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연합뉴스) 김연숙 특파원 = 지난 2월 미국 뉴욕 JFK공항 입국심사대. 50대 중반쯤으로 추정되는 백인 남성 입국심사관은 기자임을 확인하고는 어떤 기사를 쓰냐고 물었다.
'유엔 보도'를 업무 중 하나로 언급했더니, 그는 손가락을 입 가까이 대며 손짓과 함께 비웃듯 말했다.
"그들은 항상 짹짹거리기만 하지."
그리고는 "평화위원회(Board of Peace)에 온 걸 환영한다"고 덧붙였다.
평화위원회는 가자 전쟁 등 분쟁 해결을 명분으로 출범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직속 기구다. 사실상 유엔을 대체하려는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고 있다.
그에게 "의견 참고하겠다"고 대꾸하며 나오는 길. 부임지에 첫발을 들이며 품었던 긴장감 위로 당혹감과 허탈함이 얹어졌다.
입국심사관의 정치적 성향과 무관하게, 그의 지적이 틀렸다고 만은 할 수 없는 게 현실이다.
유엔에서 진행되는 치열한 외교전과는 별개로, 그 과정은 지난하고 단번에 실질적인 결과를 내기는 어렵다.
우크라이나와 가자, 이란 전쟁까지 복수의 분쟁이 겹쳐 있지만, 국제평화와 안전 유지를 내세운 유엔이 낡은 외교무대가 된 것은 아닌가 하는 지적도 적지 않다.
전쟁 종식을 거듭 호소하는 유엔 사무총장의 당부는 무력함을 넘어 피로감을 느낄 정도다.
그러나 원체 관료적이라는 지적을 받는 유엔 기구의 특성에다 회원국의 주권을 존중하고 얽히고설킨 이해관계를 고려하면, 유엔이 만능도 아니고 단번에 해결책을 찾을 수 없는 것도 당연하다.
결의안 문구 하나, 수식어 하나에 모든 당사국의 동의를 구하는 과정은 외교적 인내심을 시험하는 또 다른 '전쟁'에 가깝다.
이 과정에서 실효성은 마모되고, 누구도 거부하기 힘든 원론적 수준의 문장만 남는다.
최근 중동 사태를 둘러싼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논의는 이러한 구조적 교착상태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상황에서 유엔 최대 분담국인 미국은 '개혁'을 앞세우고 있다.
미국의 유엔 개혁을 담당하는 제프 바토스 대사는 최근 뉴욕에서 외신 기자들과 만나 '유엔을 다시 위대하게'(MUNGA·Make the UN Great Again)를 언급했다. 트럼프 대통령의 선거 구호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GA)를 차용한 것이다.
바토스 대사는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을 빌려 "유엔은 엄청난 잠재력이 있지만, 그 잠재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며 "유엔이 위대한 조직으로 거듭나도록 돕고 싶다"며 변화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실제 유엔도 비용절감을 위한 구조 개편에 나섰다. 사무국 규모 축소, 고비용 거점 재조정, 중복 기능 통합 등이 추진 중이다. 다만 내부 반발과 구조적 한계에 현 사무총장의 임기 말이라는 점까지 겹치며 개혁 동력은 제한적이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이미 유엔이 지나치게 비대하고 비효율적이었다는 점을 지적하며, 어차피 필요했던 변화가 미국에 의해 가속화한 것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이 과정에서 인도주의 지원금이 삭감되며 취약계층이 가장 먼저 위험에 노출되는 등 부작용도 있었다.
문제는 개혁의 방향성이다. 외교적 수사를 이어가던 바토스 대사는 유엔 내 반이스라엘·반미 정서를 강도 높게 비판했다.
바토스 대사는 일부 유엔 특별보고관을 겨냥해 "대중의 눈에 비친 모습은 반자본주의적이고 반미적이며 반이스라엘 편향성을 지닌 '유엔 관계자'의 모습일 뿐"이라며 "유엔이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지도록 내버려 둘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들 특별보고관의 행태를 '광기'(lunacy)라 부르며 "유엔 체제와 지도부에 이 '독'(poison)을 근절할 것을 강력히 촉구한다"고도 했다.
미국이 원하는 '위대한 유엔'은 유엔 본연의 목적을 위한 재설계일까, 미국의 목소리를 담은 확성기일까.
'짹짹거림'이라는 냉소 속에서도, 포성 대신 말로 싸우며 평화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이 '낡은 무대'는 건재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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