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바논 사진가 라니아 마타르(Rania Matar)는
레바논에서 만난 젊은 여성들의 초상을 기록해왔다.
오랜 내전의 역사를 지나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분쟁으로
파괴된 도시에서도 희망을 안고 삶을 이어가는 젊은 여성들에게서
사진가가 발견한 강인함과 존엄이 그 안에 담겼다.
위험과 모험을 동시에 끌어안고 살아가는
레바논의 용맹한 여성들에게 보내는 연서(戀書).
최근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 일대에서 이어지는 분쟁 소식에 깊은 위로를 전한다. 레바논 내전이라는 오랜 역사적 사건에 뿌리를 둔 프로젝트 ‘Where Do I Go?’를 전개해 온 만큼 이 소식이 더욱 무겁게 다가올 듯하다.
위로해주어 고맙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베이루트에 있어야 하지만, 비행편이 전부 취소되어 이 참혹한 상황을 멀리서 지켜볼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너져 내린다. 분쟁이 심화된 최근 몇 주 전만 해도 레바논에는 분명 희망이 있었다. 되풀이되는 역사 속에서 내 작업이 지금 레바논의 현실과 다시금 정확히 맞물리게 되었다는 사실이 한없이 안타깝다.
이 연작은 레바논의 역사적 맥락과 맞닿아 있는 동시에 당신에게는 매우 개인적이며 자전적인 프로젝트라 말하기도 했다. 당신의 개인적인 경험과 문화적 배경이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데 어떤 영향을 주었나?
레바논 내전 속에서 자란 어린 시절의 기억, 그리고 당시 미국으로 이주했던 젊은 여성으로서 한 경험이 나를 이 작업으로 이끌었다. 스무 살 무렵 전쟁이 엄습하는 분위기 속에서 미국으로 떠났고, 그로부터 어느덧 40여 년이 흘렀다. 이후 미국과 중동을 오가며 여성들을 촬영하다가, 2020년 베이루트 항구 폭발 사건을 기점으로 베이루트로 돌아와 전국에서 모인 젊은 여성들과 가까이 교류하게 되었다. 도시의 절반 이상이 파괴된 재난의 현장에서도 여성들은 잔해를 치우며 재건 작업에 참여하고 있었고, 나는 그 모습에서 강한 영감을 받았다. 처음에는 이 작업을 항구 폭발 이후 여성들이 레바논이라는 장소와 맺고 있는 관계를 기록하는 작업이라 생각했지만, 이후 레바논의 상황이 계속 악화되면서 자연스럽게 장기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지난해 레바논 내전 50주년을 맞아 그동안 찍은 사진을 책으로 엮으며 작업을 마무리하게 되었다.
연작의 제목인 ‘Where Do I Go?’는 어떻게 탄생했나?
페를라(Perla)라는 여성과 함께 촬영하던 날, 버려진 건물의 벽면에 아랍어로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لوين روح (Where do I go?)” 그 순간 페를라는 몸을 던지듯 벽에 기대어 섰고, 나는 이 질문이 곧 프로젝트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는 스무 살 무렵 내가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었다. 내가 찍은 여성들 안에서 젊은 시절의 나를 본다. 그들 역시 같은 갈림길 앞에 서 있다. 남을 것인가, 떠날 것인가. 한쪽은 지금껏 살아온 삶과의 이별을 뜻하고, 다른 한쪽은 불안정한 상황 속에서도 같은 자리에서 더 나은 미래를 그리며 버티는 것을 의미한다. 이 문장은 결국 레바논 국민들이 지난 50년 동안 반복해 던진 질문이기도 하다.
프로젝트에는 다양한 피부색과 배경, 종교를 가진 여성들이 등장한다. 어떤 계기로 이들과 처음 만났고, 촬영에 앞서 어떤 주제로 대화를 나누며 그들에 대해 알아갔나?
