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송 전형필 탄생 120주년을 맞은 올해, 간송미술관은 다시 한번 그가 남긴 시간을 돌아본다. 일제강점기라는 격동의 시대에 우리 문화유산을 지키기 위해 사재를 들여 작품을 수집하고, 1938년 성북동에 보화각을 세워 한국 최초의 사립 미술관을 연 인물이 바로 간송 전형필이다. 그의 수집은 단순한 취미나 개인의 안목에 그치지 않았다. ‘문화보국(文化保國)’이라는 신념 아래 이루어진 선택은 이후 간송 컬렉션이라는 이름으로 축적되었고, 오늘날 한국 미술사를 연구하는 데 하나의 기준점이 되는 방대한 문화유산의 집합으로 남았다.
지금 그 유산의 현재를 책임지고 있는 이는 간송미술문화재단 이사장이자 서울∙대구 간송미술관 관장 전인건이다. 간송의 손자인 그는 성북동 보화각이 지닌 역사적 공간성을 지키는 동시에 2024년 개관한 대구 간송미술관을 통해 컬렉션 공개 범위와 연구·교육 기반을 확장해왔다. 전통을 단지 보존의 대상으로 두기보다 오늘의 전시 언어와 기술, 관람 방식 속에서 다시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일 또한 그의 중요한 과제다.
올해 간송미술관은 컬렉션의 형성과 의미를 되짚는 전시를 서울과 대구에서 이어간다. 서울 간송미술관에서는 경매를 통해 수집된 문화재의 이야기를 따라가는 〈경성미술구락부〉(가제)와 작품의 내력과 감식의 전통을 보여주는 〈상서〉(가제)가 열리고, 대구 간송미술관에서는 〈추사의 그림 수업〉(가제)과 〈겸재 정선〉(가제)을 통해 조선 회화의 흐름을 다시금 살핀다. 간송이 남긴 문화보국 정신이 오늘날 어떤 의미로 이어지고 앞으로 어떤 형태의 K-헤리티지로 확장될 수 있는지, 그 이야기를 듣기 위해 전인건 관장을 만났다.
올해는 간송 전형필 선생이 태어난 지 12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120년이라는 시간의 의미를 어떻게 보시나요? 보통 동북아시아에서는 60년을 하나의 단위로 봅니다. 전통 시간 계산 체계 ‘12지지’가 한 바퀴 돌면 60년이 되는 방식이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한 사람의 삶도 60년을 한 주기로 생각해왔습니다. 환갑이 되면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는 감각도 거기에서 나왔고요. 그런 의미에서 120년은 두 번의 60년, 두 번의 삶을 지난 시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간송 선생은 안타깝게도 환갑을 넘기지 못하고 돌아가셨지만 간송이라는 이름과 그 의미, 또 그가 해온 일은 세대를 넘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올해 맞이한 120주년은 어찌 보면 세 번째 60년을 준비하는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지난 120년간 우리가 무엇을 해왔는지 돌아보는 계기가 되는 해이기도 합니다.
이번 120주년을 맞이하는 행보 역시 비장합니다. 먼저, 서울 간송미술관에서 열리는 〈경성미술구락부〉와 〈상서〉에 대해 설명해주실 수 있나요? 올해 열리는 두 전시는 간송 컬렉션과 서울 간송미술관이 자리한 보화각, 그리고 간송미술관의 역사를 돌아보는 3개년 계획의 마지막 단계입니다. 간송 컬렉션이 어떻게 형성되고 축적되었는지를 보여주는 전시이기도 하죠. 봄에 열리는 〈경성미술구락부〉는 경매를 통해 컬렉션으로 들어온 문화재를 중심으로 구성됩니다. 긴박하게 흘러가는 경매 현장에서 간송 선생이 어떤 기준과 판단으로 작품을 구입했는지 살펴볼 수 있는 전시입니다. 가을에는 〈상서〉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상서는 중요한 작품을 담은 오동나무 상자 안에 함께 들어 있는 글로, 소장자나 작품을 잘 아는 사람이 작품의 내력과 구입 과정 등을 기록한 것입니다. 작품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죠. 이번 전시를 통해 간송의 스승인 위창 오세창 선생이나 소주 손재형 선생 같은 분들이 문화재를 어떻게 바라봤는지도 함께 살펴볼 수 있을 것입니다.
