 최근 혼다는 글로벌 사업 구조조정에 박차를 가하고 있으며 얼마 전엔 한국 시장에서의 철수 계획도 밝혔다. 지난해 혼다코리아의 한국시장 신차 판매량은 1951대에 불과했다.
같은 기간 닛산도 일본 시장 내 신차 판매량이 전년 대비 19% 감소한 22만7277대에 그쳤다. 경영난에 직면한 닛산은 현재 고강도 구조조정을 진행 중이다. 닛산은 2024회계연도(2024년 4월~2025년 3월) 기준 약 6조3000억원의 당기순손실을 기록했다. 이에 따라 전 세계 공장을 17곳에서 10곳으로 축소하고 전체 인력의 15%인 2만명을 감원하는 계획을 실행 중이다. 지난해 11월에는 일본 요코하마 소재 본사 건물마저 9000억원 가량에 매각한다는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한국과 중국 자동차 시장도 일본과 유사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 지난해 현대차그룹(현대차·기아)의 국내 신차 판매량은 125만8730대에 달했다. 내수시장 점유율(수입차 포함)은 75% 수준을 기록했다. 자동차 업계에서는 르노코리아와 KG모빌리티 등이 내수 회복에 공을 들이고 있으나 현대차그룹과의 격차를 좁히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평가가 우세하다. 현대차그룹의 성과는 내수 시장을 넘어 글로벌 무대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현대차그룹은 지난해 전 세계 시장에서 약 727만대를 판매하며 도요타그룹(1132만대), 폭스바겐그룹(898만대)에 이어 세계 판매량 3위를 기록했다. 이는 미국 제너럴모터스(GM·618만 대)와 스텔란티스(548만대) 등을 크게 앞지른 수치다. 특히 수익성 부문에서는 지난해 영업이익 20조5460억원을 기록하며 폭스바겐그룹(한화 약 15조3000억원)을 처음으로 앞질렀다.
중국 역시 전기차를 중심으로 시장 재편이 본격화되면서 특정 기업 위주의 쏠림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지난해 중국 최대 전기차 업체 비야디(BYD)는 중국 내수 시장에서 15%대의 점유율을 기록하며 폭스바겐·벤츠 등 글로벌 브랜드는 물론 지리·체리 등 자국 경쟁사를 따돌리고 1위를 기록했다. 세계 시장에서의 성과도 남달랐다. 글로벌 시장에서 약 225만대의 전기차를 판매하며 테슬라를 제치고 처음으로 세계 전기차 판매 1위에 올랐다. BYD의 지난해 전체 자동차 판매량은 전년 대비 7.7% 증가한 약 460만대로 집계됐다.
동남아시아 주요 국가들 역시 상황은 다르지 않다. 특히 베트남과 말레이시아는 정부의 보호무역주의와 자국 기업 육성 정책이 맞물리며 토종 브랜드의 시장 독점 구조가 뚜렷해지고 있다. 베트남에서는 빈그룹 산하 자동차 제조사 빈패스트(VinFast)가 내수 시장 강자로 부상했다. 회사 설립 10년도 채 되지 않은 빈패스트는 지난해 베트남 현지 점유율 34.4%를 기록하며 수십 년간 시장을 점유해온 도요타와 현대차를 밀어내고 점유율 1위를 기록했다. 특히 현지 전기차 부문 점유율은 90%에 육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베트남 정부는 자국 내 전기차 등록세를 면제하고 공공기관 차량을 빈패스트로 교체하는 등 파격적인 지원을 통해 빈패스트를 '베트남판 현대차'로 키워내며 '1국 1기업' 체제 구축에 힘을 쏟고 있다.
말레이시아 역시 국영 자동차 기업인 페로두아(Perodua)가 독주 체제를 굳히고 있다. 지난해 페로두아의 말레이시아 내수 시장 점유율은 약 44.8%에 달했다. 2위인 프로톤(Proton, 약 19%)에 비해 20%p 가량 높은 수준이다. 페로두아는 합리적인 가격의 소형차 전략을 통해 서민층의 지지를 얻고 있으며 말레이시아 정부는 외국산 차량에 대해 높은 관세를 부과하는 반면 자국 브랜드에는 세제 혜택을 몰아주는 방식으로 지원 사격하고 있다.
관련업계 전문가들은 아시아 시장에서 나타나는 '1국 1기업 독주 체제'는 단순한 내수시장 재편을 넘어 글로벌 자동차 시장의 판도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전망했다. 자동차 시장을 필두로 한 국가 간 경쟁이나 다름없는 구도가 형성될 수 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홍기용 인천대 경영학과 교수는 "글로벌 자동차 산업이 전기차와 자율주행 등 소프트웨어 중심의 미래차(SDV)로 전환되면서 천문학적인 연구개발(R&D) 비용과 인프라 투자비를 감당할 수 있는 기업 외엔 살아남기 어려워졌다"며 "과거처럼 여러 기업이 내수 시장에서 경쟁하며 효율을 찾는 시대는 지났다"고 강조했다.
이어 "자동차는 고용 파급효과가 매우 큰 산업이다"며 "현재 세계 각국의 추세가 지원을 분산하기 보단 확실한 한 곳을 육성하는 방향으로 흘러가는 만큼 앞으로 글로벌 자동차 시장은 국가대표 간의 경쟁 체제로 빠르게 변화할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우리나라 역시 국가 경제를 위해서라도 거대 자본을 앞세운 글로벌 기업들과의 경쟁이 불가피하다"며 "국가대표 자동차 기업에 대한 세제 지원과 규제 완화 등 국가 차원의 지원이 뒷받침 돼야 할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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