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동물원에서 흔들의자를 만드는 법” 삶을 조리하는 감각의 레시피

실시간 키워드

2022.08.01 00:00 기준

[신간] “동물원에서 흔들의자를 만드는 법” 삶을 조리하는 감각의 레시피

뉴스로드 2026-04-08 09:26:51 신고

동물원에서 흔들의자를 만드는 법
동물원에서 흔들의자를 만드는 법

“혹시 미심쩍은 힘이 남아 있으면 어슷하게 썰고 / 밀폐 용기에 사랑한다는 말과 함께 담으렴.”

2023년 《시와경계》 신인상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은이정 시인이 첫 시집 『동물원에서 흔들의자를 만드는 법』(걷는사람)을 펴냈다. 식당, 카페, 병원, 요양원 등 우리가 스쳐 지나가는 공간들을 시적 무대로 불러내 현실의 균열과 정서의 잔흔을 감각적인 언어로 조리해 내는 작품집이다.

시집 곳곳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음식’과 ‘조리’의 이미지다. 시인은 삶의 장면들을 썰고, 절이고, 끓이고, 갈아 넣는 행위를 통해 감정과 기억, 돌봄과 소멸의 순간을 낯선 레시피로 재구성한다. “생각날 때마다 보이지 않게 갈아 두었다”는 고백처럼, 이 시집에는 오래 갈아 쌓아 둔 시선이 촘촘히 켜를 이룬다. 그 시선은 시집이라는 하나의 식탁 위에서 펼쳐지며, 현실을 외면하지 않는 감각의 태도를 제안한다.

문을 여는 시 「늙은 딸에게 주는 레시피」에서 요양병원에 누운 엄마는 늙은 딸에게 “베개는 얇게 소금에 절여” “기저귀 조각을 고명으로 올리라”고 말한다. 존엄이 해체되는 노년의 풍경이 조리법으로 치환되는 이 장면은, 노화와 돌봄을 둘러싼 불편한 진실을 물질적 감각으로 끌어내려 보여 주려는 시도의 일환이다. “이미 있던 나를 통해 내가 달라지는 거야”라는 문장은, 엄마의 현재가 딸의 미래와 곧장 맞닿아 있음을 인식하는 대목이자, 삶의 말미를 준비하는 감각적 매뉴얼이기도 하다.

이 같은 전복적 상상력은 개인의 서사를 넘어 동시대 구조적 현실에 대한 통찰로 확장된다. 「시신이 제일 고생이죠」에서는 국경을 넘는 시신과 상품이 한 장면 안에 포개지며 세계의 비정함을 드러낸다. 「환영해 Zoom」에서는 비대면 노동의 장면을 “냄새 빠진/정물의 세상”으로 형상화해 감각이 제거된 삶의 단면을 포착한다. 포옹마저 기계화된 요양원의 풍경을 그린 「허그 로봇의 결례」에서 I—25 모델은 “끌어안고 돌보고 구하는 일”을 수행하지만, “똑바로 바라보지 않는 이곳에선 그래서 로봇은 실례가 된다”. 3분간 대상자의 리듬이 감지되지 않으면 알람이 울리고, 로봇은 “왜곡되는 슬픔 없이” 기본 세팅을 다시 시작한다. 돌봄의 감정이 삭제된 자리에서 인간성과 슬픔의 조건은 무엇인지, 시는 집요하게 되묻는다.

표제작 「동물원에서 흔들의자를 만드는 법」은 시집의 문제의식을 응축한다. 동물들이 서로의 몸과 역할을 맞물려 하나의 흔들의자를 만들어 가는 장면은, 불완전한 존재들이 함께 균형을 찾아가는 은유적 조립 과정이다. “바닥의 평등을 맞추지 못하면/뒤뚱거리는 건 평생 제자리가 없는데”라는 구절은, 불균형한 조건 위에 서 있는 현대인의 삶을 환기한다. 시인은 이 조립의 과정 속에 희생과 책임, 설명되지 않는 죄의식을 세밀하게 배치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누리는 잠깐의 안식이 타인의 노동과 감각 위에 간신히 얹혀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면서도, 제작을 멈추지 않는다. 흔들림을 전제로 하면서도 끝내 앉을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 가는 일, 그 자체가 삶을 견디는 방식이라는 메시지가 조용히 밑줄을 긋는다.

