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검찰이 국제 정세 불안에 따른 유가 변동을 틈탄 가격 담합 의혹에 휩싸인 SK그룹의 정유 계열사(SK이노베이션, SK에너지)를 정조준하면서 '정유업계의 가격 담합' 의혹이 사회적 이슈로 떠올랐다. 이번 수사는 이재명 대통령이 유가 급등 시기 일부 업체의 폭리 행태를 강하게 질타하며 국민적 감시를 당부한 직후 전격적으로 이뤄졌다는 점에서 정부의 강력한 사정 의지가 반영된 결과라는 해석이 팽배하다. 특히 SK그룹이 과거 미국에서도 수차례 유류 납품 담합으로 막대한 벌금을 문 전례를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재조명되면서 수사 결과에 더욱 많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대통령 질타한 유가 담합 행태…SK이노 정유 계열사들, 과거 미국서도 담합 배상금 망신
정유업계 등에 따르면 지난달 23일 검찰은 미국-이란 전쟁 여파를 의식한 유가 담합 의혹을 받고 있는 SK에너지 등 4개 정유사에 대한 강제 수사에 착수했다. 이번 수사는 이 대통령이 지난달 17일 국무회의에서 유가 급등을 악용한 일부 주유소의 폭리 행태를 비판한 지 6일 만에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당시 이 대통령은 SNS를 통해 석유 최고가격제 시행을 알리는 동시에 부당이득을 취하는 행위에 대한 국민적 감시와 즉각적인 신고를 당부하며 시장 정화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피력한 바 있다.
SK에너지는 SK그룹 정유 사업을 이끄는 SK이노베이션이 지분 100%를 보유하고 있다. 한국석유관리원에 따르면 지난 2월 SK에너지의 전국 주유소 등록 업체 수는 2645개로 시장 점유율 24.8%를 기록하며 업계 1위를 기록하고 있다. 국민 실생활과 밀접한 정유 시장을 선도하는 수준의 점유율이라는 점에서 검찰의 타깃이 된 정유사 중 SK에너지의 수사 결과에 유독 많은 관심이 쏠린다.
이은희 인하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유류는 자동차부터 화물 운송, 기계 가동 등 일상생활과 산업 전반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재다"며 "대표적인 희소자원인 만큼 기업들이 담합을 통해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것은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사안이다"고 지적했다. 이어 "특히 전쟁발 에너지 공급 위기로 국민들이 유류비 부담을 크게 체감하는 상황에서 시장을 지배하는 기업들이 가격을 공모했다는 사실은 민생 경제의 뿌리를 흔드는 중대한 사안이다"고 강조했다.
이런 이유로 과거 SK이노베이션과 그 산하 기업들이 연루된 담합 관련 이슈에 대해서도 새삼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과거에 비슷한 일에 연루됐다는 사실을 토대로 이번 검찰 수사의 향방을 가늠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실제로 르데스크 취재 결과, SK에너지는 과거에도 국내 다른 정유사와의 입찰 담합 행위로 국제적인 망신을 산 전력을 보유한 것으로 나타났다. 미국 법무부(DOJ)와 연방수사국(FBI)의 공식 기록에 따르면 SK에너지는 2005년 3월부터 2016년까지 10년 넘게 GS칼텍스, ㈜한진 등 국내 주요 기업들과 공모해 한국 내 미군기지 연료 납품 가격을 사전 모의하고 낙찰자를 배정했다.
이에 미국 법무부는 지난 2018년 11월, 사안의 중대성을 고려해 형사 기소와 민사 소송을 동시에 진행하는 초강수를 뒀으며 결국 SK에너지는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당시 판결 결과에 따라 SK에너지는 형사 벌금 약 3408만달러, 민사 배상금 약 9038만달러 등을 합쳐 총 1억2446만달러(당시 환율 기준 약 1400억원)을 지불해야 했다. 이는 함께 적발된 GS칼텍스(약 1억400만달러)나 ㈜한진(약 618만달러) 등 다른 국내 기업들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은 처벌 수위였다.
SK에너지에 부과된 금액이 유독 높았던 이유는 담합 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함과 동시에 실제 공급 물량 비중 또한 가장 컸기 때문이다. 당시 미 국방부 국방수사국(DCIS)의 더멋 F. 오라일리 국장은 "미 군대에 공정한 가격으로 자원을 공급하는 것은 우리의 최우선 순위 중 하나다"며 "이번 처벌은 담합을 통해 미국 납세자를 기만한 행위의 엄중함을 보여주는 사례로 남을 것이다"고 강조했다.
여기서 터지고, 저기서 터지고…반복되는 '담합 리스크'에 장용호 문어발 겸직체제 도마 위
SK에너지가 주한미군 납품 담합으로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한 지 약 2년 후 SK이노베이션의 또 다른 정유 사업 계열사인 미국 현지 법인도 휘발유 가격 조작 의혹으로 법정에 서는 망신을 당했다. 지난 2020년 5월 SK이노베이션의 유류 사업 부문 미국 생산법인이자 100% 자회사인 SK에너지아메리카스(SK Energy Americas)는 네덜란드의 정유사 비톨(Vitol)과 공모해 캘리포니아주의 휘발유 가격을 인위적으로 조작했다는 혐의로 갤리포니아주 검찰과 현지 소비자들로부터 각각 소송을 당했다. 미국은 주 검찰총장이 주 행정당국을 대표해 민사 소송의 변호인 역할을 맡을 수 있다.
