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현대에서 지난 3월 18일부터 4월 26일까지 열리는 이우성의 전시 〈너에게 물으면 알 수 있을까?〉를 보고 그와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다른 인물들을 그리다가 어느 순간 “나는 어디 있지?”라고 자신에게 물었다. 그리고 그의 그림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2023년 학고재에서 열린 전시 〈여기 앉아보세요〉 때 작가님의 작품을 처음 봤어요. 학고재라는 공간 때문인지 처음엔 민중미술 작가인 줄 알았어요. 지금 다시 생각하면 전혀 다른 맥락에서 읽어야 했는데, 제 눈이 너무 어두웠던 거죠.
민중미술의 양식을 차용하긴 했으니 영 다른 얘기는 아니지요. 기자님이 보시기에 그 전시에서 특별히 눈에 띄는 작품이 있던가요?
있었어요. 박상영 작가의 소설 표지로 쓰인 ‘바닥에 누워서 정면을 바라보는, 중간톤으로’라는 그림이 기억에 남아요. 인물화가 여러 점 있었는데 그 그림만 톤이 완전히 달랐던 걸로 기억해요. 막이 씌워진 듯 어두웠죠.
막 뭔가를 다르게 하려고 하지는 않았어요. 그 친구한테 느껴지는 걸 그렸던 것 같아요.
박상영 작가와의 연결은 어떻게 이루어진 건가요?
기존에 있던 작업을 출판사 쪽에서 먼저 찾아서 보고, 표지로 써도 되냐고 연락이 왔어요. 저 역시 관심 있는 소설가이기도 했고, 레퍼런스도 많이 겹치는 것 같아서 바로 승인했지요. 그 뒤로 개인적으로도 알게 됐고요.
이우성, '종로3가역 5번 출구로 나오면 내가 보일 거야', 2024-2026, 캔버스에 아크릴릭, 아크릴릭 과슈, 130.5 x 162.5cm.
그 시절의 그림들을 보면 인물화가 대부분입니다. 그것도 매우 사실적인 묘사의 인물화들이죠. 반면에 이번 갤러리현대의 전시 〈너에게 물으면 알 수 있을까〉에서 인물은 뭐랄까요, ‘콩’처럼 그려지고 있어요. 저 개인적으로는 ‘빈 스타일’(bean style)이라고 말하고 싶은 이 콩적인 귀여운 인물들을 둘러싼 풍경이 화폭의 주를 이룹니다. 어떤 계기로 이런 전환이 이뤄졌는지 궁금해요.
인물화를 계속 하면서 주로 남을 그렸어요. 그러나 어느 순간 “나는 어디 있지?”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항상 나 자신은 프레임 바깥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그래서 자화상을 그려봤는데, 영 마음에 안 들더라고요. 그래서 어차피 남을 그리는 게 아니라 나를 그리는 거니까 ‘내가 느끼는 나’를 마음대로 표현해보자고 생각했더니, 나온 게 그 둥글둥글한 인물들이에요.
이 콩적인 인물들은 사실 학고재의 2023년 전시에도 등장한 적이 있지요.
맞아요. ‘지금 작업 중입니다’라는 연작인데요, 자화상이니까, 나를 그리는 거니까 좀 못생기게 그려도 되고, 굴욕스럽게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도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내가 나를 하찮게 그리는 건 누가 뭐라고 하지 않으니까요. 그런 자유로움 속에서 손이 가는 대로 그렸더니 이런 형태가 나왔어요. 둥글둥글한 덩어리 같은 제 자아가요. 내 내면의 어떤 형태, 감정의 덩어리 같은 거라고도 생각했어요. 이번 전시에서 이 인물들을 보자면, 다 조금씩 달라요. 색깔도 다르고, 상황에 맞춰서 조금씩 변해요.
맞아요. 데이트하는 인물들은 노란색이고, 밤 거리에서 어두운 마음을 품은 인물들은 검은색이죠. 눈동자가 세 개인 것들도 있고요.
