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거진=강산 작가] ‘무엇을 그릴 것인가’. 이 물음은 작업하는 내내 나를 따라다녔다. 그에 대한 해답을 찾지 못했기에, 이 질문은 계속 마음속에 남아 있었을 것이다.
2024년 7월 ‘무엇을 어떻게 그릴 것인가’라는 글을 기고한 적이 있다. 당시 가장 큰 물음은 이것이었다. 사람들이 거실에 걸고 싶은, 예쁘고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것인가. 아니면 대중의 취향과 상관없이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을 그릴 것인가. 철학과 주관을 담은 작업을 할수록, 또 우리나라의 갤러리들로부터 거절을 거듭할수록 내가 지금 추구하는 방향이 맞는지에 대한 의심은 점점 더 커졌다.
내 작품을 본 한 지인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아이, 그런 그림 말고요. 부자된다는 해바라기 그림 그릴 생각은 없으신가요. 그러면 그 작품 제가 살게요.”
물론 그렇게 말씀해주신 점에는 감사했다. 하지만 정말로 구매할 의사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해바라기를 그리지 않을 것을 알기에 하는 농담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럼에도 그 말을 듣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단순했다.
‘해바라기는 그리고 싶지 않은데.’
자존심의 문제가 결코 아니다. 내가 그림을 그리는 이유는 내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내’가 담기지 않은 해바라기 그림을 그리라고 한다면, 그것이 과연 내가 해야 할 작업인지 스스로에게 묻게 될 것이다.
며칠 전 파리에 다녀왔다. 몇 년 전 이미 한 번 방문했던 곳이기에, 이번 여행의 목적은 관광이 아니었다. 파리의 수많은 갤러리를 방문해 나의 작품을 소개하기 위함이었다.
수많은 갤러리와 미술관에서 접한 작품들, 그리고 결정적으로 아를에서 만난 빈센트 반 고흐 덕분에, 그동안 해답을 찾지 못했던 의문-사람들이 갖고 싶은 그림과 온전히 내가 표현하고 싶은 그림 사이에서 무엇을 그릴 것인가-에 대해 조금은 가까워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파리에서 만난 19세기의 화가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그렸다. 사람들의 시선은 애초에 기준이 아니었다.
이 사실을 파리에 와서야 깨달았다는 점이 오히려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돌이켜보면 당연하다. 그러나 그동안 나는 이 당연한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관객이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의식이 작업의 출발점에 먼저 놓여 있었기 때문이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빈센트 반 고흐는 자신의 상황 속에서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을 찾아다녔다. 파블로 피카소는 자신이 아름답다고 느낀 여성의 신체를 반복해서 그렸다. 파리에서 만난 현대의 수많은 화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각자의 시선으로, 각자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대상을 그리고 있었다.
화가의 기준에서 아름다운 것을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표현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화가’의 역할일 것이다.
해바라기 그려주세요.
황금 잉어 그려주세요.
금술 좋은 한 쌍의 새 그려주세요.
액운을 막는 호랑이 그려주세요.
물론 이러한 요구를 무시하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이런 소재들은 이미 기성 작품들 안에서 충분히 반복되어 왔다. 오랫동안 마음속에 남아 있던 이 의문이 어느 정도 정리된 것만으로도, 이번 여행은 충분한 의미가 있다.
아마 누군가가 옆에서 이 이야기를 설명했더라도, 나는 쉽게 납득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루에 4만 보씩 걸으며 직접 보고 느낀 이번 파리 여행은 앞으로의 작업에도 분명 변화를 가져올 것이다.
그리고 이 생각이 나 개인을 넘어 지금 작업을 이어가고 있는 많은 작가들에게도 하나의 질문으로 남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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