〈경성미술구락부〉, 그리고 이어지는 전시 〈상서〉에서 주목해야 할 작품이 있다면요? <경성미술구락부>전의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는 백자 ‘청화철채동채초충난국문병’을 꼽을 수 있습니다. 원래 일본의 은행가이자 유명 컬렉터 모리 고이치가 소장했던 작품으로, 그가 세상을 떠난 뒤 <경성미술구락부> 경매에 나오게 됐습니다. 당시 일본의 대표적 아트 딜러 야마나카 상회 주인이 직접 올 정도로 중요한 경매였고, 그중에서도 이 작품은 가장 주목받았습니다. 간송은 이 작품을 <경성미술구락부> 사상 최고가에 구입했습니다. 조선 18세기 백자의 미학적 정점을 보여주는 작품이자 조선 백자의 기준이 되는 작품이 우리나라에 남아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이 공개되는 것만으로도 18세기 조선 백자의 수준을 확인 가능하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상서〉전에서는 위창 오세창 선생이 상서를 남긴 <혜원전신첩>을 주목해야 합니다. 해외로 유출됐다가 오랜 노력 끝에 다시 찾은 작품이기도 하고, 예술사뿐 아니라 생활사와 민속사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무엇보다 위창이 직접 남긴 상서가 함께 전해지기에 이미 익숙한 이미지도 전혀 다른 시각에서 보게 됩니다.
한편, 대구 간송미술관에서는 〈추사의 그림 수업〉과 〈겸재 정선〉 등 조선 회화를 집중 조명하는 전시가 이어질 예정입니다. 서울 전시가 간송 컬렉션의 형성과 축적 과정을 보여준다면, 대구 전시는 조선 회화가 어떤 흐름 속에서 전개되었는지를 보다 넓은 맥락에서 살펴보는 전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봄 전시 〈추사의 그림 수업〉에서는 추사의 회화 세계와 제자들, 그리고 청나라 학자들과의 교류를 보여줍니다. 많은 분이 추사체 글씨를 먼저 떠올리지만, 추사는 그림에서도 뛰어난 경지에 이른 인물입니다. 대표적으로 ‘세한도’를 보면 선비의 기개와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가을에는 〈겸재 정선〉전이 이어집니다. 작년 호암미술관 전시의 연장선에서 보다 확장된 형태로 겸재 정선의 작업 세계를 엿볼 수 있을 것입니다.
추사와 겸재, 두 작가가 어떠한 지점에서 18세기 조선 회화를 대표한다고 보셨나요? 두 전시를 관통하는 시기인 18세기는 조선 문화의 황금기인 동시에 동북아 전체 문화 속에서 중국 문화의 영향을 조금 벗어나 우리만의 문화를 형성하던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그 핵심에 ‘진경’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진경이 실경과 다르다는 점입니다. 실경이 보이는 풍경을 그대로 그리는 것이라면, 진경은 그리는 이의 생각과 철학, 가치관이 담긴 풍경입니다. 그 흐름을 본격적으로 펼쳐 보인 대표적 인물이 겸재 정선이기에 〈겸재 정선〉전은 매우 중요하죠. 〈추사의 그림 수업〉전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이미 18세기 조선 문화 속에서 어느 정도 우리 문화의 성격이 형성된 상황에서 추사와 그 일파는 동북아 문화 교류의 중요한 축을 담당했습니다. 박제가나 연암 같은 실학자들이 중국과 조선을 오가며 만들어낸 지적 교류의 흐름 속에서 조선이 동북아 문화 교류의 중요한 축이었다는 점을 보여주죠. 결국 한국화의 전통 역시 추사의 제자, 그리고 그 제자들의 계보를 통해 지금까지 이어져왔다는 점에서 해당 전시는 단순히 18세기 조선 회화를 소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 문화 형성과 동북아 문화의 흐름까지 보여줍니다.
2024년 개관한 대구 간송미술관은 간송 컬렉션을 새로운 방식으로 소개하는 공간으로 주목받았습니다. 기존 서울 간송미술관과의 차별점이 있다면요? 간송미술관의 활동이 재단 형태로 정비된 것은 2013년입니다. 그때 중요한 목표 중 하나가 지역 거점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보화각 전시는 작품 보존 환경 때문에 봄과 가을 2주 정도만 가능했기에 전국 관람객이 방문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간송이 주창했던 문화보국이란 결국 실증적 연구를 통해 우리 문화와 문화사의 수준을 보여주는 일이었고, 전시는 그것을 세상에 전하는 데 가장 중요한 매체가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여러 논의 끝에 대구에 미술관을 세우게 됐습니다. 대구의 가장 큰 특징은 상설 전시가 가능하다는 점입니다. 언제든 작품을 볼 수 있다는 것은 교육과 접근성 측면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정리해보면 서울 보화각은 역사와 서사가 응축된 공간에서 특별한 전시를 경험하는 곳이고, 동시에 연구와 보존의 중심지입니다. 반면, 대구는 상설 전시와 교육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공간입니다. 더 나아가 대구·경북이 선비 문화와 지류 문화유산이 많이 남아 있는 지역이라는 점에서 문화유산 보존과 연구의 거점 역할까지 맡고 있습니다.