레바논에 돌아오기 전, 인스타그램에 프로젝트를 소개하는 글을 올리며 공개적으로 참여자를 모집했다. 기본적으로 나와 함께 작업하고 싶은 여성이라면 누구든 환영했지만, 무엇보다 자신을 드러내고 이 작업을 함께 만들어갈 의지가 있는지를 중요하게 봤다. 그런 의지를 가진 여성이라면 분명 흥미로운 이야기를 품고 있을 것이라 믿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촬영 전에는 전화로 대화를 나누며 그들에 대해 알아갔다. 내 작업은 언제나 여성들의 개인적인 이야기, 그들 각자가 레바논이라는 장소와 맺고 있는 관계에서 출발한다. 때로는 개인의 서사가 아니라 집단의 기억을 중심으로 촬영을 구상하기도 한다.
여성들이 카메라 앞에서 자신을 드러내는 작업인 만큼 서로 신뢰를 쌓는 과정이 중요했을 듯하다. 참여자들과 어떤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갔나? 카메라 앞에 서는 데 익숙하지 않은 여성들도 있었을 듯한데.
오히려 카메라에 익숙하지 않은 여성들과 함께하는 작업을 좋아한다. 그들에게서 드러나는 날것의 솔직함과 취약성을 사랑한다. 촬영 과정에서는 그 시간이 그들에게 가능한 한 편안하고 즐거운 경험이 되도록 하려고 노력한다. 대개 그들이 편안하게 느끼는 장소에서, 직접 고른 옷을 입고 촬영을 시작한다. 언제든 자유롭게 의견을 말할 수 있는 분위기를 형성하고, 우리가 이 장면을 함께 만들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계속 확인시킨다. 또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에 대해서도 진심 어린 말로 거듭 전한다. 나는 결코 그들에게 자신의 안전지대를 넘어서길 요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스스로 그 경계를 넘어서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그 순간에 늘 매료된다.
“여성들이 작업 과정에서 주체성을 느낄 수 있도록 하려고 노력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촬영이 시작된 후 여성들은 카메라 앞에서 어떤 방식으로 자신의 아이디어와 존재감을 드러냈나?
보통 촬영이 시작되면 여성들은 예상보다 훨씬 대담한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바위와 나무에 오르거나, 옷을 입은 채 진흙탕이나 폭포 속으로 뛰어들거나, 가시덤불 아래로 기어 들어가기도 한다. 그렇게 자신이 서 있는 공간을 점유하며 그 순간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촬영 초반에는 서로 조심스럽다가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아이디어를 주고받게 되고, 여성들은 어느새 단순한 피사체가 아니라 이미지를 함께 만들어가는 적극적인 참여자로 변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자신을 온전히 표현할 공간이 주어지면 여성들이 생각보다 훨씬 멀리까지 나아간다는 점이다.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상상하지 못하던 곳까지 말이다. 어쩌면 이러한 태도는 레바논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방식과 닮아 있다.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모험에 뛰어드는 감각, 그것은 마치 DNA처럼 우리 안에 새겨진 태도다.
모든 사진에는 여성 각자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고 말한 바 있다. 모든 여성의 이야기가 궁금하지만, 그 가운데 특히 마음에 남아 있는 인물이 있다면 이야기해주기 바란다.
세 여성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이 중 한 명은 데미(Demi)라는 소녀인데, 베이루트 항구 폭발 사고로 부상을 입었다. 사고 1주년을 하루 앞둔 날, 그 소녀가 깨진 유리로 잔뜩 쌓인 공간에서 촬영하고 싶다고 먼저 제안했다. 그리고 촬영이 끝난 뒤에 이런 글을 보내왔다. “베이루트와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떨어진 이곳에서도 깨진 유리 조각들을 마주하니 익숙한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 들었다. 사건 이후 1년 만에 내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환경에서 뒤늦은 감정의 해소를 경험했다. (중략) 떠다닐 곳, 꽃피울 곳, 그리고 죽을 곳.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이곳에 속해 있다.” 촬영 다음 날 데미는 자신의 몸에 깨진 유리 조각 모양의 타투를 새겼다.
