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매거진=이응 작가] 미술 시장에 진입한 지 일 년이 조금 넘었다. 지난 십 년간은 주로 레지던시나 공모를 통한 기획 전시를 통해 선정과 탈락이 반복되는 제도권 안에서의 삶은 한계가 명확했고, 창작의 지속가능성을 고민하며 스스로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렇게 미술 시장이라는 낯선 규칙 위로 작업의 자리를 조금 더 확장해 갔다.
시장에 진입하며 가장 먼저 체감한 것은 내가 오래 지향해 온 삶의 방식과의 충돌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작업실 없이 생활권 안에서 작업과 삶을 일치시키는 모듈화된 삶을 지향해 왔다. 전시를 위해 설계된 개념들은 현장에서 설치되고 해체되는 것으로 소임을 다했다.
그런데 시장에 내놓기 위해서는 설치와 철수로 끝나는 작업이 아니라, 누군가의 손으로 건너가 다른 공간에 머물 수 있는 물질적 형태를 만들어야 했고, 자연스럽게 적재와 보관, 그리고 그것을 감당할 공간의 문제가 따라붙었다. 물건을 최소화하던 유목민적 습성이 사물의 부피가 주는 피로감과 부딪히기 시작했다. 작품을 만든다는 것은 곧 일상의 부피를 늘리는 일이었고, 그것은 삶의 형식을 다시 조립해야 하는 일처럼 느껴졌다.
무언가를 만들어 판다는 것은 자본주의에서 가장 기본적인 규칙이다. 생각해 보면 작품 역시 예외 없이 그 규칙 속으로 있다. 누군가가 만든 것을 시장에 내놓고, 누군가는 그것을 산다. 형식만 놓고 보면 그것은 다른 상품의 거래와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작품을 판다는 일은 왜 식품이나 공산품을 파는 일과 같지 않게 느껴지는가.
이 차이에 대해 생각할수록, 오히려 작품의 쓸모없음이 눈에 들어왔다. 작품은 대체로 실용적이지 않다. 그것이 있어야만 생활이 가능해지는 것도 아니고, 당장 생존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도 아니다. 많아야 집 안의 분위기를 바꾸거나, 기관과 건물의 벽면을 채우는 정도의 역할을 할 뿐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왜 작품을 사는가. 왜 각기 다른 작가가, 제각기 다른 이유와 방식으로 만들어 낸 이 개인적인 창작물에 공산품보다 훨씬 더 큰 값을 지불하는가.
작품은 분명 시장에서 거래되지만, 거래된다는 사실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무엇이 남아 있는 것 같다. 그 생각을 할 몇 해 전쯤 나는 꽤 긴 창작의 슬럼프를 겪고 있었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무거운 마음으로 자주 같은 질문을 되뇌곤 했다. 내가 만든 것들이 세상 어디로 흘러가 누구에게 닿을 수 있을까. 나는 이 세계에 무엇을 줄 수 있는 사람인가. 예술가로 산다는 일이 무엇을 주고받는 일인지에 대해 자주 중얼거렸다.
얼마 전 루이스 하이드(Lewis Hyde)의 ‘The Gift’를 읽으며, 나는 이 오래전 고민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정리할 수 있었다. 작품은 시장에서 거래될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 어떤 층위를 지닌다. 하이드는 예술작품을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선물’의 논리 위에서 다시 생각하게 한다. 그에게 예술은 세계로부터 먼저 받은 것을 다시 세상에 돌려보내는 순환에 가깝다. 재능도 영감도 작가가 완전히 무에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세계 바깥으로부터 도착한 어떤 것이라면 작품은 그것을 자기 안에 소유하는 데 머무는 것이 아니라 다시 흘려보내는 행위가 된다. 그렇게 생각하면 작품을 만든다는 일은 단순히 물건을 생산하는 일이 아니라, 내가 받은 것을 어떤 형식으로 다시 건네줄 것인가를 고민하는 일이 된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자. 하이드가 기대고 있는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에 따르면, 선물은 순수한 호의가 아니라 주고, 받고, 다시 되돌려주는 의무를 통해 관계를 조직하는 사회적 구조다. 선물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라 관계를 열고 지속시키는 매개이며, 그렇기 때문에 경제적 가치만으로는 다 설명되지 않는다. 하이드는 바로 이 증여의 논리를 예술에 가져와, 작품이 시장에서 거래되더라도 여전히 단순한 상품으로 환원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내가 만드는 작품 역시 팔리는 물건이기 이전에, 세계로부터 받은 것을 다시 세계에 건네는 하나의 선물일 수 있지 않을까?
