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수십여년 간 불법사금융은 죽지 않았다. 다만 늘 새 얼굴을 골라 살아남았을 뿐이다. 전단지와 명함 탈을 쓴 불법사금융은 문자와 인터넷 광고를 거쳐, 이제 메신저와 익명 계정의 얼굴로 숨어들었다. 시장은 바뀌었지만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다. 제도권 금융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의 절박함을 가장 먼저 알아보고, 가장 비싼 값으로 거래한다는 점이다.
지금 정부는 불법사금융과의 전면전에 나서고 있다. 범정부 TF를 꾸리고, 수사·금융·통신 당국과 지자체까지 묶어 계좌 차단, 원스톱 피해구제, 채무자대리인 지원, 예방대출 확대를 동시에 밀어붙이고 있다. 말 그대로 선언의 단계를 넘어 제도가 실제 현장에 닿을 수 있느냐를 가르는 과도기의 초입에 서 있다.
본보는 <불사금의 뿌리> 기획을 통해 한국 불법사금융의 뿌리와 변신, 피해자들이 그 문 앞까지 밀려나는 구조, 그 주변에 붙어 자란 또 다른 시장, 그리고 국가의 대응이 어디까지 닿고 있는지를 차례로 추적한다. 아울러 불법사금융은 왜 시들지 않았는지, 이번 전면전이 과연 시장의 뿌리까지 흔들 수 있을지 묻는다. 불사금의>
【투데이신문 김효인 기자】“차라리 죽이지요. 죽음보다 못한 삶들을 우리에게 강요하는 저의는 도대체 무엇인지 묻고 싶습니다. 아무것도 생각 않고 두 눈 감고 영원히 안 뜨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 늪에서 탈출하고 싶습니다. 영원히”
친필이었다. 눌러 쓴 글씨는 고르고 단정하지 않았다. 이 여성에게 처음 필요했던 돈은 200만원이었다. 30여년 전, 친정어머니 병원비였다. 남편에게는 말하지 못했다. 급하게 구해 쓰고 곧 갚으면 끝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 발걸음이 향한 곳이 당시 명동이었다.
돈은 예상보다 빨리 나왔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이자는 빠르게 불어났고, 갚기가 어려워지자 업자들은 어둑한 밤 집으로 찾아왔다. 하교하는 아이 손에 “정산 바랍니다”라고 적힌 쪽지를 들려 보내기도 했다. 아이는 그 뜻을 몰랐을지언정 어머니는 알았다. 급전은 잠깐이었지만, 가혹하고 집요한 추심은 가족 전체의 일상이 됐다.
불법 사채는 대부분 이런 식으로 마무리된다. 처음엔 ‘친절한 급전’의 가면을 쓰고 들어오지만, 끝내 집과 가족, 일상까지 담보로 잡는다. 이 메모는 한국 사금융의 역사가 단순한 금전 거래를 넘어, 어떻게 한 인간의 존엄을 짓밟으며 진화해 왔는지를 보여주는 서글픈 기록이다.
현재 정부가 불법사금융과의 전면전에 나선 것도 결국 이 오래되고 견고한 구조와 다시 마주했기 때문이다. 지난해 금융감독원 불법사금융 피해신고센터에 접수된 신고·상담은 6만3187건, 실제 피해신고는 1만5397건이었다. 2024년 1~10월 기준 채권추심 관련 피해 상담·신고는 2429건으로 2020년 같은 기간 479건의 5배를 넘었다.
길거리 전단은 줄었는데 신고는 늘었다. 불법 사채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규모를 줄이고 통로를 바꾸며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이동했다는 뜻이다.
은행이 닫혀도 명동은 열렸다
자금 융통에 가장 먼저 생각나는 곳이 왜 하필 명동이었을까. 답은 단순하다. 제도권 금융이 감당하지 못한 수요가 가장 먼저 모이던 저수지였기 때문이다. 지금의 명동은 관광객과 상가의 거리지만, 한 시절 명동과 회현, 남대문, 소공동 일대는 한국 비공식 자금시장의 핵심 축이었다.