먼저 진행된 재판은 캘리포니아주 검찰이 제기한 민사 소송이었다. 2020년 당시 캘리포니아주 검찰총장이던 재비어 베세라가 법원에 제출한 소장 기록에 따르면 SK에너지아메리카스(SK Energy Americas)와 비톨(Vitol)은 2015년 2월 캘리포니아 토런스(Torrance) 지역의 정유소에서 발생한 폭발 사고로 지역 내 휘발유 공급이 불안정해진 틈을 타 휘발유 가격을 인위적으로 부풀려 부당 이득을 챙겼다. 두 기업의 조직적인 담합으로 인해 발생한 소비자 등 지역 사회의 피해액은 10억달러(당시 환율 기준 약 1조4000억원) 이상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됐다. 캘리포니아주 검찰은 강력한 처벌과 함께 피해액만큼의 배상을 요구했다.
SK에너지아메리카스는 4년 넘게 이어진 치열한 법정 공방 내내 혐의를 부인했으나 2024년 7월 돌연 5000만달러(한화 약 700억원)의 배상금을 지불하는 대신 소송을 종결하기로 합의했다. 합의의 표면적인 이유는 장기화되는 소송 리스크와 브랜드 이미지 타격이었다. SK에너지아메리카스는 지불한 최종 합의금 규모가 검찰 측이 주장한 피해액에 비해 크게 적어 금전적으로 이득을 보긴 했지만 '글로벌 시장 교란 기업'이라는 이미지 타격을 피해가지 못했다. 특히 당시 합의 조건에 향후 캘리포니아에서 사업을 재개할 경우 모든 거래 내역과 계약서 사본을 에너지위원회에 상시 보고해야 한다는 '특수 감시 조항'까지 포함돼 "사실상 전과자 취급을 받게 되는 국제적 망신을 샀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악재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주 검찰과 합의 이후에도 소비자들과의 법정 공방은 계속됐고 결국 양측의 법정 다툼은 지난해에 들어서야 최종 마무리됐다. 캘리포니아 북부 지방법원에 따르면 SK에너지아메리카스는 지난해 3월 24일 지역 소비자들이 제기한 '반독점 집단 소송'에서 원고 측과 최종 합의를 마쳤다. 합의를 통해 SK에너지아메리카스는 비톨과 함께 총 1290만달러(약 200억원)를 원고 측에 지급하기로 했으며 이 중 SK에너지아메리카스의 부담액은 그 절반인 약 695만달러(약 100억원)였다.
국내 소비자 시민단체들은 같은 이유로 꾸준히 불미스러운 일에 연루되는 것 자체가 소비자들의 우려를 키우는 사안인 만큼 검찰 수사 결과와 관계없이 소비자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있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에너지석유시장감시단 이서혜 대표는 "SK이노베이션 산하 정유사들이 우리 사회와 시장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공정한 시장질서 확립에 더욱 힘써야 할 필요가 있다"며 "반복되는 가격 논란을 해소하고 소비자들에게 신뢰를 줄 수 있는 적극적인 자정 노력을 보여주길 기대한다"고 밝혔다.
정지연 한국소비자연맹 사무총장은 "유류는 국민 실생활과 가장 밀접한 필수재인 만큼 가격 결정 과정의 불투명성은 소비자들에 대한 기만행위로 볼 수 있다"며 "해외에서 반복된 담합 전력을 비추어 볼 때 우리 규제당국도 더욱 면밀하고 엄중한 잣대로 시장을 감시해야 한다"고 직격했다. 이어 "해외에서 치른 천문학적인 배상금은 단순한 금전적 손실을 넘어 기업의 신뢰도와 직결되는 문제다"며 "이미 글로벌 시장에서 '상습적 담합 기업'이라는 낙인이 찍힌 상황에서 국내에서 또 다시 불거진 유가 담합 의혹은 그동안 기업이 외쳐온 ESG 경영의 진정성을 흔들만한 사안이다"고 강조했다.
전문가들 역시 SK이노베이션 정유 계열사들에서 반복되고 있는 담합 리스트에 대해 깊은 우려감을 표했다. 또 일각에서는 특정 인사의 권력 독점 체제를 원인으로 지목하며 책임 경영 강화를 주문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현재 SK이노베이션은 추형욱 대표이사가 역임하고 있지만 (주)SK를 이끄는 장용호 사장이 '총괄사장' 직책을 맡으며 경영에 개입하고 있다.
김계수 세명대 경영학과 교수는 "시장 담합과 관련해 미국 시장에서 거액의 징벌적 과징금을 부과 받고도 동일한 사안으로 국내에서 같은 의혹에 휩싸였다는 것은 그룹 차원의 준법 감시 체계가 사실상 작동 불능 상태임을 자인하는 꼴이다"며 "담합을 통해 얻는 기대 이익이 적발 시 치러야 할 비용보다 크다는 왜곡된 성공 방식이 조직 내부에 고착화된 것은 아닌지 되돌아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단순한 과징금 납부를 넘어 근본적인 인적·구조적 쇄신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그동안 SK이노베이션이 강조해온 ESG경영은 소비자로부터 신뢰를 잃게 될 것이다"고 덧붙였다.
일련의 사안과 관련, SK이노베이션 관계자는 "과거 미국 내 담합 사건으로 배상금을 지급한 사실은 맞지만 국내 담합 의혹에 대해서는 현재 확정된 내용이 없기 때문에 구체적인 입장을 밝히기 어렵다"고 짧은 입장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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