그건 빛나는 눈, 감정이 넘치는 눈을 표현하려 한 거예요.
이우성, '숲속에서 두 사람', 2024-2026, 천 위에 아크릴릭 라텍스, 아크릴릭 과슈, 아크릴릭, 한지, 210 x 213cm.
갤러리현대에서 준 자료에는 '인물에서 풍경으로의 전환, 그것은 현재의 확장'이라고 되어 있었어요. 이 말을 좀 쉽게 설명해주세요.
이번에 작업할 때 쓴 자료들은 대부분 과거의 사진이에요. 근데 자료가 과거라고 해서 그림이 과거가 되는 건 아니잖아요. 그 과거의 사진을 현재 시점으로 다시 열어보면서 새로운 풍경을 만드는 거거든요. 핸드폰 사진첩에 사진이 3만 장 정도 있는데, 풍경 사진들은 그릴 시기를 못 찾아서 계속 묵혀뒀어요. 뉴질랜드, 강릉, 제주도 등등 혼자 갔던 여행 누군가와 같이 갔던 여행들이 잔뜩 있지요. 그 오래된 사진들을 2024~25년에 다시 꺼내서 그때 기억을 불러와 지금의 그림으로 만든 과정을 저는 현재화라고 생각해요.
그 사진들을 꺼내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이 작업을 시작할 때 쯤 작업실을 새로 이사했고, 연애도 잘 안 됐고, 저를 핸들링하는갤러리에도 변화가 생겼어요. 뭔가 이렇게 계속 흔들리다 보니까 외부와 단절되어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어요. ‘혼자 있고 싶다’. 이 한 문장이 머릿속을 계속 맴돌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자연 사진들을 찾아보게 됐고, 그게 이번 작업의 시작이 됐어요. 약 5개월 정도의 시기였는데, 그 사이에 여러 상황이 다 잘 해결되면서 그림이 점점 밝아졌어요. 그래서 처음 작업한 것들과 나중 것들이 분위기가 좀 달라요.
2층의 밝은 풍경들이 나중에 한 작업이군요.
맞아요. 꽃밭 그림이나 숲속의 두 사람 같은 그림들이 제일 밝아요. 떠나갔던 친구가 돌아오고 상황이 좋아지고 나니까 세상이 달라 보이더라고요. 노란 벼를 배경으로 강아지가 뛰어오는 그림도 있는데, 어딘가 갔다가 집에 돌아올 때, 나를 그렇게 반겨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그린 거예요.
작품 제목에 '우리'라는 단어가 유독 많아요. '날이 샐 때까지 우리는', '밤이 올 때까지 우리는', '해가 질 때까지 우리는'….
보는 사람이 그 제목을 읽을 때 본인 목소리로 읽게 되잖아요. 너, 나, 우리 같은 단어를 제목으로 쓰면, 그 사람과 조금 연결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어요. 〈너에게 물으면 다 알 수 있을까〉라는 전시의 제목은 물론 제가 가진 고민을 하나의 질문형태로 정리한 것이지만, 그걸 관람객이 읽으면서 본인의 고민과 그 사람이 질문을 던지는 사람을 떠올리게 되길 바란 거였어요. '우리'는 시작은 저와 그 친구의 이야기였지만, 보는 사람이 자기 이야기로 확장할 수 있도록 열어두고 싶어서 자주 쓴 단어고요. 그림 속 우리가 두 사람일 때도 있고, 화면 바깥에 있어서 보이지 않는 우리일 때도 있고, 관계 전체를 포섭하는 우리가 되기도 해요.
이우성, '해변의 사람들', 2025, 캔버스에 아크릴릭, 아크릴릭 과슈, 130.5 x 130.5cm.
종로3가, 원효로, 온천천로, 정방폭포 같은 구체적인 지명들이 화폭 안에 텍스트의 형태로 혹은 너무도 익숙해서 알 수 밖에 없는 모습으로 그림 속에 등장해요.