은행 문턱이 높고 대출 심사가 몇 주씩 걸리던 시절, 당장 내일 어음을 막아야 하는 기업인이나 수술비가 급한 서민들에게 명동은 유일한 해방구였다. 어음 할인과 재할인, 사적 융통이 뒤섞이며 공식 금융이 비워둔 거대한 빈틈을 메웠다.
1972년경 명동·소공동 일대에는 100개가 넘는 대규모 사채중개업소가 성황을 이뤘다. 당시 정부가 파악한 사채 총액은 3456억원. 이는 당시 국가 전체 통화량의 80%에 육박하는 수치였다.
시중 금리가 연 40~50%를 웃돌았음에도 사람들은 명동으로 몰렸다. 은행이 담보와 서류를 따지는 사이, 명동의 돈은 ‘평판’과 ‘거래 관계’만으로 움직였기 때문이다. 그 결과 명동은 제도권 금융 바깥의 자금이 가장 빨리 거래되고, 가장 비싼 값이 매겨지며, 가장 큰 위험이 전가되는 장소가 됐다.
다만 당시 명동을 단순히 ‘불법 사채 골목’으로만 보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합법과 불법의 경계가 지금처럼 선명하지 않던 시절, 명동은 제도권 밖으로 밀려난 자금 수요가 모이고 흩어지는 비공식 금융의 허브였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그 시절 명동은 사채업자 골목이라기보다, 은행이 감당하지 못한 돈이 마지막으로 모이는 곳이었다”며 “왜 그렇게 많은 자금이 명동으로 흘렀는지를 봐야 지금의 불법사금융 구조도 이해된다”고 말했다.
국가는 칼을 들었고, 시장은 숨어드는 법을 배웠다
정부가 명동을 정면으로 때린 첫 대수술은 1972년 8월 3일이었다. 이른바 8·3 사채동결조치다. 정부는 신고된 기업 사채를 장기·저리 채무로 강제 전환했다. 당시 연 40~50% 수준의 사채를 국가가 한꺼번에 제도권 질서 안으로 끌어들이려 한 것이다. 기업 부도를 막는 데는 효과가 있었지만, 시장에는 또 다른 기억을 남겼다. 양지에 나와 있으면 언제든 국가가 칼을 들 수 있다는 경험이었다.
당시만 해도 많은 사람들은 시장이 끝날 것이라고 봤다. 실제로 8·3 조치는 사채업자들에게 직격탄이었다. 그러나 끝나지 않았다. 국가는 거래를 얼릴 수는 있어도, 거래가 생겨나는 이유까지 없애진 못했다. 기업은 여전히 돈이 필요했고, 은행은 여전히 모든 수요를 흡수하지 못했다. 시장은 직격탄을 맞은 뒤 더 조용히, 더 깊이 움직이는 법을 배웠다.
1982년 장영자 사건은 명동 사채시장의 위험성을 다시 폭발적으로 드러낸 사건이었다. 해당 수사 과정에서 드러난 어음 발행 총액은 7111억원, 이 가운데 6404억원이 사채시장에서 할인·유통됐고, 실제 편취 규모는 1400억원대에 달했다.
굵직한 기업들이 흔들렸고, 은행장까지 구속됐다. 사건이 터졌을 때도 “명동은 끝났다”는 말이 돌았다. 하지만 끝난 것은 몇몇 이름과 통로였을 뿐이었다. 자금의 목마름은 그대로 남아 있었고, 시장은 다시 다른 얼굴을 골랐다.
1993년 금융실명제는 명동 사채시장에 가장 직접적인 타격을 줬다. 명동 일대 300여개 사채업장이 개점 휴업 상태로 전환됐으며 실명제로 인해 거래가 위축된다는 여론이 생겨났다. 그러나 시장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거대한 저수지였던 명동이 깨지자, 물이 마른 것이 아니라 수많은 작은 웅덩이로 흩어졌을 뿐이었다. 대형 전주(錢主)가 빠지면 소액 전주가 남았고, 대면 거래가 줄면 더 은밀한 거래가 자랐다.
