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과 자연, 궁정과 불교…수묵화처럼 펼쳐진 서사의 교차로[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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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과 자연, 궁정과 불교…수묵화처럼 펼쳐진 서사의 교차로[여행]

이데일리 2026-04-17 06:00:00 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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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이(대만)=글·사진 이데일리 강경록 여행전문기자] 대만 고속철도(THSR) 자이역을 빠져나오면 가장 먼저 마주하는 것은 지평선까지 거침없이 뻗은 ‘평평함’이다. 자이(嘉義)의 들판은 낮고 넓다. 아리산으로 오르는 길의 팽팽한 긴장감도, 타이베이 도심의 빽빽한 소음도 여기엔 없다. 대신 이 땅에는 바람이 먼저 지나가고 하늘이 한 박자 천천히 내려앉는다. 국립고궁박물원 남부분원은 바로 그 광막한 여백의 대지 위에 세워졌다.

박물관은 대개 도시 한복판에서 압도적인 권위를 드러낸다. 이곳은 조금 다르다. 끝없이 펼쳐진 수면과 유려한 곡선의 건축이 관람객의 호흡을 먼저 느슨하게 풀어놓는다. 문명의 정수를 마주하기 전, 먼저 시선을 비우게 한다.

대만 자이현 국립고궁박물원 남부분원 전경. 건축은 농묵·비백·선염 등 동양 수묵화의 세 붓질을 모티프로 삼아 유선형 외관을 완성했다. 설계를 맡은 야오런시는 건축의 비어 있음과 채워짐이 서로 교차하는 공간 구성을 강조했다.


◇즈메이교를 건너, 수묵의 시간 속으로

남부분원의 첫인상은 유물이 아닌 건축 그 자체로 다가온다. 약 70헥타르에 달하는 부지 위에 대만 건축가 야오런시(크리스 야오)는 동양 수묵화의 세 가지 붓질인 농묵(濃墨), 비백(飛白), 선염(渲染)을 건축적 언어로 구현했다. 유선형의 외관과 비어 있음과 채워짐이 교차하는 구조는 남부분원 건축의 핵심이다. 북부에 집중됐던 문화 인프라를 남부로 확장하겠다는 취지도 이 공간에 담겼다. 남부분원은 스스로를 ‘아시아 예술문화 박물관’으로 규정한다. 이는 타이베이가 독점해온 황실의 권위를 남부의 비옥한 토양으로 옮겨와, 대만의 정체성을 ‘아시아의 교차로’로 재정의하려는 웅숭깊은 의지의 산물이다.

전시실로 향하는 길은 ‘즈메이교’라는 긴 보행교를 건너는 것으로 시작된다. 수면 가까이에 놓인 142m 길이의 대형 강재 아치교다. 인공호수 바닥 방수층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교각 없이 설계됐다. 다리 위에 서면 박물관의 곡선과 수면이 한 화면에 들어온다. 남부분원이 실내 전시만이 아니라 공원과 수공간까지 포함한 하나의 문화 풍경으로 기획됐다는 점이 이 구간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대만 자이현 국립고궁박물원 남부분원 전경. 건축은 농묵·비백·선염 등 동양 수묵화의 세 붓질을 모티프로 삼아 유선형 외관을 완성했다. 설계를 맡은 야오런시는 건축의 비어 있음과 채워짐이 서로 교차하는 공간 구성을 강조했다.


호수 위를 가로지르는 이 다리 위에서 관람객은 일상의 소란을 뒤로하고 고요의 심연으로 걸어 들어간다. 특히 해 질 녘, 붉게 물든 노을이 현대적인 곡선의 건축물과 호수에 투영되는 장면은 이곳이 왜 대만의 새로운 ‘인생샷’ 명소로 불리는지 단번에 이해시킨다. 수면 위를 스치는 자이의 습한 바람이 뺨을 스치고, 다리 끝에 닿을 때쯤이면 시선은 어느새 낮게 가라앉아 문명을 마주할 경건한 준비를 마치게 된다.

육중한 문을 열고 들어서면 밖의 열기와는 대조적인 서늘하고 정갈한 공기가 몸을 감싼다. 남부분원은 중국 역대 왕조의 유물을 넘어 불교와 차(茶), 직물 등을 통해 아시아 각국이 서로의 문명을 어떻게 주고받으며 변주했는지를 조명한다.

국립고궁박물원 남부분원 대표 소장품인 청대 ‘취옥백채(翠玉白菜)’. 오는 6월 7일까지 자이 국립고궁박물원 남부분원에서 공개한다.