시집에는 위트와 블랙 유머가 별사탕처럼 박혀 있다. “카페 사장, 당근이 되어 꽂혀 있어요”로 시작하는 「환상지」에서 카페 사장은 “원자재가 인상돼 제 몸을 갈기로 했”고, “카페 사장을 갈아 넣은 샌드위치는 먹을 만했어요”라는 문장으로 끝난다. 과로와 소진, 자기 희생이 일상이 된 노동 현실이 당근 샌드위치로 돌연 변주되는 순간, 웃음과 씁쓸함이 동시에 터진다. 추천사를 쓴 김정수 시인이 꼽은 “2층 화장실 손잡이 위엔 화석이 있어요/고생대 슈크림이/그대로 말라붙었어요”, “슈크림 붕어빵은 강물에 놓아주기로 해요” 같은 구절에서도, 장난스러운 상상력과 깊은 피로의 정서가 함께 감돌며 독특한 맛을 낸다.

이 시집에서 감정은 직접 진술되기보다 사물과 절차, 몸의 감각으로 치환된다. “매트리스 위에는 항문에 박아 둔 기저귀 조각을 활짝 펼쳐” 놓는 장면이나, “하루를 바꿔도 같은 데시벨/떨어지지 않으려 꽉 붙잡은 놀이 기구/날마다 빙글빙글 잘도 돌아가네요” 같은 구절은, 고통과 불안을 건조한 묘사 속에 밀어 넣는다. 그래서 오히려 감정은 더 선명하게, 피부에 닿는 통증처럼 읽힌다.

몸의 감각을 전면에 내세운 시적 태도는 프랑스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의 ‘생활 세계’를 떠올리게 한다. 김정수 시인은 추천사에서 “몸이 없는 철학은 철학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던” 메를로퐁티를 소환하며, 은이정의 시가 “몸을 통한 생생한 지각의 현상들”을 노래한다고 평한다. 시인은 신체의 감각을 도구 삼아 세계를 더듬고, 저항하고, 감싸 안으며, 그 과정에서 시인의 몸을 세계로 연장한다. 그가 지각하는 세계는 세잔의 풍경화처럼 윤곽선이 여러 겹으로 흔들리며 끊임없이 변한다.

「서른 넘어, 아이스크림」에서 “한 번 떨어지면/달콤해지는 거짓말”과 “시려서 머리 아팠던 사랑”은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의 질감과 함께 사랑의 후유증을 떠올리게 한다. “말이 없으면 솔직해진다는 믿음”을 붙들고 “혀부터 내미는 연습”을 해야 한다는 대목에서는, 서툰 친밀감과 침묵의 무게가 아이스크림의 차가움과 뒤섞인다. 「이명」에서 화자는 “날마다 연주하는/삐죽한 방”에 들어가 “제 발로 들어온 것만 듣고 싶”어 하면서도, “당신의 세상을 지워 버린 채/내 안에 들어와 소리만 파먹고 있는” 존재를 견디고 있다. 고통은 끝내 미워할 수 없는 대상으로 남고, “미운 것도 가여워지는 손이 나이를 내밀”며 관계의 모서리를 더듬는다.

시집 말미의 ‘시인의 말’에서 은이정은 “다른 벽으로/창문을 냈습니다/타원형 고백은 기다림 탓이에요”라고 적는다. “이제/당신을/시작하려 합니다”라는 짧은 문장은, 이 시집이 타인을 향해 열어 둔 창이라는 선언처럼 읽힌다. “넘어지지 않아도 안아 주는 마음”이 여전히 가능한지 묻는 이 첫 시집은, 가혹한 현실 속에서도 감각을 끝내 지우지 않으려는 한 존재의 고집스러운 시도다. 흔들리는 바닥 위에서, 어떻게든 앉을 수 있는 흔들의자를 함께 만드는 법을 조용히 건네는 책이다.

▲시인 소개

은이정

서울에서 태어나 2023시와경계신인상으로 등단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Copyright ⓒ 뉴스로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실시간 키워드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0000.00.00 00:00 기준

이 시각 주요뉴스

알림 문구가 한줄로 들어가는 영역입니다

신고하기

작성 아이디가 들어갑니다

내용 내용이 최대 두 줄로 노출됩니다

신고 사유를 선택하세요

이 이야기를
공유하세요

이 콘텐츠를 공유하세요.

콘텐츠 공유하고 수익 받는 방법이 궁금하다면👋>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유튜브로 이동하여 공유해 주세요.
유튜브 활용 방법 알아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