오늘날 시점에서 간송 전형필 선생이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간송 선생이 남긴 가장 중요한 유산은 단순히 많은 문화재를 모았다는 사실보다 문화재를 바라보는 기준을 세웠다는 데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실장과 여러 지방관장을 지낸 이용복 선생이 “간송 컬렉션 없이 조선 회화사를 공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그만큼 간송 컬렉션은 개인의 취향에 따라 모인 것이 아니라 한국 미술사의 흐름을 실증적으로 세우기 위해 필요한 기준작과 그 계통을 확보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는 의미입니다. 겉보기에는 다양하고 방향성이 모호해 보이지만, 그것을 계통 측면으로 바라보면 전모가 드러납니다. 이를 증명하듯 간송 선생은 작품을 수집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것을 연구하고 기록했습니다. 제작 시기와 작가, 양식의 특징을 실증적으로 검토하면서 작품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판단했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기준작이 형성됐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간송 컬렉션은 한국 미술사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자 기반으로 작동합니다. 결국 이 컬렉션은 한국 미술사를 압축해 보여주는 동시에 한국 미술사를 뒷받침하는 토대가 된 거죠.
오른쪽 장승업, ‘어자조련(팔준도)’. © 간송미술문화재단
간송 선생이 강조한 문화보국이 오늘날 어떤 의미로 이어지고 있다고 보시는지도 궁금합니다. 문화보국이라는 말은 간송미술관과 재단, 그리고 간송이 해온 일을 하나로 연결하는 매우 중요한 키워드입니다. 일제강점기에는 문화유산을 지키고 그것을 연구함으로써 나라의 정신을 지키는 것이 문화보국이었습니다. 광복 이후에는 그것을 연구하고, 그 연구를 이어갈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사람들을 키워내는 일이 두 번째 문화보국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의 문화보국은 그동안 축적해온 연구와 보존을 바탕으로 더 많은 사람, 다양한 사람에게 문화유산을 더 가깝고, 재미있게 전달하는 일이라고 봅니다. 문화보국의 핵심 정신은 같지만, 시대에 따라 방식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간송 컬렉션 역시 처음에는 개인의 수집에서 출발했지만, 지금은 많은 사람이 향유하는 문화유산이 된 것처럼요.
전통 회화와 고미술을 오늘날 관람객에게 보여주는 방식에도 많은 변화를 시도했어요. 2014년 DDP(동대문디자인플라자)에서 전시를 하면서 본격적으로 고민하게 됐습니다. 디지털라이제이션은 원작을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원작으로 가는 입구를 넓히는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전통 미술을 감상하는 방식도 단순한 정적 감상에서 그치는 것이 아닌 영상과 공간, 향과 몰입 같은 여러 요소를 통해 보다 능동적으로 작품과 관계 맺는 방향으로 확장될 수 있다고 봅니다. 중요한 것은 문화유산이 여전히 사람들에게 흥미로운 것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는 점이고, 그러기 위해서는 감상 방식 역시 계속 업데이트될 필요가 있습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관람객 스스로 관심을 갖고 더 알고 싶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를테면 ‘미인도’ 진본과 디지털 콘텐츠를 함께 두었을 때, 어떤 이는 디지털에 먼저 반응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 자체를 잘못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익숙한 방식으로 다가간 뒤 원작에 대한 호기심으로 이어질 수 있으니까요.
미술관의 역할은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다고 보시나요? 미술관 역시 하나의 문화 커뮤니티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시간을 들여 찾아올 만한 공간이 되어야 하죠. 시민 참여 프로그램 역시 그런 맥락에서 문화유산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커뮤니티를 넓혀가는 과정입니다. 동시에 대구 간송미술관에서는 지류 문화유산 수리·복원 센터 설립도 추진하고 있습니다. 장기적으로는 대구·경북 지역 문화유산 보존의 거점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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