시장에서 빵을 사는 행위와 선물을 주고받는 행위는 겉으로 둘 다 ‘무언가가 이동한다’는 점에서는 비슷해 보여도 사회적 구조는 전혀 다른데, 시장 교환은 즉시 등가 교환을 지향하며 돈을 내고 물건을 받고 나면 대부분의 관계는 종료된다. 하지만 증여는 관계를 끝내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계속 열어두는 장치라는 점에 있다. 선물을 받은 사람은 언젠가 되돌려주어야 하고, 그사이에는 기억, 기대, 빚, 체면, 우정, 긴장이 계속 남아 있다. 즉 상품 교환은 거래를 닫는 경향이 있고, 증여는 관계를 열어두는 경향이 있다.
모스가 왜 ‘받아야 할 의무’까지 강조했는지도 중요한데, 모스에게 받는 일은 수동적 반응이 아니다. 받는다는 것은 상대가 제안한 관계에 들어간다는 뜻이다. 반대로 선물을 거절하는 것은 그 관계를 거부하거나 상대의 체면을 손상시킬 수 있는 행동이 될 수 있다. 그러니 증여에서는 주는 사람만 능동적인 것이 아니라, 받는 사람도 이미 사회적으로 중요한 결단을 하는 셈이다. 이 점 때문에 선물은 개인의 순수한 감정보다 상호 승인과 사회적 인정의 체계에 훨씬 더 가까워진다.
사람들은 단지 유용한 물건을 얻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동맹을 맺고, 지위를 확인하고, 기억을 남기고, 사회적 질서를 재생산하기 위해서 교환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처음부터 고립된 개인으로 시장에 들어오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빚지고, 이미 관계 안에 있고, 이미 무엇인가를 받고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 태어나면서 언어를 받고, 돌봄을 받고, 문화와 이름을 받고, 법과 관습을 받는다. 여기서 증여는 고대 사회의 특이한 풍습이 아니라, 인간 사회가 어떻게 상호의존과 의무, 기억과 호혜 속에서 성립하는지를 보여주는 원형적 구조가 된다.
다시 루이스 하이드로 넘어와 그는 ‘The Gift’에서 모스가 말한 증여의 순환 구조를 예술에 옮겨와, 예술가의 영감과 재능 자체도 일종의 선물이며 작품 역시 다시 세상으로 건네지는 ‘선물’이라고 말한다. 모스에게 증여란, 주기·받기·되돌려주기라는 의무를 통해 사회 전체를 조직하는 관계의 구조이며, 하이드는 바로 그 구조를 빌려 예술 작품이 단순한 상품이 아니라 세계로부터 받은 것을 다시 세계로 돌려보내는 순환의 매개라고 보고 있다.
그래서 지금 내게 작품을 만든다는 일은 한편으로 물질을 만들고, 보관하고, 운반하고, 가격을 매기고, 시장에 내놓는 일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것은 여전히 내가 이 세계로부터 받은 질문과 감각, 형식의 가능성을 다시 바깥으로 건네는 일이기도 하다. 작품은 팔릴 수 있지만, 팔리는 것으로만 다 설명되지는 않는다. 상품이면서도 상품으로만 닫히지 않고, 사적인 표현이면서도 끝내 누군가에게 건네질 가능성을 품고 있는 것. ‘선물’이라는 말은 내게 그 모순적이고도 불안정한 자리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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