한때 명동에서 사채 중개를 했던 인사는 “명동 시장이 죽었다고들 했지만 실제론 죽은 게 아니라 흩어진 것”이라며 “큰손이 빠지면 작은 전주가 그 자리를 메웠고, 밖으로 드러나는 거래가 줄었을 뿐 자금 수요 자체는 절대 사라질 수가 없다”고 말했다.
뒷 골목이 사라졌지만 돈의 습성은 남았다
명동의 대형 사채시장이 약해진 뒤 시장은 더 작은 단위로 쪼개졌고, 더 약한 고리를 파고들었다. 과거 명동 사채가 기업 자금과 어음시장에 깊게 얽혀 있었다면, 이후의 사채는 서민의 생계와 일상을 직접 겨누는 방향으로 변했다. 30여년 전 친정어머니 병원비 때문에 200만원을 빌렸다가 가족 전체가 추심에 시달린 여성의 사례는, 그 변화가 이미 오래전부터 진행돼 왔음을 보여준다.
금융당국이 2001년 4월부터 2004년 4월까지 접수한 사금융 피해상담은 1만719건이었다. 이 가운데 고금리 피해가 3093건, 부당 채권추심이 1565건이었다. 불법 사채의 본질이 단순한 ‘비싼 돈’이 아니라, 결국 추심과 협박으로 삶 전체를 옥죄는 구조라는 점이 이 시기 이미 드러난 셈이다.
실제 사례도 이어졌다. 수천만원을 빌렸다가 원금을 갚고도 연 600% 이자가 붙고, 성폭력과 강제 취업까지 당한 여성의 사건이 보도됐고, 영세상인과 유흥업 종사자들을 상대로 연 2000%대 이자를 받아내며 성추행과 불법추심을 벌인 조직도 적발됐다.
정부 또한 이 시장을 ‘개인의 수치’가 아니라 ‘공적 피해’의 문제로 보기 시작했다. 전 금융감독원 국장인 조성목 서민금융연구원 이사장은 이 전환점의 최전선에 선 실무자다. 그는 명동 사채시대의 종말과 현대적 의미의 ‘불법사금융’의 태동기를 겪으며 불법 사채 피해에 대한 패러다임을 바꿨다.
당시까지만 해도 불법 사채 피해는 ‘개인이 못나서 당한 일’, 혹은 ‘집안일’로 치부되기 일쑤였지만 그는 전국을 돌며 피해 사례를 수집했고, 사채업자들 사이에서 저승사자로 불릴 만큼 강력한 단속과 제도화를 밀어붙였다.
조 이사장은 “처음엔 법적 근거조차 희박해 ‘사금융’이라 불렀다. 법이 생긴 뒤에야 비로소 등록하지 않은 거래를 ‘불법사금융’이라 명명할 수 있었다”면서도 “단속만으로는 한계가 명확했다. 제도권 금융에서 밀려난 수요가 존재하는 한, 시장은 반드시 다른 얼굴을 하고 나타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조 이사장의 말처럼, 명동의 큰손들이 빠져나간 자리는 더 은밀하고 더 가혹한 시장이 메웠다. 달라진 건 무대뿐이다. 뒷골목의 불법 사채는 이제 스마트폰 안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명동이 무너진 자리에는 더 큰 파도가 밀려왔다.
다음 편에서는 흩어진 사채 자본과 구조가 카드 산업과 결합해 어떻게 전국적 개인부채 재난으로 번졌는지, 카드대란의 이면을 살펴본다.
불법사금융 피해에 노출된 경우 금융감독원(☎1332)에 신고하여 필요한 도움을 받을 수 있으며, 과다채무 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경우에 서민금융진흥원(☎1397) 또는 신용회복위원회(☎1600-5500)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 연이율 60% 초과 대부계약은 원금과 이자 모두 무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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