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메이커=김남근 기자]
한 잔에 담긴 시간을 디자인하다
- 화려함 대신 본질을 선택하다
- 와인을 어렵게 만드는 건 정보가 아니라 관념
와인이 언제부터 이렇게 조심스러운 술이 됐을까? 산지와 품종, 가격과 설명이 앞서면서 한 잔을 위한 선택은 점점 부담으로 다가온다. 잘 알지 못하면 말하기 어려운 분위기 속에서, 즐거움보다 경계가 먼저 생긴 것이다. 전상욱 소믈리에는 이 지점에 주목했다. 와인을 특정 지식의 영역으로 두지 않고, 지역의 기후와 삶이 담긴 하나의 ‘음식’이라고 표현한다. 그래서 더 쉽게 설명하고, 더 많이 묻고, 더 오래 듣는 방식을 택한다. 와인을 멋지게 포장하기보다, 불필요한 관념을 덜어내는 일. 그가 그동안 걸어왔고, 앞으로도 걸어 나갈 분명한 방향이다.
ⓒ 전상욱 소믈리에
작은 응대가 만든 소믈리에의 출발점
호텔과 대기업 식음 현장을 거치며, 와인을 쉽게 풀어내는 소믈리에로 평가받는 전상욱 소믈리에. 소믈리에로서 그동안 이룩한 업적과는 다르게 그가 처음부터 와인과 관련된 미래를 그리던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진로를 정하지 못한 채, 대학 진학 대신 사회로 먼저 나왔던 청년이었다.
고등학생 시절, 그는 술 자체보다 식사 자리에서 자연스럽게 잔을 기울이는 모습, 즉 ‘어른들이 술을 대하는 태도’에 더 눈길이 갔다고 했다. 이는 단순한 관심이었지, 이 관심이 진로로 곧장 이어지지는 않았다. 하고 싶은 일이 분명하지 않은 상태에서 대학에 먼저 가는 것이 맞는지를 스스로에게 묻다가, 결국 사회로 먼저 나오는 선택을 하게 됐다.
스무 살 무렵, 카페에서 일하던 시절이었다. 한 단골손님은 원두커피를 주문하면서도 우유만은 항상 별도로 데워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그 취향을 기억해 두었다가 다음 방문 때 먼저 준비해 내놓았다. 특별한 기술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기억했다’라는 사실이 전부였다. 그날 손님이 건넨 팁보다 더 크게 남은 것은, 그 순간의 ‘기억’과 ‘경험’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훗날 호텔에서 ‘프리퍼런스 서비스’라는 개념을 접했을 때, 그는 그 장면을 떠올렸다고 했다. 손님의 취향을 미리 알고 준비하는 일. 그는 “그때 처음으로 이 일이 재미있다고 느껴졌습니다”라고 전했다. 와인을 배우기 전 그는 이미 사람을 읽는 일의 재미를 먼저 알게 된 셈이다. 그리고 지금도 그는 소믈리에를 ‘와인을 설명하는 사람’이 아니라 ‘손님의 시간을 디자인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그 출발점에는 화려한 레스토랑도, 자격증도 아닌, 작은 카페에서의 한 장면이 회자된다.
손님의 시간을 읽는 직업, 소믈리에
“제일 중요한 건 응대입니다.”
인터뷰 내내 전상욱 소믈리에가 여러 차례 반복한 문장이다. 화려한 경력이나 자격증보다 먼저 꺼낸 단어가 ‘응대’라는 점은 그의 기준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호텔 근무 시절, 그는 프런트로 이동할 기회를 제안받았다고 했다. 조직 내에서 안정적인 경로로 여겨질 수 있는 자리였다. 그러나 그는 음료 파트에 남겠다고 결정했다. 전 소믈리에는 “와인을 제대로 배우고 싶었습니다. 주어진 직무를 수동적으로 수행하는 수준이 아니라, 그 세계를 능동적으로 깊이 이해하고 싶었기 때문이었어요”라고 전했다.
이후로도 그는 보여주기 식 자격증 취득보다 현장을 먼저 택했다. 현장에서 손님을 응대하고, 다양한 상황을 겪으며 노하우를 넓힌 뒤 공부를 병행했다. ‘현장을 알고 공부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라는 그의 말은 이 선택을 설명해 준다.
그렇게 충분한 경험을 쌓으며 호텔과 기업 외식사업팀을 거치며 커리어를 쌓은 그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조직을 떠났다. 외부에서 보면 아쉬운 결정일 수 있다. 그러나 전 소믈리에는 그 선택을 두고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고민했습니다”라며 “식음 전문가로서의 길과 조직의 최고 책임자로 향하는 길이 반드시 같은 방향은 아니라고 느꼈습니다”라고 전했다. 이어 “저 스스로에게 역할의 정합성을 물었어요. 직함이 아니라, 자신이 현장에서 가장 가치 있게 기여할 수 있는 위치가 어디인지 판단하려 했습니다”라고 덧붙였다.
ⓒ 전상욱 소믈리에
한 잔의 관계와 시간을 지키는 기준
코로나 시기는 그 고민을 더 구체화했다. 현장이 멈추는 시간을 겪으며 그는 일이 삶의 전부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고 전했다. 조직의 이름이 아닌, 소믈리에 전상욱이라는 이름으로 무엇을 남길 수 있을지를 정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가 지금 강연과 컨설팅, 콘텐츠 제작과 집필을 병행하는 이유도 그 연장선에 있다. 전 소믈리에는 “와인을 어렵게 만드는 건 정보가 아니라 관념”이라며 “자극적인 방식으로 관심을 끄는 대신, 어려운 용어를 쉽게 풀어 설명하는 길을 택했습니다. 와인을 더 많이 소비하게 만드는 전략이 아니라, 장벽을 낮추는 것이 소믈리에로서, 그리고 식음료를 아끼고 사랑하는 저의 본질이 아닐지 생각하게 되었어요”라고 힘주어 전했다.
화려한 커리어를 거친 소믈리에라면, 더 큰 사업이나 확장을 다음 목표로 말할 법하다. 그러나 전 소믈리에의 대답은 달랐다. 좋은 레스토랑이나 규모 있는 브랜드보다, 아내와 행복하게 사는 삶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선행에 대해서도 거창하게 정의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설명하며, 와인을 과시의 언어로 소비하는 문화가 아니라 각자가 편하게 즐길 수 있도록 돕는 일에 의미를 둔다고 밝혔다.
인터뷰 내내 그가 반복해 말한 것은 ‘관념’이다. 그리고 자신이 지키고 싶은 것은 한 잔의 와인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잔을 사이에 둔 사람들의 관계와 시간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복잡한 설명 대신 편안한 대화를 남기는 것. 그가 여전히 현장을 떠나지 않는 이유이자, 지금도, 앞으로도 지켜나갈 기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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