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가전업계가 내수 부진에 중동 전쟁 악재까지 겹치면서 신음하고 있다. 원자재 가격과 물류비 부담에 중동 현지 수요 위축까지 우려되기 때문이다. 슈퍼사이클을 맞은 반도체도 핵심 공정 원료인 헬륨 수급에 비상등이 켜지면서 긴장 모드에 접어들었다.
30일 관련 업계와 외신에 따르면 런던금속거래소(LME)의 3개월물 알루미늄 선물 가격은 이날 t당 3451.5달러로 전년 대비 35.4% 상승했다. 2022년 2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약 4년 만에 최고 상승 폭이다. 알루미늄은 냉장고 냉매 배관, 세탁기 모터 등 이른바 7대 백색 가전에 쓰이는 핵심 기초 소재다.
니켈과 구리 가공에 쓰이는 황산 가격 오름세는 더 가파르다. 국제 거래 가격이 t당 661달러로 90% 급등했다. 중동이 전 세계 황산 공급량 가운데 약 25%를 책임지고 있어 황산 공급 차질은 니켈, 구리 등 소재 단가 상승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물류비도 부담이다. 냉장고, 세탁기 등 부피가 큰 생활가전은 대부분 해상 운송에 의존한다. 한국무역협회는 "봉쇄 가능성이 거론되는 호르무즈 해협을 피해 우회 항로를 이용하게 되면 해상 운임이 기존 대비 최대 50~80% 상승하고 운송 기간도 3~5일 늘어날 수 있다"고 진단했다.
실제 2024년 홍해 사태 당시 우회 항로 이용 여파로 삼성전자의 연간 물류비는 전년 대비 71.9%, LG전자는 17% 이상 급증한 바 있다. 이번 사태는 당시보다 더 큰 재무적 타격을 줄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항공 화물 비중이 높은 스마트폰 업계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두바이와 카타르 등 중동 지역 핵심 물류 허브 운항에 차질이 빚어지면서 삼성전자 모바일(MX) 사업부가 부담해야 하는 운송 비용이 천문학적으로 늘어날 전망이다. 시장조사업체 카운터포인트리서치는 최근 메모리 가격 상승과 공급망 악화까지 겹치면서 올해 전 세계 스마트폰 출하량이 2013년 이후 최저인 11억대에 그칠 것으로 내다봤다.
지난해부터 슈퍼사이클에 올라탄 반도체 업계에도 위기감이 커지고 있다. 최근 이란이 카타르 라스라판 LNG 시설을 공격해 세계 최대 규모 헬륨 생산 라인이 파괴됐기 때문이다. 헬륨은 반도체 웨이퍼 세정·냉각 공정에 필수적인 대체 불가 자원이다.
신용평가사 피치 레이팅스는 최근 보고서를 통해 "한국은 헬륨 수입 중 약 65%를 카타르에 의존하고 있어 공급 부족에 가장 취약한 국가 중 하나"라고 경고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자칫 생산 차질을 겪을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이유다.
문제는 원가 상승분을 상쇄할 여력이 크지 않다는 점이다. 가전 시장은 가격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에 비용 상승을 제품 가격에 전가하기가 쉽지 않다. 결국 기업들이 손해를 감수하며 마진율 하락을 버텨내야 하는 상황이다.
업계 관계자는 "공급망 다변화와 재고 조기 확보 등 비상 경영 체제에 돌입했지만 지정학적 리스크는 개별 기업이 통제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 변수"라며 "정부 차원의 물류 지원과 원자재 수급 대책이 절실한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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