◇들판을 가르는 천마(天馬)의 질주

가장 묵직한 울림을 주는 곳은 상설전이다. 칠흑 같은 어둠이 깔린 전시실 안, 오직 유물만을 비추는 섬세한 핀 조명 아래 금동불의 미소가 하나둘 떠오른다. 485년 제작된 북위의 ‘불상’ 앞에 서면 숨이 잠시 멎는다. 한국의 삼국시대 불상들과도 궤를 같이하는 그 고고한 미소와 단정한 옷주름은, 낯선 땅에서 익숙한 평온함을 마주하게 하는 묘한 경험을 선사한다. 종교가 조각을 넘어 공간과 구조의 예술이 되는 지점을 목격하게 되는 순간이다.

현재 박물관은 병오년(丙午年) ‘말의 해’를 맞아 특별한 활기로 가득하다. 기획전을 통해 인간과 가장 오랫동안 호흡해 온 동물이자, 문명의 전령이었던 말의 역동성을 조명한다. 당나라 시대의 화려한 기마 인물상부터 실크로드를 건너온 서역의 말 그림까지, 전시장에는 시공을 초월한 질주가 이어진다.

국립고궁박물원 남부분원 특별전에 나온 청대 공예품. 남부분원은 청대 장신구와 장식 문화를 소개하고 있다.




특별전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백미다. 본원과 순환 전시되는 ‘취옥백채’ 앞은 숨죽인 관람객들로 가득 찬다. 차갑고 단단한 옥을 싱싱한 배추의 질감으로 빚어낸 장인의 집요한 미감은 찰나의 자연에 영원한 생명을 부여하려는 동아시아 미학의 정수를 보여준다. 옥 꽃잎과 연녹색 받침, 금빛 수술이 조화를 이룬 수선화 화분은 생화보다 더 생생한 생명력을 뿜어내며 보는 이의 감각을 일깨운다.

박물관은 밖의 문명을 가져와 보여주는 동시에, 자이 자체가 품은 시간의 층위를 해석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1층 전시실은 아리산의 철도와 임업, 그리고 이 땅을 일궈온 사람들의 삶을 하나의 맥락으로 엮어낸다. 자이가 단순히 아리산으로 가기 위한 경유지가 아니라 수많은 이민과 문화가 교차하며 만들어진 복합적인 땅임을 박물관은 묵직하게 웅변한다.

관람을 마친 뒤 들러야 할 곳은 또 있다. 세련된 감각으로 무장한 박물관 굿즈 샵이다. ‘취옥백채’를 모티프로 한 아기자기한 소품부터 현대적인 디자인의 다기 세트까지, 이곳의 MD(기획 상품)들은 한국인 여행자들에게 또 다른 수집의 즐거움을 안겨준다.

아리산이 자이의 거대한 ‘자연’이라면, 국립고궁박물원 남부분원은 그 자연을 지탱하는 ‘서사’다. 산이 수천 년의 숲으로 인간을 압도한다면, 이 박물관은 수천 년의 사상과 취향으로 관람객을 설득한다. 자이의 들판 위에 그어진 먹빛 한 획 속에, 우리가 잊고 지낸 아시아의 고요한 표정이 오롯이 담겨 있다.

국립고궁박물원 남부분원 상설전에 나온 불상. 이 전시는 아시아 각 지역의 불교 조형과 경전을 함께 보여주는 남부분원 대표 상설전이다.


◇여행 수첩

▶찾아가는 법= 대만 고속철도(THSR) 자이역 2번 출구에서 무료 셔틀버스나 버스로 이동 가능하다. 일반 기차를 이용할 경우 자이역(TRA) 후역에서 BRT를 이용하면 된다.

▶운영 시간= 오전 9시 ~ 오후 5시 (주말 및 공휴일은 오후 6시까지). 매주 월요일은 정기 휴관이다.

▶입장료= 성인 기준 150TWD. 국제학생증 소지 시 할인이 가능하다.

▶관람 팁: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대여비 약 150대만달러, 신분증 지참)는 유물 뒤에 숨은 서사를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박물관 1층에 물품 보관함이 잘 갖춰져 있어 무거운 짐을 맡기고 가볍게 관람하기 좋다. 박물관 내부 에어컨이 매우 강력하므로 여름철에도 얇은 가디건이나 숄을 챙기는 것이 현명하다.

▶전시 문의= 2026년 말의 해 특별전 ‘천마의 축제’는 6월까지 이어지며, 취옥백채 등 주요 순환 유물의 상세 전시 일정은 홈페이지에서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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