사실 표지판에 등장하는 길 이름 등은 끝까지 비워놓고 어떻게 할까 고민했어요. 너무 구체적인 단서를 드러내면 안 되나 싶기도 했거든요. 근데 결국 구체성을 가지고 가자고 마음 먹었어요. 이 그림들이 찍힌 시기가 실제로 좀 과거거든요. 경성 악기 옆 풍경도 지금은 다 바뀌었고, 온천천로도 주차장이 생기고 많이 달라졌고.
맞아요. 제가 러닝을 할 때 종로3가를 달리거든요. 지금은 경성악기 앞에 곱창집이 있다가 또 다른 걸로 바뀌었어요.
그쵸 그쵸. 그런 차이를 찾아보면 재밌지 않을까 싶었어요. 정방폭포 그림은 조금 결이 달라요. 관광지로 가벼운 마음으로 갔는데 거기 한쪽에 제주 4·3 사건 안내 펫말이 아주 작게 있더라고요.(정방폭포는 제주4.3사건 당시 민간이이 가장 많이 학살당한 공간 중 하나다) 그렇게나 아름다운 경관과 역사적인 슬픔이 같은 공간에 공존하고 있지요. 그 두 가지가 오버랩되면서, 이 장면을 어떻게 그려볼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됐어요.
2층에 있는 걸개 그림도 특이합니다. 걸개 그림이 주는 특유의 ‘투쟁’ 느낌이 있잖아요.
'걸개 그림'은 미술사에서 고유 명사로 쓰어요. (민중 미술에서는) 하나의 장르이고 주로 확실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매체로 기능했지요. 그래서 저는 그 형식을 빌려오되 더 사적이고 일상적인 방향으로 가보고 싶었어요. 누구나 자기 미디어를 가지고 있는 시대에 그림으로 뭔가를 주장하는 건 이상하다고 생각했거든요. 같은 형식으로 더 에세이적이고 더 사소하게 다가가고 싶었지요. 민화나 사생화, 풍속화 같은 데서 제 회화의 레퍼런스를 찾고 싶다는 생각도 예전부터 해왔고요.
이우성, '너에게 물으면 알 수 있을까?', 2026, 캔버스에 아크릴릭, 아크릴릭 과슈, 200 x 200cm.
지하에는 사운드 작업도 흐르고 있습니다.
예전부터 틈틈이 소리를 녹음해왔어요. 비 오면 비 소리, 가을이면 귀뚜라미 소리. 나중엔 마이크도 사서 모아놨는데, 그 과정이 그림을 그리는 과정과 비슷하다고 느꼈어요. 어떤 장소를 기록한다는 점에서요. 갤러리 공간에서 지하철 소리가 들리면 공간 이동하는 듯한 느낌이 들 수 있고, 갑자기 가을이 된다거나 매미가 울면 그때 그 계절이 확 환기되지 않을까, 라고 생각했지요. 그림들을 보면 누군가가 기타를 치는 장면이 몇 군데 등장하는데요, 제 그림의 모델도 한 번 해줬던 친구 윤중이의 기타 연주도 녹음해서 사운드로 사용했지요. 총 53분짜리 트랙이에요. 조용한 아침엔 지하뿐 아니라 1층에서도 다 들리더라고요.
저는 갤러리현대에 오면 보통은 1층을 보고 지하로 내려갔다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3층으로 올라가곤 해요. 어떤 순서로 보면 좋을까요?
순서를 정해 놓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지하의 달집태우기 장면(작품명은 전시명과 같은‘너에게 물으면 알 수 있을까?’)이 엔딩이었으면 해요. 달집을 태우는 건 묵은 것들을 한 곳에 다 던져 태우고 좋은 걸 불러오는 의식이에요. 달집을 태우면 그 주변에서 보고 흩어져 있던 사람들이 한 곳에 모이죠. 젊은 사람, 아이, 어른, 어르신이 다 섞여 있어요. 우리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으로, 거기서 함께 묵은 것들이 활활 타오르는 걸 보는 기분으로 마무리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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