총알과 파편 자국이 남아 있는 텅 빈 수영장에 서 있는 페트라(Petra)의 초상은 내 개인적 기억과도 얽혀 있다. 내전 당시 우리 집 아파트에서 홀리데이 인 호텔이 포격당하는 장면을 지켜보곤 했다. 커튼에서 시작된 불이 도미노처럼 번져 28층짜리 건물 전체를 삼키던 장면이 아직도 기억속에 또렷히 남아 있다. 그 건물은 지금도 복원되지 않은 채 도시에 덩그러니 서 있다. 그 거대한 폐허 앞에 선 페트라는 한없이 연약하고 작아 보인다.
파라(Farah)는 2019년 10월에 시작된 레바논 민중 봉기에 참여했던 젊은 세대 중 한 명이다. 부패한 정부의 퇴진을 요구하며 거리로 나왔지만, 시위를 잠재우려는 세력이 그의 자동차에 불을 질렀다. 차를 폐차장으로 보내기 전 우리는 그 차를 사진 속에 영원히 남기기로 했다. 하나의 저항이었다.
폐허가 된 대저택, 텅 빈 극장, 분쟁의 흔적이 남아 있는 거리, 무성한 야생식물과 그 위로 펼쳐진 푸른 하늘까지, 배경에 담긴 레바논의 풍경은 인물만큼이나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듯하다. 레바논이라는 장소에서 당신이 감각하는 것은 무엇일지 궁금하다.
레바논은 다층적 질감을 가진 나라다. 오랜 전쟁을 견뎌온 만큼 도시의 벽에는 역사가 남긴 흔적들이 켜켜이 쌓여 있으며, 지리적으로는 청명한 하늘 아래 지중해가 펼쳐지고 그 뒤로 장대한 산맥이 이어진다. 사진에 등장하는 장소에는 모두 여성들의 개인적 기억과 이 땅의 집단적 기억이 동시에 스며 있다.
당신의 사진은 예술 작품에서 여성들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재현되어 왔는지 다시 생각해보게 만든다. 이 연작이 어떤 방식으로 새로운 관점을 제시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예술에서 여성, 특히 중동 여성이 재현되는 방식은 늘 내 작업의 중요한 화두였다. 중동을 다루는 많은 예술가가 여전히 서구 사회의 집단적 무의식에 깊이 뿌리내린 오리엔탈리즘적 시선과 끊임없이 맞서야 한다. 미디어 역시 중동 여성을 무력하거나 억압된 존재로 묘사하며 전쟁과 분쟁, 히잡을 쓴 여성의 초상 같은 이미지를 고정관념 아래 소비해왔다. 그 편협한 시선을 조금이나마 깨뜨리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며, 나는 이런 틀에서 벗어나 일상을 살아가는 미국과 중동의 여성을 동시대의 시선으로 담는다. 카메라 앞에 선 여성 각자의 개별성을 드러내면서도 동시에 여성들이 공유하는 공통된 삶의 감각에 집중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차이보다 그 아래에 놓인 유사성을 조명함으로써 문화적 경계를 떠나 여성들이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주체성을 획득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자 한다.
젊은 여성들 개개인의 이야기를 가까이에서 기록하며 당신이 발견한 희망은 무엇인가?
그들과 함께하며 레바논의 젊은 여성들이 얼마나 창의적이고 강인한 사람들인지 새삼 깨달았다. 분쟁이 이어지고 있는 지금도 그들은 피난민을 돕기 위해 지원금을 모으고, 음식을 만들고, 매트리스를 나르며 애쓰고 있다. 그들의 존엄과 회복력에 늘 깊이 감탄한다. 그런 그들이 나를 믿고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 보이며 함께 예술을 만들고자 했다는 사실을 큰 영광으로 여긴다. 그들이 바로 레바논의 미래이며, 이 연작은 그 여성들에게 보내는 러브 레터다.
당신의 작업을 마주할 다음 세대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포기하지 마라. 부디 지금처럼 강인하고, 아름답고,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존재로 남아주기 바란다. 당신들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 것이라 믿는다.
사진집 <Where Do I Go?>의 자세한 내용과 책 출간을 기념해 현재 열리고 있는 전시 소식은 아래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