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현송 한국은행 총재가 21일 취임하며 통화정책의 틀을 근본적으로 재설계하겠다는 방향을 제시했다. 중동발 공급충격과 글로벌 금융 불확실성이 겹친 상황에서 금리 중심 대응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판단 아래 금융안정·외환·지급결제·구조개혁을 아우르는 '중앙은행 역할 재정립'을 핵심 과제로 내세웠다.
옥스퍼드·프린스턴·국제결제은행을 거친 글로벌 금융 전문가가 한은 수장에 오른 만큼 정책 범위는 통화정책을 넘어 외환 구조와 결제 인프라까지 확장되는 흐름이다. 원화 국제화와 디지털 지급결제 대응까지 포함한 종합 전략이 제시되면서 중앙은행 기능 자체를 재편하려는 시도로 해석된다.
대외 변수에 흔들리는 국내 금융 환경 속에서 글로벌 경험과 네트워크가 정책 실행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 동시에 국내 경제에 대한 대응력까지 입증해야 하는 과제도 함께 제기된다. 복합 위기 국면에서 새 중앙은행 체제가 어떤 정책 성과를 만들어낼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 옥스퍼드·프린스턴·BIS 거친 한은 총재…국제 금융 경험 기반 정책 주목
1959년 대구 출생인 신 총재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철학·정치·경제(PPE) 학사와 경제학 석·박사를 취득했다. 이후 옥스퍼드, 사우샘프턴대, 런던정경대(LSE)를 거쳐 학계에서 활동했고, 2006년 프린스턴 대학교 휴즈-로저스 석좌교수로 재직했다.
정책 영역에서는 영란은행 자문, 뉴욕 연방준비은행 자문회의, 경제정책연구센터(CEPR) 연구원 등으로 활동했으며, 이명박 정부 대통령실 국제경제보좌관을 맡아 정책 경험도 쌓았다. 이후 국제결제은행 통화경제국장으로 재직하며 글로벌 중앙은행 정책 연구를 수행했다.
글로벌 금융에 정통한 한 경제전문가는 신현송 총재에 대해 "아주 훌륭한 학자이자 금융정책 전문가"라고 평가했다. 그는 폴리뉴스에 "이명박 정부 당시 보좌관을 맡으면서도 G20 금융개혁 논의 과정에서 국제회계기준(IFRS) 정비 작업을 마무리하고 나오겠다는 약속을 했고 실제로 이를 지켜낸 인물"이라며 "글로벌 금융 중심지인 런던에서 연구와 교육을 이어온 이력이 신 총재의 시각을 형성한 배경으로 국제 금융 흐름을 현장에서 체득한 경험이 정책 판단에도 반영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상아탑에 머무르지 않고 현실 정책에 참여해 온 경력을 고려할 때 중앙은행 수장으로서 역할에 대한 기대도 적지 않다"고 덧붙였다.
◆ 통화정책 재설계 본격화…금리 중심서 금융·외환까지 확장
신 총재는 취임사에서 기존 정책 틀의 한계를 짚으며 중앙은행 기능 전반의 재설계를 강조했다. 그는 "중동 전쟁에 따른 공급충격으로 물가와 성장 경로의 불확실성이 커졌다"며 "신중하고 유연한 정책 운용을 통해 물가안정과 금융안정을 동시에 도모하겠다"고 밝히고 복합 리스크 확대에 따른 정책 대응 필요성을 짚었다. 이어 "정책 간 상충 가능성을 최소화하기 위해 수단을 재점검하고 정부와의 공조를 강화하겠다"며 "시장과의 양방향 소통도 확대하겠다"고 덧붙였다.
정책 운용의 축은 금리 중심에서 복합 대응 체계로 확장된다. 통화정책이 단일 목표 대응에서 벗어나 금융안정·외환·지급결제까지 포괄하는 구조로 전환되는 흐름이다.
금융안정 정책에서도 접근 방식의 변화가 제시됐다. 은행과 비은행, 국내와 해외의 경계가 흐려지는 환경에서 건전성 지표 중심 관리에서 벗어나 시장 가격 지표까지 활용 범위를 넓히겠다는 방향이다. 비은행 금융기관과 부외거래, 비전통 금융상품까지 분석 대상을 확대해 금융 불균형을 선제적으로 관리하겠다는 구상이다.
결국 금리 조정 중심 통화정책에서 벗어나 금융시스템 전반을 관리하는 방향으로 중앙은행 역할을 확장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 외환·디지털·구조개혁까지…기대와 과제 병존
외환과 지급결제 분야에서는 제도 개선과 디지털 대응이 함께 제시됐다. 외환시장 거래시간 확대 및 구조 개선, 역외 원화결제 인프라 확대,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와 예금토큰 활용 확대 등이 포함됐다.
이 과정에서 원화 국제화를 통해 통화 위상을 높이겠다는 방향도 명확히 제시됐다. 외환시장 구조와 지급결제 인프라를 함께 정비해 통화 역할을 확장하겠다는 구상이다.
한국은행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외환시장 구조 개선과 지급결제 인프라 확충을 함께 추진하는 방향은 원화 활용 기반을 넓히려는 접근"이라며 "글로벌 금융과 통화정책 경험을 바탕으로 정책 실행 과정에서도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다만 일부에서는 해외 자산 비중과 글로벌 중심 경력을 둘러싸고 이해충돌 가능성과 국내 경제 상황에 대한 인식 수준을 점검해야 한다는 문제도 제기됐다. 글로벌 경험이 강점인 만큼 국내 시장에 대한 적응과 정책 실행력이 중요하다는 지적이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글로벌 금융 환경을 기준으로 정책을 바라보는 시각 자체가 강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국제 금융 흐름을 중심에 두고 정책을 설계해온 만큼 한국경제 역시 그 연장선에서 이해하고 대응할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신 총재는 취임식에서 "제시한 과제는 결코 쉽지 않지만 한국은행의 역량과 경험을 바탕으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며 "조직 변화와 함께 실질적인 정책 성과를 만들어 나가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글로벌 금융시장 불확실성이 확대된 상황에서 새로 취임한 중앙은행 수장이 국제 금융 경험과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복합 위기 대응 역량을 발휘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폴리뉴스 권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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